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주가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아파트 공용 주차장에는 이미 차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기 위해 혜주는 두 번이나 주차장을 돌았다.
결국엔 현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끼어서 차를 주차할 수 밖에 없었다.
앞에 주차된 차의 뒤쪽을 아슬아슬하게 가로막아 차를 주차하면서
혹시 옆 차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내일도 아침 일찍 나가야 할 것이라 별 걱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였다.
차에서 내려 현관까지 걸어오면서 괜스레 더 신경이 쓰였다.
피곤한 하루였다. 어젯밤도 브리핑 준비로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한 혜주였다.
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피로였다. 수술도 그렇고 브리핑도 그렇고
막 전문의를 단 의사에게는 주어지기 힘든 기회였다.
과장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어제 낮, 수술에 들어가기 위해 소독을 하고 있는 혜주에게 과장이 갑작스레 말을 던졌다.
"이 수술, 혜주씨가 집도하도록 해요."
"네? 제가요? 하지만 과장님께서 하시기로....."
"내가 혜주씨를 믿으니까 맡기는 거요."
"네....."
혜주는 약간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과장의 갑작스런 지시를 예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학병원에서 과장급에게 배당된 수술을 전문의가 대신 집도하는 것이
간간이 있는 일이었지만 이처럼 큰 수술을 맡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과장의 말이 떨어진 그 순간 혜주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겸손 섞인 승낙이 아니라 자신감에 찬 쾌재였다.
얼마나 이런 순간을 기다렸던가.
어렵지만 그만큼 성공을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수술이었다.
폐암 중기, 이미 왼쪽 폐의 절반이 암세포로 뒤덮여 있는 환자였다.
폐동맥까지 거의 잠식해 들어간 암세포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동맥을 끊어 다시 이어야 하는
대수술이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미 자신이 있었다.
혜주의 상상 속에서 그리고 꿈속에서 이런 류의 폐암 수술은 이미 수십 차례나 반복되었다.
때로는 맥박이 영으로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환자가 벌떡 일어나 혜주를 쳐다보기도 했다. 혜주는 언제나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해서 꿈 속 환자의 얼굴을 직접 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미 그 꿈 속 환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혜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흐릿한 흑백 사진으로 밖에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
혜주는 꿈속에서 그 아버지를 수술하고 또 수술했다.
수술을 하는 내내 혜주의 손놀림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장조차도 혜주의 과감하고 정밀한 수술실력에 놀라는 눈치였다.
혜주는 꿈속에서 하던 대로 기계적으로 손을 놀렸다.
문득 대학 시절 한 젊은 가정의학과 교수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슈바이처나 대단한 의학자가 아니라
염가에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잘 훈련된 엔지니어이다."
교수의 말은 일반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영세 의원의 부족을 지적한 것이었지만,
혜주는 이 말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엔지니어..... 혜주는 자신이 물컹한 기계의 부속을 만지는 정비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혜주는 F1경기에 참가하는 전문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특급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에서
몇몇 부서진 차들을 잘못 만져 영원히 못쓰는 차가 된다하여도
그로 인해서 최고의 엔지니어가 탄생할 수 있다면,
그러한 작은 희생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혜주의 무의식 속에는 자리잡고 있었다.
4시간에 걸친 대수술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안경에 김이 서릴 정도로 공을 들인 수술을 끝내고
과장과 함께 수술실을 나선 혜주의 눈에 안절부절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 가족들이 들어왔다.
가족들은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과장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물론 차후 경과는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이번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과장은 마치 조산원이 '아들입니다!' 하는 소식을 전하듯 미소를 머금고 그들에게 수술 경과를 전했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렀고, 부인인 듯 보이는 아주머니는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 나오는 과장과 혜주의 뒤로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가 던져졌다.
'나의 성공이다!'
과장의 뒤를 따라 걸으며 혜주는 속으로 몇 번을 되새겼다.
이것으로 과장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이제 혜주 앞에 남은 것은 국내 최고의 외과의로 명성을 쌓아가는 일 뿐이었다.
현재 폐암 수술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라 불리는 과장마저도 언젠가는 혜주가 따라잡아야 할 목표였다.
"내일 브리핑도 혜주씨가 준비하도록 해요." 과장이 걸음을 늦추지 않고 말을 던졌다.
"네?"
혜주는 깜짝 놀라 물었다. 과장이 수술을 맡긴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번 지시는 은근한 야망으로 가득 찬 혜주로서도 정말 놀라운 말이었다.
브리핑을 혜주가 맡는다는 말은 이 수술이 공식적인 혜주의 집도 기록이 된다는 말이었다.
경험뿐만이 아니라 작게나마 명성을 쌓을 발판마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과장님...."
혜주는 차마 감사하다는 말도 알겠다는 말로 못하고 그 자리에 서 버렸다.
"혜주씨 실력이 있어 보여서 내 이러는 거요. 고마워 할 꺼 없어요."
과장은 늘 그렇듯 할 말을 하고 먼저 걸어가 버렸다.
혜주는 잠시 멍하니 섰다가 마침내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지나가는 간호사가 이상하게 쳐다보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혜주는 함박 웃음을 띤 채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브리핑 준비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밤을 꼴딱 새며 연습을 하고 또 했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이 죄다 모인 국내 최고대학의 부속 병원이니
칼날 같은 질문이 아니 들어올 리가 없었다.
혜주는 대학시절 줄줄 외운 해부학 기본서까지 꺼내 다시 읽으며 브리핑 준비를 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정례 브리핑에서 혜주는 역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수술 내용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과장의 도움도 매우 컸다.
시종일관 혜주의 재능을 칭찬하며 브리핑 내내 우호적인 분위기를 주도해나간 것이다.
막 전문의를 단 혜주의 너무 이른 성공에 몇몇 이는 시기심 어린 눈초리도 보였지만,
과장의 절대적 신임 하에 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 없이 브리핑을 해 나아갔다.
".........이상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과장이 먼저 박수를 쳤다.
브리핑 룸 내의 외과의들이 따라 박수를 치고 과장이 또 한 번의 치하의 말을 했다.
"수고 많았어요. 혜주씨. 역시 훌륭하군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혜주는 과장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것은 과장의 인정이 혜주의 앞날에 빛을 던져준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혜주가 진심으로 과장을 존경하는 까닭도 있었다.
과장은 국내 외과수술 방면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짧은 미국 유학시절도 있었지만 과장은 거의 모든 수술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성공시킨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혜주 역시 그가 성공시킨 여러 수술들을
전문의 과정을 밟는 내내 수 차례나 목격하였다.
물론 혜주가 과장을 존경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국내 최고대학 부설병원의 과장을 지내고 있을뿐더러,
국립보건원 연구이사를 겸임하고 있으며 보건원 산하 폐암연구학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과장은
그야말로 국내 외과 의학계의 노른자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청빈한 학문적 성공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혜주에게 과장은 가장 이상적인 표본이었다.
그러나 과장은 결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법은 없었다.
순순히 혜주와 같은 실력 있는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만 보아도
과장의 인간됨은 이미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혜주의 몸이 오징어처럼 늘어졌다.
혜주는 집에 들어 가자마자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서 자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화장은 지우고 자야겠지? 어쨌든 오늘밤만은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푹 자리라 혜주는 다짐했다.
그러나 집 앞에 도착한 혜주는 뜻밖의 소포에 쏟아지던 잠이 달아났다.
노란 소포 포장 용지에 싸여진 상자에는 또박또박 보낸 이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경남 밀양시 밀양대학교 석진규."
주소를 읽어나가는 혜주의 얼굴에 놀라움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진규. 어린 시절 혜주와 한 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였다.
혜주는 얼른 들어가 소포를 열어보고픈 마음에 서둘러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열쇠 구멍에 열쇠를 맞추는 일조차 쉽지가 않았다.
딸깍. 문 따는 소리가 들리고 혜주는 허리를 숙여 소포를 들어올렸다.
뭐가 들었는지 약간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혜주는 소포를 들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출처 무늬만토끼
말 먼저 걸어봐!
재밌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