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으로 운전해 가면서 내내 혜주의 머릿 속을 지나간 생각들은 과장의 부름에 대한 의문보다는

어린 시절 진규와의 추억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남녀학교로 갈리긴 했지만

시내로 통학을 하면서 늘 함께 다니곤 했던 기억들.



때로는 등교 시간에 늦어 진규의 자전거 뒤에 앉아가기도 했다.


시내로 나가는 길은 어린 시절의 그 뚝길을 지나야 했다.

그때까지도 그 길은 흙길 그대로여서 자전거 뒤에 앉아가려면 여간 엉덩이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야. 엉덩이 아파. 좀 천천히 가."


진규의 허리춤을 붙잡고 혜주가 소리를 치면 진규는 짓궂게도 더욱 속력을 높이곤 했다.

그러면 학교까지 가는 내내 혜주는 비명을 질러댔다.


혜주의 학교 앞에 자전거가 서자 혜주는 얼른 뛰어내리며 진규의 등짝을 두들겼다.


"야, 이 나쁜 자식아! 천천히 가라니까. 머리도 바람에 다 날렸잖아!"


진규는 늘 그렇듯 말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제 갈 길로 자전거를 몰고 가버렸다.

혜주가 멀어져가는 진규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공중에 주먹질을 해대고 있노라면



혜주의 친구들이 다가와서 둘의 관계를 놀리곤 했다.



"야! 김혜주. 또 남자친구 자전거 타고 학교 왔냐?"


"남자친구는 무슨 개코가 남자친구야! 내 저런 자식을 그냥 죽여버려야지. 에휴."


"야, 벌써 소문 다 났어. 밀양여고 1등이란 밀양고등학교 1등이랑 사귄다.

좁은 밀양 바닥에 소문 다 났어."


"소문은 무슨 소문이야! 얼른 가자. 늦겠다."


소문이 돌아도 혜주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진규와 나란히 서울대학교 의대에 진학할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


진규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은 대입을 석 달 앞두고서였다.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다가 갑자기 쓰러지신 진규의 아버지는

이르가 부러지신 것보다 더 큰 병을 가지고 계셨다. ()

폐암.

혜주의 아버지에게 내려졌던 저주가 이번에는 진규의 아버지는 덮친 것이었다.


진규는 서울로 진학하겠다는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과수원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진규는 밀양에 있는 대학교의 농과대학에 진학하기로 하였다.


마을 뒷산에서 진규와 혜주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혜주 네가 내 몫까지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의사가 되어줘."


진규의 그 말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혜주의 귓가에 맴돌았다.

혜주는 그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운명이란 언제나 사람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곤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날 혜주와 진규는 말없이 손을 잡고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20년을 한 동네에 살면서 친구처럼, 철이 들면서 때로는 연인처럼 지내온 둘이었지만

그렇게 손을 잡고 있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도 서로 연락하면 되지 뭐."


진규는 그렇게 말했고, 혜주도 반드시 그러리라 다짐했지만

결국 대학에 진학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혜주가 어머니와 함께 완전히 서울로 이사를 해버렸고, 다시 고향에 내려갈 일이 없어져버린 탓이었다.



의과대학에서의 일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하루하루 감당해야 할 공부에만 신경을 쓰기에도 역부족이었다.

레지던트 시절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혜주는 누구보다도 외로웠지만

진규를 떠올리지는 않았었다.



하루 두어 시간도 채 못 자는 생활의 반복이었고,

혜주는 어머니의 죽음도 외로운 자신의 신세도 위로할 새 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쳐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고의 의사가 되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그리고 진규의 아버지를 앗아간 그 병마를 정복하고 말리라. 혜주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과장의 뜬금없는 부름에도 군말 없이 이렇게 지친 몸을 병원으로 옮기는 혜주에게는

나름대로의 그러한 계산이 있었다. 당분간은 과장의 뒤를 열심히 쫓으면

폐암연구소 쪽으로 길을 뚫을 수 있을 법도 했다.



혜주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외과의로서의 명성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의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도로는 새벽이라 텅텅 비어있었고,



무심히 가속기 폐달에 발을 얹어놓은 혜주는 금방 병원 정문에 도착했다.

차단기는 내려져 있었고, 수위 아저씨는 유리로 된 칸막이 안에 앉아있었다.

병원의 밤풍경에는 그다지 급박한 상황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혜주는 운전석 창문을 열고 수위 아저씨에게 얼굴을 내보였다.

평소 같으면 말없이 차단기를 올려주었어야 할

수위 아저씨가 어쩐지 차단기를 올리지 않고 칸막이 밖으로 걸어나왔다.


"아저씨. 저예요. 차단기 좀 올려주세요."


혜주의 말을 듣고도 아저씨는 그대로 차단기 밖으로

걸어나오더니 저쪽 건너편 어딘가로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손짓하는 곳을 보니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사내가 혜주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김혜주씨 되시죠?" 사내 한 명이 혜주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누구시죠?"


혜주는 약간 의아해하며 물었다. 사내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였다.


"기관에서 나왔습니다. 최태식 과장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과장의 지시로 나왔다면 정말일 것이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혜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혜주를 병원으로 부른 과장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할 테니까.


"내려서 저희 차로 가시지요."


"어딜요?"


"여기서 말씀드리기가 약간 곤란합니다. 가셔서 이야기하시죠."


혜주는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차는 키를 꽂아둔 채로 수위 아저씨에게 맡겼다.

수위 아저씨는 혜주의 차를 주차시키기 위해 차단기를 올렸다. 헤주는 슬쩍 수위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 사람들 누구예요?"


"몰라, 나도. 그냥 오더니 혜주 선생 기다린다고 오면 이야기 해 달라고 하더라구.

내가 이 시간에 혜주 선생이 여기 왜 오냐고 하니까, 그냥 올 꺼라고 하더라고."


혜주는 그들을 따라 약간 걸어갔다. 그 곳에는 검은 고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사내 중 한 명은 운전석에 타고 혜주와 나머지 한 명은 뒷좌석에 탔다.

어쩐지 연행되어가는 피의자가 된 기분이었다.


차가 한참을 달렸다. 밤이라 밖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혜주는 어쩐지 위압적인 차 안 분위기에 눌려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인지 묻지를 못했다.


한 시간이나 달렸을까. 혜주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


"지금 도대체 어딜 가고 있는 거예요? 좀 알고가고 싶네요."


"사실 저희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저희도 지시 받은 대로 김혜주씨를 모셔가는 것뿐입니다.

일단 가시면 모든 설명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안 들으니 못한 대답이었다. 혜주는 여전히 창 밖을 기웃거리며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짐작을 해보려고 했으나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속력을 줄이고, 앞에는 겹겹히 바리케이트가 쳐진 모습이 나타났다.





게다가 바리케이트 앞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줄줄이 서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혜주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을 든 군인 한 명이 차 앞을 가로막고는 운전석 옆으로 다가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짙게 썬팅된 창문을 열자 군인은 황급히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는 차를 통과시켰다.


차를 겹겹히 둘러쳐 진 바리케이트를 꾸불꾸불 피해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지나가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한 채가 보였다. 그리고 주위로는 수풀이 울창했다.



뭔가 은밀한 시설임이 분명했다. 도로가 비탈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산 중턱 쯤 되는 것 같았고,

숲이 우거진 한 가운데 있는 이런 시설은 분명히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는 군사시설이 틀림없었다.

과장이 이런 류의 기관과도 친하다는 사실에 혜주는 속으로 두려운 섞인 찬탄을 터뜨렸다.


건물 현관에는 군복을 입은 중사 한 명이 마중을 나와있었다.

혜주가 탄 차가 현관 앞에 서고 혜주와 두 사내가 내렸다.

두 사내가 중사를 향해 경례를 붙이는 걸로 보아서 두 사내도 군인인 듯 했다.

중사는 군인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혜주를 맞았다.


"김혜주씨, 어서 오십시오."


"네. 여기가 어딘지?"


"일단 들어가시죠. 최태식 과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혜주는 중사를 따라 기나긴 복도를 걸어들어갔다.






출처 무늬만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