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87년 여름이었을까. 혜주와 진규는 초등학교 4학년을 한 반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지냈다.



둘은 전교 1, 2등을 다투는 사이였고, 다만 혜주가 여자라는 이유로 부회장에 낙점이 된 것이었다.

혜주는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불만이었다. 해서 진규와도 그다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로 반장과 부반장을 선임하게 된 날,

혜주는 다시 부반장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1학기 두 번의 시험에서 두 번 다 혜주가 아슬아슬하게 진규를 이겼지만,

담임선생님은 싫다는 진규를 억지로 반장의 자리에 앉혔다.



혜주는 그 날을 계기로 진규와 친하게 지내기로 결심을 하였다.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는 여자아이로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체념도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반장 자리를 사양하는 진규의 조용한 성격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2학기 중간고사 성적이 발표된 날이었다.


"이번 중간고사 1등은 진규다. 평균 97.5점. 반장이 체면을 차렸구나. 자, 모두 박수!"


아이들은 박수를 쳤고, 진규는 성격답게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혜주는 4학년 들어 처음으로 진규에게 전교 1등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혜주는 0.2점 차이로 이번엔 2등이구나. 혜주에게도 우리 박수 한 번 쳐주자."



아이들은 또 한 번 부러운 섞인 박수를 쳤다.

진규 역시도 박수를 치며 혜주를 쳐다보았다.

혜주는 진규와 눈을 마주치며 입으로 '축 하 해!'라고 신호를 보내었다.

진규는 혜주의 입 모양을 읽었는지 '고 마 워!'라고 답을 해 왔다.



그 날 저녁 진규와 혜주는 늦게 학교에 남아 아이들의 받아쓰기 채점을 하고 있었다.

시골 학교엔 늘 그렇지만 선생님들이 과중한 업무에 치게 마련이고,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몇몇 아이들이 받아쓰기 채점과 같은 소소한 일거리를 도와주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경우는 전교 1등과 2등이 한 반에서 반장과 부반장을 맡고 있으니

더욱 믿고 잡일을 맡길 수 있는 것이었다.



창가로는 낮부터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들도 다들 집으로 갔는지 조용한 운동장의 풍경만이 들어왔다.



혜주와 진규는 창가에 책상을 붙여놓고 마주앉아서 채점을 하고 있었다.



진규가 먼저 자기 몫의 채점을 다하고는 붉은 색연필을 책상에 놓았다.

"많이 남았니? 도와줄까?"



1학기 중에도 이런 기회가 있었지만, 진규와 혜주는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워낙에 혜주가 차갑고 딱딱하게 굴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반의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편이 갈라져 크게 싸우는 일이 있었던 까닭에

그 분위기에 묻혀 서로 말을 주고받기도 어색했던 점도 있었다.

해서 1학기 내내는 누군가 먼저 채점을 끝내도 그냥 말없이 기다리고 있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의 혜주가 보낸 우호적인 메시지가 둘 사이의 서먹함을 없애버렸는지

진규가 먼저 말을 건네어왔다.


"잠깐만." 혜주가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몫의 시험지는 매겼다.


"나도 다 했어."


혜주와 진규는 색연필을 놓고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선생님 왜 안 오시지?"


"내가 가서 말씀드릴까?" 진규가 대답했다.


"그냥 기다리자. 좀 있으면 오시겠지."


"그래, 그럼 그러자."


선생님을 기다리는 둘 사이에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진규였다.


"혜주야. 넌 꿈이 뭐야?"


"꿈?"


"응. 커서 뭐가 될꺼야?"


"난 의사." 혜주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왜?"


"암을 고치려고."


"암?"


"응. 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대."


"그렇구나. 안됐다."


"물론 난 아버지 얼굴도 못 봤어. 나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





그 때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채점 다 했니?"


"네."


"그럼 그냥 거기 놓고 가거라. 수고했다."


"네."


"그래. 선생님이 좀 바빠서 그래. 미안하다. 다음에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주마."


"네. 선생님. 안녕히 계셔요."


혜주와 진규는 가방을 메고 교실을 빠져 나왔다.



혜주가 진규에게 같은 질문을 한 것은 집으로 향하는 기나긴 둑길을 반 넘게 걸어왔을 때였다.


"진규야. 넌 꿈이 뭐야?"


"나? 글세." 진규는 한참을 고민했다.


"나도 의사." 진규의 대답이었다.


"의사? 왜?"


"혜주 너랑 같이 의사하면 좋을 것 같아서."


진규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순진했다. 그래서인지 혜주는 갑자기 진규가 마음에 쏙 들어버렸다.


"그래 우리 나중에 커서 같이 의사하자."


"그래."



노을지는 긴긴 둑길을 걸어가던 두 꼬마의 모습은 이미 20여 년 전의 추억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그 20년 중 10년은 서로 연락이 끊긴 채 각자의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혜주의 문 앞에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진규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가위로 소포의 포장을 뜯어내었다.

안에는 봉투에 든 편지 한 장과 드링크제 한 통이 들어있었다.

혜주는 얼른 봉투에 든 편지부터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혜주에게.

안녕? 잘 있었니? 이렇게 불쑥 소포를 보내서 놀랐지? 서로 연락이 끊긴지도 10년이 되어 가는 구나.

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의사가 되었다며. 우연히 네 소식을 듣게 되었어.

난 여기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어. 산학 협동으로 얼마 전에 드링크제 하나를 개발했는데,



식약청의 허가도 떨어졌고, 이제 상품화하는 일만 남았어.

내가 연구하는 동충하초라는 건데, 암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었어.

너에게 이 샘플을 보내주고 싶었어.
네가 의사가 되어 암을 고치겠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

나도 함께 하기로 했는데, 결국 그렇지 못했지.



하지만 난 나대로 새로운 접근법을 찾았단다.
언제 한 번 서로 만나서 얼굴보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드링크 한 번 마셔봐.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안녕.

석진규.







짧은 편지였다. 그렇지만 혜주에게는 어린 시절의 감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0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다는 진규의 소식이 어쩐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혜주 자신이야말로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마저도 들었다.


혜주는 드링크가 든 박스를 열었다.

시중에서는 보지 못한 박스였다.

안에 든 병에는 딱히 상표도 붙어있지 않았다. 판매가 되지 않은 시제품인 것이 표가 났다.



다만 뚜껑에만 '冬蟲夏草(동충하초)'라는 글씨가 쓰여있었다.



혜주는 한 병을 따서 꿀꺽 마셔버렸다.



쌉싸름한 향이 시중에 파는 드링크 제품의 맛과 딱히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혜주의 휴대폰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가방 속에 든 휴대폰을 찾느라 혜주는 가방을 죄다 털어야 했다.

허겁지겁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받자 들리는 목소리는 과장이었다.


"혜주씨? 나 최과장이오."


"아, 네. 과장님. 이런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과장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좀처럼 긴장하는 법이 없는 과장의 목소리가 이처럼 들떠 있는 것과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한 것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일이 틀림없었다. 급한 환자일까?


"혜주씨. 지금 날 좀 도와줄 수 있겠소?


"과장님, 무슨 일이시죠?"


"전화로 말하긴 어려운 사안이오. 하지만 무척 중요해요. 꼭 혜주씨가 날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저야 과장님께서 부탁하신다면 언제든지 도와드려야죠. 지금 어디세요?"


"일단 병원으로 와주게."


"네, 지금 제가 병원으로 갈게요."


"고마워요. 혜주씨."


과장의 전화가 끊겼다. 혜주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더욱 궁금해 왔다.

혜주는 서둘러 백에서 꺼낸 물건들을 다시 쓸어 넣었다.



과장이 이토록 급하게 혜주를 찾을 만한 일이라면 한 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무토/다시봐도 흥미진진!..)


가방을 들고 문단속을 하고 나오면서 혜주는

주차에 대한 걱정이 퍽이나 쓸모 없는 걱정이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혜주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진규가 보낸

드링크의 뚜껑이 자신의 가방 속에 들어간 사실은 알지 못했다.







물론 그 뚜껑이 혜주에게 얼마나 큰 행운을 안겨다 줄 것인지 역시 혜주는 알지 못했다.





출처 무늬만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