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에 관해서 전문가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부검팀장도 간단한 의학지식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법의학가였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고시에 낙방한 후 과학수사연구소에 특채로 들어가서,
거의 불모에 가까웠던 우리 나라의 과학수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검의가 되기는 했지만, 이제와서 진료를 하기에는 그 쪽 길로 너무 굳어져 버렸다.
아랫마을의 조그마한 마을 회관에 진료실을 마련했다.
진료실이라고 해 봤자 혜주와 과장이 앉을 책상 두 개와 온도계, 청진기, 혈압 측정기 따위의 간단한 의료기구가 전부였다.
혜주와 과장이 조금 간격을 두고 책상을 놓고 앉고, 마을 사람들은 두 줄로 서서 모두 진료를 받았다.
마을 사람들을 모두 강제로 진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들은 아직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군인들이 와서 무료 검진을 받으라고 하는 통에 귀찮은 몸을 일으켜서 이곳 마을 회관까지 나온 것이었다.
혜주는 이미 대여섯 명을 진료해 보았지만 다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순박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건강하게만 보였다.
"다음 분."
파마머리를 한 아주머니 다음으로 혜주의 앞에 앉은 이는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윗도리 좀 올려보시겠어요?"
할아버지는 바지에서 윗도리를 뽑아 가슴께까지 걷어올렸다. 혜주는 할아버지의 가슴에 청진기를 들이댔다.
별 이상한 징후는 느껴지지 않았다.
혜주는 청진기를 떼며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신 데 없어요?"
"아픈데? 없어."
"숨이 가쁘다거나 그런 거 없구요?"
"없어. 우리야 늘 산길 다니는 사람들인데 숨쉬는 게 불편하면 어찌 사누? 아무 이상도 없어.
우리 가족들도 다 아무 이상도 없어.
윗집 박씨하고 저 아래 나주댁이 죽고 이리 군인들이 들어와 자꾸 사람들을 소집하는디,
여기 아픈 사람 아무도 없어. 물 좋고 공기 좋은데 사는 사람들 아픈 데가 어디 있갔어?"
"네, 그렇게 보이네요. 할아버지 어디 아프시면 바로 말씀 하셔야 해요. 아셨죠?"
"아 그럼."
할아버지는 윗도리는 추스리고는 일어났다.
그 때였다. 잠시 전 혜주에게서 진료를 받고 누구를 기다리는지 저 뒤에 서있던 아주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혜주가 아주머니를 불렀지만, 아주머니는 얼굴이 파래지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혜주와 과장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아주머니 쪽으로 달려갔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정신차리세요!"
과장이 쓰러진 아주머니를 붙잡고 뺨을 때렸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눈을 까뒤집고 이미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쓰러진 아주머니 주위로 몰려들었다.
"위생병!"
혜주가 목청이 터져라 밖에 있는 군인들을 불렀다. 뭔가 응급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쿵쿵쿵.
달려오는 군인들의 군화소리가 문 쪽에서 들렸다.
군인 두 명이 들어오더니 모여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혜주와 과장이 아주머니 주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군인 한 명이 소리쳤다.
"여기 봉쇄해!"
그리고는 무전기를 들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화생방 요원들 투입해! 그리고 나머지는 전원 소독처리 후 철수!"
"응급조치가 필요해요! 구급차까지 옮겨야 해요!"
혜주가 군인을 보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군인들은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봐요! 사람이 죽어간다구요!"
혜주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답 대신 갑자기 화생방 복장을 한 군인이 호스를 들고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마을 회관 안으로 흰 소독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제각각 비명을 지르며 출구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혜주와 과장 쪽으로 달려오다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뭐하는 짓이야! 앞이 보여야 치료를 하지!"
과장이 고함을 질렀지만 사람들의 괴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출구 쪽에서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오지마! 모두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말라구!"
군인들이 입구를 봉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기에 바빴다.
그리고 입구가 막히자 온통 하얀 공간 속에서 서로 밀리고 밀치는 모양이었다.
"경고한다! 나오는 자는 사살하겠다!"
탕!
군인의 경고 후 한차례 공포가 발사되었다.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나오는 자는 사살하겠다! 이 곳은 작전구역이다!"
조용해진 마을 사람들 위로 군인의 섬뜩한 경고가 울려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연기가 걷혔다. 과장의 무릎 아래 누워있는 아주머니는 이미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다
. 혜주과 과장은 망연한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손 써 볼 시간도 없이 차갑게 죽어버린 것이었다.
혜주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건, 이건 아냐. 죽어 가는 환자를 살려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혜주는 낮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과장 역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냐. 이건 아냐."
화생방 두 명이 들것을 들고 혜주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둘이서 들것에 아주머니를 실었다.
혜주는 화생방 중 한 명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럴 순 없어요. 당신들은 사람을 죽였어."
"어쩔 수 없습니다. 발병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구역을 봉쇄하고 소독 및 사체 수습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혜주는 대꾸한 힘조차 없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너무나 피곤했다. 깊은 잠을 자버리고만 싶었다.
혜주는 갑자기 지난 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엔지니어. 자신은 인간이라는 기계를 만지는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그런 혜주에게 인간의 생명이 이토록 소중히 여겨진 적은 없었다.
의과대학에 들어가고 의사가 되면서 습관처럼 죽어 가는 환자와 그들이 흘리는 피를 보면서,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일일뿐이라고 치부했던 그녀였다.
혜주는 부끄러움이 몰려옴을 느꼈다. 혜주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화생방은 아주머니의 시신을 그대로 들것에 실어서 나가버렸다.
주민들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혜주와 과장, 그리고 군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혜주와 과장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입구 쪽으로 사람들을 밀치고 나아갔다.
입구에서는 군인 여럿이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었다. 혜주과 과장은 주민들을 뒤로하고 입구를 빠져 나왔다.
혜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순
박한 산골 사람들의 잔뜩 겁을 집어먹은 눈망울이 혜주와 과장을 공포와 부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혜주는 옆에 서 있던 군인에게 물었다.
"모두 보균자로 처리됩니다. 그리고 여기 이 곳에 격리될 겁니다."
혜주는 미안함에 몸이 떨렸다.
아주머니가 그렇게 죽은 것도, 여기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격리된 것도
모두 자신이 무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만 같았다.
과장도 혜주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주민들 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출처 무늬만토끼
원칙돋네
10편과 11편이 안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