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2시.
"부산행 버스표 한 장 주세요."
"청소년입니까? 성인입니까?"
"...청소년입니다."
"부산행 버스 출발시간은 2시 20분이며 10번 입구쪽에서 타시면 됩니다."
난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요금을 더 깎아보자는 생각에 청소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운이 좋았던 지 매표소 직원은 아무런 의심없이 부산행 버스표를 건네주었다.
아마도 내 얼굴이 10대 후반처럼 어려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려보인다는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부산행 버스표를 받아들고 나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온갖 사람들이 북적대는 그 복잡한 사이를 뚫고 지나가며 서울->부산행 버스가 오는 10번 입구를 찾았다.
이제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조금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근처에 있던 넓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허기가 밀려왔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이 컸지만 이 정도 허기는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아도 최우선으로 빨리 서울을 떠나고 싶다.
서울은 우리집과 가족이 존재하는 유일한 곳이지만 적어도 지난 몇 년 간은 정말 최악이었다.
안 좋은 과거들을 떠올릴때마다 마치 내가 인생의 패배자인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릿속에 가장 떠올리기 싫었던 건 바로 어제 내가 어머니를 때렸던 행동이다.
미친 놈처럼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하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 같아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부산....
마음을 비우고 어디론가 떠나기엔 다른 좋은 곳들도 많았지만 굳이 부산을 택했던 것은 친척집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한 때 나와 친했던 부산 친척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부산에 사는 친척집에 안 가본 지 몇 년이 넘었지만 예전 기억을 떠올려보면 항상 우리 가족이 그 곳에 갈 때마다
친척들이 내가 온 것을 무척 반갑게 오기며 아들이나 친동생처럼 대해줬던 것 같다.
따라서 내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모두 다 떨어진다 하더라도 친척집에 가서 편히 지내면 될 일이었다.
잠깐... 내가 사라진 걸 알면 어머니가 모든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리지 않을까...? 그게 아냐... 어머니는 괜찮은 걸까...?
- 부릉! 부릉! 푸쉬쉭....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부산행 버스가 왔다는 안내판을 보자 입구에 있는 여성안내원에게 승차권을 건네고 버스에 탔다.
내 자리가 창가쪽 자리인게 정말 좋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하필이면 덩치빨 약간 있는 남자였다.
'여자면 더 좋을 뻔 했는데..."
5분 뒤 버스 스피커에서 안내말과 함께 출발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자 좌석의자를 뒤로 밀어 좀 더 편한 자세를 취했다..
'또 서울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몇 시간 뒤 도착한 금강휴게소에서 버스 문제 때문에 약 30여분간 정차하겠다는 버스기사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렇게나 오래...?'
뭐, 잘된 일이다. 안 그래도 배가 고픈 참이었는데..
휴게소 매점에서 컵라면을 하나 골라 계산한 다음 들고 나와서 먹을 만한 장소가 없나하고 가만히 휴게소 주위를 둘러보던 중
뒷편에 탁 트인 공간이 보였다.
'그래. 저기로 가자.'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편안해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서자 눈 앞에 꽤 넓은 강이 펼쳐졌다.
주변 경치와 어울려 매우 아름다운 강이었다. 나는 근처 한 켠에 앉아 컵라면의 봉지를 열어젖히고는 후~하고 식히면서 불어먹었다.
이윽고 컵라면을 다 먹고 나자 어느 새 석양이 떠오른 탓이었는 지 아니면 기분 탓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조용히 흘러가고 있는 강의 모습이 무척 쓸쓸해보였다.
꼭 현재의 내 기분을 표현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다시 심란해졌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강의 경치를 좀 더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생각에 잠겨 금강휴게소의 뒷편에서 천천히 걸어나올 때 누군가와 부딪혔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힌 것이다.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버스 쪽으로 걸어갔다.
"야!"
나랑 어깨를 부딪친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냥 무시하고 버스를 향해 계속 걸었다.
"야, 이 새꺄! 내 말 안들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있는 한 사람의 고함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는 것 같았다.
"어린 놈의 새끼가 어깨를 부딪쳤는데 사과도 없이 그냥 가!?"
그 놈이 다가와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어! 시발! 지금 나 무시하냐고!!!"
"...죄송합니다."
조금이라도 내 모습이 흐트러지면 그 놈이 당장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였지만 내가 결코 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면서 당당한 어조로 사과하였다. 그러자 그도 약간은 움찔해보였다.
"별 것도 아닌 놈의 새끼가...다음부턴 눈 똑바로 뜨고 다녀라..."
움찔한 것도 잠시... 그 놈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는 듯 인상을 팍 쓰면서 뒤돌아섰다.
그 놈이 다시 뒤돌아서서 일행들에게 다가가는 뒷모습을 잠깐 살펴보니 마치 자기가 승리자라도 되는 듯 보였다.
솔직히 평소같으면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는 놈이긴 하지만.... 근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버스 안에서 약간씩 떨리는 몸을 진정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힘든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별 일 아니었을텐데...
휴게소에서의 실랑이를 마치고 나서 내가 탔던 고속버스는 머지 않아 곧 부산터미널에 도착하였다.
고속버스에서 내린 나는 북적대는 인파들 사이로 부산 터미널을 빠져나와 근처에 있던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
부산에 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근 몇 년간 한번도 안 와봐서 그런 지 분위기가 좀 많이 낯설었다.
역무소에서 해운대 쪽으로 향하는 지하철 표를 끊은 뒤 계단을 따라 내려가 지하철을 탔다.
- 덜컹! 덜컹! 덜커덩!
서울은 지하철이 항상 만원대라 불쾌지수가 높았지만 이 곳 지하철은 의외로 한산했다.
- 띠리리리리링.
"해운대 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왼쪽 문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소리를 듣고는 해운대 역에서 내렸지만 타는 사람들과 아니면 내리는 사람들도 나를 포함해 별로 없었다.
오래전에 몇 번 왔을 때 해운대 역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 이 곳이 말이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표를 집어넣고 나올 때도 나 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출구 쪽을 향해 걷던 도중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출구 근처에 청소년처럼 보이는 얘들이 벽에 붙어있었는 데 그 아이들의 주위에는
다 꺼진 몇 개비의 담배 및 비어진 술병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벽에 바짝 붙어있는 아이들의 등 뒤 사이로 낙서비스무리한 게 칠해져있었다.
'지하철 입구 안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단 말이야... 이건 나 때보다 더 심한 놈들이네..'
...다른 길로 돌아갈까하고 생각했지만 저 멀리서 이미 아이들 중 한 명이 내 쪽을 바라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피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 태연한 척 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만약 저 놈들 사이로 걸어가지 못하면 난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얘들한테
쫄아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하철 바깥 출입구 쪽으로 다가가니 아이들이 취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왼쪽 벽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오른쪽 벽에 기대고 앉아
라이타로 장난을 치고 이외에 나머지 두 명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애써 시선을 무시하면서 그냥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렇게 숨 막히는 상황 속에 해운대 역을 겨우 빠져나오자 이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바깥날씨는 내가 부산 터미널에서 빠져나올 때보다 어둠이 더욱 짙게 깔았고 길가의 대형시계는 벌써 오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보를 지나서 신호등을 건너 해운대에 도착하자마자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풀고는 모래사장에 그대로 풀썩 드러누웠다.
어제 저녁부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이런저런 숱한 상황을 겪은 탓에 몸이 많이 지쳐있었던 지
모래사장에 드러눕자말자 금새 피곤함이 몰려왔다.
'몸 하나 까딱하기 싫다...'
바닷가라서 조금 추웠지만 축 늘어진 몸 주변에 뭐 하나 덮을 것도 없어서 가방을 베개 삼고는 그냥 눈을 감았다.
포풍연재 손연재
보고 잇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