글이 길어서 한번에 안올라가나봄



3. 탈출




수화기를 든 형순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형순

을 움직이게 한 것은 경주의 시선이었다. 경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주시하자 형순이 억지로 입

을 열었다.

“어쩌다가요?”

“가슴에 칼을 찔렸어요, 천만다행으로 찌른 놈을 잡긴 했는데 아무래도 박용식이 똘마니 같습니다“

“...그렇군요”

형순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철저히 비밀로 했거든요.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없어요”

형순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 것을 주민들 몇 명이 쳐다보고 있던 광경

이었다. 형순이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반나절도 되지 않아 아파트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

다. 진술을 부탁하기 위해 방문한 집만 해도 제법 되니 소문은 더 빨리 퍼졌을 수도 있다.

“네...”

형순의 무서울 정도로 덤덤한 대답에 그의 말이 잠시 끊겼다.

“목격자가 있으니까 곧 자세한 정황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목격자. 목격자. 그놈의 목격자가 문제였다. 안전할거라고 장담하던 형사의 혓바닥을 다리미로 지져 버리

고 싶었다.

“혹시 가족 분들 폰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조회해 보니 따님이 한 분 있는 걸로 나오는데, 집으로는 아

무리 전화해 봐도 안 받더라구요”

“아뇨,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죄송한 부탁이지만 따님을 보시거든 제 연락처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직접 가야 되는 건데

갑자기 비상이 걸려서요”

그는 송구스럽다는 음성으로 형순에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그의 뒷말을 적당히 끊은 채 형순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누구야?”

상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관리실 아저씨야”

“응? 그 사람이 무슨 일로?”

“별거 아닌데, 도시가스 파이프 하나가 얼었나봐. 가스 잘 나오는지 물어보더라구”

“으...응”

형순이 눈짓을 보내자 상준이 어색하게 수긍을 해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형순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경주의 시선이 상준을 향했다가 다시금 형순을 향한다. 희멀건 안구가 또르륵 굴러가는 것을 보며

형순이 생각을 굳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주가 알게 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죽은 사실을 알면 경주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일 생기면 아줌마가 책임져야 합니다’

며칠 전 들었던 말이 다시금 귓전을 울렸다.

“경주야 일단 밥 먹자, 엄마 오늘 안 오실지도 몰라”

“......”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당분간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비밀요?”

“응,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일자리 구한다고 잠시 어디 가셨거든”

“일자리...?”

경주의 마스크가 불룩하게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두 눈 가득 의심의 눈

초리로 채워졌다.

“너...너도 알고 있었잖아. 느이 엄마 요즘 일자리 구한다고 하시는 거”

“맞아요, 근데...”

경주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형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는 사실까지 아줌마가 어떻게 알죠?”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상준과 영미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지켜만 보았다.

‘침착하자, 유형순! 이 아이는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어. 섣불리 대답했다간 금방 들통 날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오시거든 한 번 물어봐. 왜 나한테만 말했는지 말야”

형순이 입술은 다문 채 볼 근육만을 이용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경주가 돌아가자 상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경주 엄마가 죽었어”

“뭐?”

“정말이야?”

상준과 영미의 입에서 동시에 반응이 튀어 나왔다.

“아까 전화, 관리실 아저씨가 아니라 경찰서에서 걸려온 거였어”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왜 죽어?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살해 당했대...”

“자세히 좀 얘기해봐, 그러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살해를 당해?”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뭐?”

“당신이 그 빌어먹을 형사한테 신고했기 때문에 죽은 거라구”

“아...”

상준이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왜 경주한테 말 안했어?”

“당신 같으면 그 상황에서 말이 나왔겠어?”

“그럼 어떡해, 어차피 경주도 알게 될 텐데”

“안전할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경주한테 말했었다구!”

버럭 고함을 지르던 형순이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아찔한 두통이 미간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할퀴고 지나갔

다. 형순의 말에 상준이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건데?”

영미가 형순에게 물었다.

“이사 갈거야. 경주에게는 며칠만 비밀로 하면 돼. 여기 계속 있다간 우리까지 위험해져”

“세상에...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아빠 무슨 말 좀 해봐!”

상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버리자 영미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쳤어, 다들 미쳤어”




다음 날 상준은 몸살을 핑계로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사실 결근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형순의 강경한 태

도에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둘은 오전에만 열 집 가까이 방문했다. 아파트든 빌라든 상관없었지만, 지금 사

는 곳과는 최대한 떨어진 곳이어야 했다.

상준의 회사야 어차피 중심가에 있었기 때문에 교통 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점심은 이동 중에 햄버거로 때

웠고,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망설이지 않고 빠져 나왔다. 아마도 집 주인들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황당

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후에도 번번이 허탕을 쳤다. 상준이 관심을 보이는 곳은 더러 있었지만 형순이 마음

에 들어 하지 않았다.

늦은 저녁을 다시 햄버거로 때우고는 대방동으로 향했다. 시간상으로 볼 때 이 집이 거의 마지막일 듯싶었

다. 신축한 지 삼년도 안 된 아파트였는데, 급매물로 올라온 것을 운 좋게 발견한 것이다.

집 주인은 사는 곳이 따로 있었는데, 투자 개념으로 사둔 것을 좀처럼 값이 오르지 않자 내놓은 것이었다.

주인이 잠금 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인테리어가 깔끔한 것이 형순의 마음에 들었

다. 베란다와 보일러실까지 돌고 온 상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순이 주인한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형순이 선금으로 오백만원을 내자 주인이 양도계약서를 작성해 주었다. 이제

중도금과 잔금만 치르면 계약서에는 자신들의 붉은색 인장이 찍힐 터였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에 도착했다. 지하주차장은 퇴근한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리저리 돌아봐도 빈자리

는 쉽게 발견 되지 않았다. 그렇게 주차장을 빙빙 돌고 있을 때 상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한형사, 그래 지금 나랑 있어. 왜?”

상준의 말에 형순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툭툭 건드렸다.

“뭐? 아, 잠깐만”

상준이 용케 알아듣고는 핸드폰의 스피커기능을 작동시켰다.

“....두 분이서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응, 볼일이 있어서 말야”

“사모님 좀 잠깐 바꿔 주시겠습니까?”

“저도 듣고 있어요, 말 하세요”

형순의 대답에 그가 멋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그러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신명희씨 말인데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래도 부검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사인이 명확하지가 않아요. 흉부관통상으로 봤는데, 검의관 말

로는 아닐 수도 있답니다. 신명희씨 집에서는 계속 전화를 안 받구요”

“부검하는데 가족들 동의가 꼭 필요한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연고자 없는 사체의 경우에는 임의로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래도 조금 꺼림칙한 면이

있죠”

“그럼 일단 하세요. 제가 그 집으로 직접 찾아 가볼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날 밝는 대로 방문할 생각이거든요”

“아...네”

형순과 상준의 시선이 중간에서 얽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무슨 핑계를 대야 그가 찾아오는 걸 막을

수 있을까. 형순이 잠시 고민하느라 말이 없자 한 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약간 걱정이 돼서 전화 드렸습니다”

“걱정이라니?”

상준의 반문에 그가 가볍게 대답했다.

“전화해도 아무도 안 받길래 혹시나 했죠, 신명희씨처럼 무슨 일 생긴 건 아닐...”

“잠깐만요! 전화한 시각이 언제죠?”

“방금 전이요, 십 분도 안됐을 겁니다”

“오, 맙소사”



형순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오층에 멈춰있던 엘리베이터가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형

순에게는 지독히도 느리게 보였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입술을 물어뜯으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 시간에 영미가 잠들었을 리는 없다. 늘 새벽까지 영화를 다

운 받아 보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된 일일까.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할 정도로 영미는 느긋한 성

격이 아니었다.

‘대체 왜 안 받은 거지? 피곤해서 일찍 잠든 걸까?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띵, 두둥”

그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형순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엘리베이터로 옮겨 놓자 상준이 칠층의 버튼을 눌

렀다. 칠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형순이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영미야!”

집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영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형순을 쳐다본다.

“야 이 망할 기집애야, 집에 있으면서 전화는 대체 왜 안 받았어, 응?”

깊은 안도감이 지나간 후에는 억울한 감정이 찾아왔다.

“악, 아퍼! 왜 때리고 난리야”

형순이 팔뚝을 철썩 때리자 영미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게 왜 전화를 안 받아, 이것아”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형순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장실에 있었단 말야, 그럼 나보고 일보다 말고 전화 받으란 말야?”




형순은 밤새 뒤척거렸다. 내일 한형사가 찾아 올 것을 생각하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틀 정도

만 더 있었다면, 아니 하루만이라도 좋았다. 딱 하루만 늦게 온다면 그 사이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도의적인 비난은 받을지언정 법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혼자 남

겨질 경주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뒤이어 떠오르는 그녀의 추악한 용모에 그런 생각은 슬그머니 사

라져 버렸다.

날이 밝자마자 형순이 침실을 빠져 나왔다. 전신이 욱신거리고 뻑뻑한 눈알에서는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그

녀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계획하나가 떠올랐고, 그것 외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보였다.

우선 용역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인부 세 명과 용달차 한대를 요구하자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제가 말씀 드린 장소로 오셔서 대기하고 있어 주세요, 바로 작업할 수 있게요”

조금 특이한 요구였지만, 직원은 별다른 질문도 없이 승낙했다. 통화를 끝내고서 출근하려는 상준을 붙잡았

다.

“오늘 그 사람들한테 돈 받아서 입금 시킬 테니까 저녁에 영미 데리고 새 집으로 가 있어, 당신이 더 빨

리 마치잖아”

“벌써? 아직 가구도 안 옮겼잖아”

“옮길 거야, 맨바닥에서 자게 하진 않을 테니까 내 말대로 해”

상준이 미덥잖은 표정으로 형순을 쳐다본다.

“그냥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는게 어때?”

“당신이 말해 준다면 기꺼이 찬성 하겠어”

“아니다, 그냥 새 집으로 갈게”

상준과 영미가 나가고 나자 형순이 다시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CF에서 자주 들어 봤던 클래식 선율이 흘

러나오고 잠시 후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영미엄마예요”

“아,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지금 아무도 없어요, 학교에 간 것 같은데 불러도 대답이 없네요”

“그래요? 이거 어쩐다...그래도 일단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따가 밤에 와보세요, 고등학생들 보충수업 여덟시 넘어서 끝나거든요. 지금 와봤자 헛걸음

만 할 텐데요 뭘”

“흠...”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찰칵. 한형사와의 통화를 마친 후에도 형순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노부부에게서 오전까지 입금을 약속 받

고 나자 일이 술술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용도실에 처박혀 있던 박스들을 꺼내 귀중품부터 차근차근

챙겨 넣었다. 장식품이나 전시된 물건들은 가급적 피하고 서랍이나 장롱속에 있는 것들을 위주로 차곡차곡

담아 나갔다.

안방과 영미 방에 있는 옷들을 모조리 꺼내서 거실 중앙으로 모았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어서 나중에는 박

스뿐만 아니라 보자기, 심지어는 담요까지 동원해 말아 넣었다. 고된 작업이 끝났을 때 시간은 어느새 정오

가 훌쩍 넘어 있었다. 문득 공복감이 밀려왔지만 이 상황에서 도저히 뭘 넘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혹

시 그 사이에 경주라도 찾아온다면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용역센터 직원이 알려준 인부 한

명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705호로 올라오세요, 최대한 조용하게요. 아셨죠?”

그들의 입장에서는 횡재한 날일 것이다. 기껏 잡담이나 나누면서 반나절을 때웠으니 말이다. 혹시나 싶어

현관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경주의 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지만 금세라도 벌컥 문이 열리고 경주가 튀

어 나올 것만 같았다.

오 분쯤 지나자 인부 셋이 라텍스 장갑을 낀 채 나타났다. 형순이 재빨리 그들을 안으로 들인 다음 문을 닫

았다.

“여기 있는 짐들을 차에다 옮겨 주세요, 최대한 조용하게요”

“아줌마! 아침도 못 먹었는데 밥 먹고 하죠, 자장면 세 그릇만 시켜 주세요. 기다린다고 배가 고프네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사내 하나가 능글맞게 말하자 남은 두 명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이거 다 옮기시면 자장면이 아니라 탕수육도 시켜 드릴 테니까, 우선 옮겨 주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용하게요, 시끄럽게 하시면 탕수육은커녕 자장면도 없습니다, 아셨죠? 끝

내신 다음에는 아까처럼 차에서 대기해주시구요”

형순이 재차 정숙을 강조했다.

"뭐 알겠습니다. 양도 얼마 안 되는데 끝내고 먹는 것도 괜찮겠네요”

대머리 사내가 찬성하자 형순이 검지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렸다.

“정확히 십 분 후에 움직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