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앞에는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령과 일행은 승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부사관 한 명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승합차는 다시 꼬불꼬불 바리케이트 사이를 뚫고 도로로 빠져나갔다.


혜주를 비롯한 네 명은 말이 없었다.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마도 혜주의 머릿속과 별반 다르진 않을 것이었다.





과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하고 있는 일인가?

여기서라도 그만 빠지겠다고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라도 감염이 되어 죽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 길이 이승을 달리는 마지막 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사태의 원만한 수습 뒤에 주어질 엄청난 보상에 대한 기대들로 가득할 것이었다.



부검팀장이라면 경찰 고위 간부직으로 승진할 수도 있을 것이요,

보건부 관리는 좀더 편한 부서의 장으로 승진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혜주 역시 보건부의 폐암연구소에 평생 연구직을 보장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장은? 과장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선뜻 이 일에 자원한 것일까?

혜주는 궁금증이 일었다.



과장 정도라면 이제 더 이상 뭔가를 얻기 위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아도

충분한 정도의 명성과 지위를 가지지 않았는가?



혜주는 과장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아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는 몇 안되는 진짜 의사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 나라에서 그런 희생 정신에 불타는 의사가 저토록 높은 지위까지 오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혜주는 언젠가 허준의 이야기를 읽은 생각이 났다.

혜주의 고향 밀양에 있는 얼음골에서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해부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정사에 따르면 사실은 아니라고 하지만,



암을 연구하는 데 자신의 몸을 제자에게 맡겼다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

그리고 스승을 해부한 제자 허준. 그런 의사들이 요즘 세상에도 있을까.





어릴 적 진규와 함께 의사의 꿈을 키우던 시절,

둘은 허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읽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우리도 커서 꼭 암을 고치자고. 그 때는 그런 순수한 열망만으로도 학문적인 성공뿐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생각해보면 천진난만했다고도 할 만 했다.

사회적으로 기반이 닦여있지 않으면 연구를 할 여유도 찾을 수 없는 게 혜주가 경험한 현실이었다.


혜주는 차를 타고 가면서 조금은 자 두려고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도무지 잠이 오지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과장은 무슨 생각을 골몰히 하는지 팔짱을 낀 채 내내 말이 없었다.



부검팀장은 몇 번이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어디로 가는 중인지 가늠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밖에 어둠이 짙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는 습관적으로 창밖을 보았다.

아무래도 경찰 출신이라 경계심이 많은 듯 했다.

보건부 관리는 코트에 손을 찌르고 고개를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로 꼼짝하지 않았다.

눈이 작아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상체가 꼿꼿한 걸로 봐서는 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역시 혜주처럼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소령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앉아있었다.

마치 나머지 넷을 감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혜주는 어쩐지 이 기묘한 정적을 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가는 길에 읽을 만한 보고서 같은 거라도 준비해오지 않으셨어요?"

소령을 향한 말이었다.

"아직 상황이 초기 단계라 아까 제가 브리핑 한 내용 이외에는 보고된 바가 거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뭐 죄송할 것까지."



혜주는 딱 잘라 말하는 소령의 말투가 어쩐지 미덥지가 못했다.

어쩌면 막무가내로 일에 끌려들어올 때 자신을 데려왔던 두 사내 역시 군대식 말투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군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다들 각자가 맡은 부분에 관한 정보밖에 알지 못하므로 자연적으로 자신의 업무가 아닌 부분은 감추어지는 것이었다.





오르막을 한참 꼬불꼬불 올라가던 차가 비포장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눈을 붙이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혜주였지만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수시로 엉덩이가 의자에서 들썩거렸다. 승합차로 이런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을 올라가다니.


앞 유리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듯 했다.


'이제 도착한 걸까?'


혜주는 오른손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어둠 속으로 아까 본 것같이 생긴 노란 바리케이트가 보이는 듯 했다.



차가 속력을 줄이며 다가가자 바리케이트 앞에는 초병이 총을 들고 서 있고,

'정지'라는 램프가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차가 바리케이트 앞에 서자 램프는

'라이트 꺼'라고 바뀌었다. 승합차의 라이트가 꺼지자 형광조끼를 입은 초병의 모습이 선연히 드러났다.


초병은 뚜벅뚜벅 차 쪽으로 걸어왔다. 운전석에 있던 부사관은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충성!"


초병은 부사관을 보자 먼저 경례를 붙였다. 영화에서처럼 총을 겨누고 암호를 교환하는 모습은 없었다.



혜주는 초병이 혼자 뿐인데 저 거대한 바리케이트를 어떻게 치우고 차가 들어가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혜주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지만, 함께 내려서

바리케이트 치우는 일을 도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소령이 승합차의 옆문을 열었다.


"내려서 차를 갈아타시죠."


'아, 차를 갈아타는 구나.' 혜주는 자신이 잠시지만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이 산길을 승합차를 타고 계속 들어간다는 발상도 웃긴 것이었다.


네 명은 별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보안을 위해 휴대폰과 같은 외부와의 연락 수단을 압수하겠습니다."





초병은 군인다운 말투로 말했다.

소령이 내내 넷을 감시한 것도 혹시 외부로 전화를 할까봐서 그랬건 것이었을까?


"이해해 주시죠. 여기부터는 작전지역입니다."


넷 중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지만 소령은 그렇게 거들었다.

과장과 혜주 일행은 군말 없이 핸드폰을 꺼내 끄고는 초병에게 주었다.

초병은 바지에 달린 건빵주머니에서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를 꺼내 넷의 휴대폰은 담았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죄송하지만 확인을 위해 몸수색을 하겠습니다. 양팔을 들어올려 주십시오."


초병은 다시 한 번 넷에게 말했다. 혜주 일행은 멋쩍은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해해 주십시오." 소령이 다시 한 번 거들었다.


혜주는 자신이 여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은 불쾌해졌다.

과장과 부검팀장, 그리고 보건부 관리의 순으로 몸수색을 마친 초병이

혜주의 앞에서는 약간을 망설인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었다.

초병은 혜주가 불쾌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수색을 마쳤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병은 딱딱하게 자신의 임무를 마쳤음을 보고했다.


소령은 몸수색을 끝낸 네 명을 이끌고 바리케이트를 옆으로 돌아서 지났다.

그러자 약간 멀리의 어둠 속에 군용 지프차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넷은 습기 찬 산 특유의 밤공기를 뚫고 지프 쪽으로 갔다.

지프에는 따로 운전병이 있는지 승합차를 운전해 온 부사관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승합차를 다시 왔던 곳으로 운전해 갈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다.

지프차는 6인승이었다. 얼룩덜룩한 위장무늬가 칠해지긴 했지만

시중에서 판매되는 국산 지프차 그대로였다. 과장을 비롯한 혜주 일행은 모두 뒤쪽으로 탔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소령은 타지 않고 말했다. 다들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소령도 당연히 함께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령도 함께 가시는 것 아니었소?" 과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여기부터는 '붉은손 하나'의 지휘를 받으실 겁니다.



그럼 무사히 일을 끝마치시기를 빌겠습니다."



소령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문을 닫아버렸다.

혜주는 어이없다는 생각과 함께 군인은 다 거짓말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소령과 짜기라도 한 듯 운전석에 앉아있던 상병의 계급장을 단 병사는 차를 출발시켰다.

이별의 말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는 소령의 모습이 뒷문 너머로 보였다.

그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차를 향해 경례를 붙이고 있었다.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군인이 탄 것도 아닌데 그는 도대체 무엇을 향해 경례를 한 것일까?





출처 무늬만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