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다섯 시간도 되지 않는 수면시간이었지만 혜주는 피로가 많이 풀린 상태였다.
처음으로 강원도 산 속의 아침 공기가 상쾌함을 느꼈다.
혜주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서울 도심의 탁한 공기와는 다른 신선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면 이 공기 속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시무시한 병원균이 떠다닐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혜주는 약간 섬뜩해짐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이 공기를 마시고 죽게 된다면……. 까짓 것, 죽는 거지.'
혜주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러고 나니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이런 게 대대장이 말한 '두려움을 즐기는 것'일까?
혜주는 자신이 과장의 발치만큼이라도 따라가는 인간이 되어 가는 듯 해서 기분이 좋았다.
막사 안에 들어서자 대대장이 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건부 관리와 부검팀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2인분의 식사만이 놓여있었다.
혜주는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러나 일단은 태연히 의자에 앉았다.
"잘 주무셨소?" 대대장이 먼저 혜주에게 말을 건넸다.
"네. 대대장님도 물론 잘 주무셨겠죠? 그런데 왜 2인분뿐이죠?"
"그야 뻔하잖소." 대대장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간밤에 두 분 다 돌아가셨단 말인가요?"
혜주는 가슴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절망감을 삭이며 물었다.
이렇게 혼자가 되다니.
"돌아갔다?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돌아갔다고 봐야겠지.
그 보건부에서 나왔다는 작자는 새벽에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그렇다면?"
"그 부검 전문가라는 작자는 아침에 작전지역에서 철수하기로 했소. 스스로 격리 수용되는 편을 선택했지.
그 인간 간덩이가 콩 알만 하더군.
내가 이제 와서 그럴 순 없다고 하니까 눈물을 흘리며 사정 사정을 하더군.
그래서 할 수 없이 작전 지역 외곽 쪽에 있는 영창에 격리 수용하기로 했지."
혜주는 배신감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지난밤에 혜주에게 했던 말은 뭐란 말인가?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뻔뻔스러운 수가 있을까?
"개♡♡."
혜주는 저도 모르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욕을 내뱉았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을 했지만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부검팀장이 눈앞에 있었다면 더 심한 욕도 퍼부어 줄 자신이 있었다.
"하하. 젊은 아가씨가 생각보다 입이 험하구만." 대대장이 웃으며 혜주에게 말했다.
"자연스레 욕이 나오네요."
"일단 식사나 합시다."
혜주와 대대장은 수저를 들었다.
"아 참. 아랫마을에서 간밤에 다섯이나 더 죽었소.
윗마을에서도 처음으로 사망자가 나왔고. 일이 커지고 있어.
얼른 예방약이나 치료약을 개발하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계엄상태에 들어갈 판이오."
대대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혜주는 쌓인 말을 해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죄송한 말이지만 중령님 식으로 계속 하다가는 결코 원인을 찾을 수 없어요.
더 자세한 부검과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해요."
대대장은 몹시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거요? 이봐 아가씨.
내가 내린 즉각 소각 명령과 수시 소독 명령이 없었으면 우리 부대 사병들은 벌써 전원 사망이오.
물론 나도 아가씨도 벌써 죽었겠지."
"어쨌든 오늘 화상 회의에서 전 제 의견을 말할 겁니다. 이젠 제가 팀장이니까요."
혜주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소용없을 거요. 설사 내 방식이 틀렸다 한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이 일을 떠맡겠소.
저기 서울에 앉아있는 작자들은 아가씨보다도 간이 작은 자들이오.
전염병이 전국으로 확산되면 아마 죄다들 외국으로 도망쳐버릴걸."
대대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혜주는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판이었다.
어쩌면 혜주는 자신이 이 수렁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죽는 날에나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혜주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대장을 굴복시킬 수 없다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중령님께서 허락을 해 주세요."
"그럴 수 없소. 왜냐면 내가 하고 있는 조치가 가장 최선이니까."
"어떻게 그걸 확신하시죠?"
혜주는 자신이 대대장을 설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경험으로 알 수 있지. 내가 월남에 있을 때 부대에 알 수 없는 괴질이 돌아서 하루에 두 세 명씩 죽어 자빠졌소.
내가 그때 중대장이었는데, 대대장 놈이 어쩔 줄을 몰라 하길래 내가 명령을 내렸지.
시체를 다 소각하고 발병의 낌새라도 보이는 놈은 모두 죽이라고.
내 손으로 내 부하 다섯 놈을 죽였소. 덕분에 오백명이 목숨을 건졌지."
대대장은 독기 어린 눈으로 말을 했다. 혜주는 그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대대장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혜주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말하는 대대장의 말투가 재수가 없었다.
"이건 그냥 괴질이 아니예요. 그리고 희생자는 군인이 아니구요.
사람 죽는 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대대장은 혜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분노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혜주는 지지않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는 것이다.
"내 부하도 50명이 죽었어. 너 같은 계집애가 눈앞에서 부하가 죽어 가는 심정을 알아!
사람이 죽어 자빠지는 데는 너보다 내가 더 가슴이 아파.
그렇지만 전장에서는 한 순간의 감상에 전체가 죽는 수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대대장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혜주는 그대로 대대장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할 말도 없었지만, 화가 잔뜩 난 지금의 대대장에게 무슨 말을 한 들 곧이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대대장은 스스로 화를 가라앉혔다. 그의 붉어진 뺨이 다시 원래의 색을 찾았다.
"미안하오. 내가 말이 심했어. 화가 났다면 용서하시오."
그러나 혜주는 그의 사과를 곱게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더 비꼬아 줄 작정이었다.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죠. 여기 지휘관은 중령님이니까요.
저 같은 게 화를 낼 수나 있나요."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작전에서 빠지시오.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줄 테니까.
혜주씨가 빠진다면 본부에서는 새로운 붉은손들을 파견할 테지."
대대장의 냉정한 말이었다. 혜주는 오기가 솟아올랐다.
"아뇨.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
혜주는 속으로 다짐했다. 난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그리고도 이틀이 지났다. 아랫마을 사람들의 반수가 죽었다.
그리고 윗마을에도 이미 사람들이 서너 명 더 죽어나갔다. 그러는 사이 혜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혜주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번갈아 다니며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지만 병의 징후는 찾을 수 없었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숨을 멈추고 죽어나갔으며 ,
혜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것이 그토록 공포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그러던 중 스스로 격리를 택했던 부검팀장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대장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 유쾌한 듯이 그 소식을 전했고,
혜주는 한편으론 속 후련함을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서글퍼졌다.
그리고 오늘 낮에는 지금껏 혜주를 이리저리 차로 이동시켜주던 상병이 점심을 먹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혜주는 이 곳 붉은방에 온 첫날 숙소로 향하던 산길에서 상병의 손을 잡고 올라갔던 일을 떠올렸다.
혜주는 그를 만난 것이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을뿐더러, 그와 변변히 말 한마디 나누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픔을 느꼈다.
혜주는 점점 지쳐만 갔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이제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을 진료하는 일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사망자가 혜주가 있는 근처에서 발생할 경우에는
혜주의 요청으로 부검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역시 성과는 없었다.
어쩌면 헤주는 자신이 어느 순간 그들처럼 죽어버리기를 바라고 있는 지도 몰랐다.
부검을 위해 붉은방으로 파견된 붉은손 네 명중 이미 혜주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망했다
. 대대장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과장된 용기로 매일 아침 혜주와 식사를 같이 하기는 했지만 내심 불안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사병들만 해도 혜주의 정체를 아는 몇몇은 혜주가 지나가기만 해도 슬슬 물러났다.
지금 이 곳 붉은방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혜주였다.
혜주 역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이쯤에서 혜주가 죽어주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야만 또 다른 붉은손들이 이 곳으로 들어올 테니까.
혜주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한다기보다는 죽음을 기다린다는 심정으로 이 곳에 머물러 있었다.
혜주는 오늘밤도 늦게까지 과장의 전자 현미경에 매달려 있었다.
이미 이러한 작업을 통해 사태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옅어진 상태였지만,
그러나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미 다섯 번째 부검을 통해 시신의 폐조직을 몰래 떼어와 슬라이드로 만든 상태였다.
하지만 늘 표본을 이물질에 노출되어 쉽게 부패해 버렸다.
이번 조직도 예외는 아니어서 벌써 곰팡이 같은 것이 들어앉아 버렸다.
"후."
혜주는 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가망이 보이질 않았다.
혜주는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쐬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지금 혜주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언제 죽는 것일까?'
만일 신이 누구나의 죽을 날짜를 정해놓았다면 혜주는 아직은 자신의 날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마도 곧 오겠지. 과장과 부검팀장, 보건부 관리.
먼저 간 그들보다 길어야 하루 이틀일 거라고 혜주는 생각했다.
'하지만 왜 하필 나만 이렇게 멀쩡한 걸까?'
그러나 혜주는 이러한 궁금증을 가졌다. 왜 하필 자신만이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는 걸까?
어째서 넷 중에서 혜주 자신이란 말인가? 신께서 잠시 실수를 하신 걸까?
이곳 붉은방에서 이루어지는 이 연쇄적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것이 병원균이든 독극물이든 그것에 가장 많이 노출된 사람은
과장 다음으로
혜주였다.
그런데 어째서 혜주는 아직 이렇게 멀쩡한 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과장 다음의 희생자는 혜주여야 마땅했다.
혜주는 쌀쌀한 기운에 창문을 다시 닫았다.
그러자 검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의 대부분을 밤잠을 자지 못한 혜주의 얼굴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죽게 된다면 다들 나의 마지막 얼굴을 이대로 기억하겠지?'
혜주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흉한 모습으로 기억되기가 싫어졌다.
혜주는 책상 한쪽에 놓여있는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우스꽝스럽게도 화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혜주는 가방을 뒤적였다. 이것저것이 온통 뒤섞여 있어 립스틱 하나도 제대로 찾기 힘들었다.
좌르르.
혜주는 짜증스럽다는 듯 가방을 바닥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이성을 잃어가는 자신이 싫었지만, 혜주는 이미 자기 자신을 통제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혜주는 엎드려서 주섬주섬 널부러진 물건들 사이에서 립스틱을 찾기 시작했다.
"아얏!"
혜주는 손바닥을 찌르는 뾰족한 것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혜주는 손바닥을 부여잡고 자신의 손을 찌른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병뚜껑이었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병뚜껑을 집어 올렸다.
冬蟲夏草(동충하초).
진규가 혜주에게 보낸 드링크제의 뚜껑이었다.
혜주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진규의 얼굴을 볼 수도 있었으리라.
진규와의 안타까운 인연이 다시 한번 혜주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혜주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떠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출처 무늬만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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