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건물 앞에 도착한 것은 거의 새벽 세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혜주와 진규는 비닐에 쌓인 아이의 시신을 연구실까지 들고 올라갔다.


아이의 시신에서 버섯의 성체를 채취한 진규는 자신이 개발한 약품으로 몇 번에 걸쳐 실험을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혜주에게 말했다.


"확실해. 내가 개발한 추출물이 균사를 파괴하고 있어.

이대로 가져가서 복용해도 이미 면역성을 키울 수 있어."







결국 혜주의 추측이 맞은 것이었다.

혜주가 붉은방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모두 진규가 준 드링크를 마시고 내성이 생긴 때문이었다.



진규는 또다시 연구실 한 쪽에 설치된 냉동보관실에서 조그마한 약병을 꺼냈다.


"이건 내가 동충하초에서 추출한 원액이야.

만일 발병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걸 폐동맥에 주사하면 살릴 수가 있을 거야."



혜주는 진규에게서 약병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진규야."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너야말로 그 곳으로 들어간 용기가 대단한 거지.



내 연구실에 있는 드링크 샘플이 한 300병정도 될 거야.

이거면 일단 급한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을까?"



"응."



"좋아. 그럼 이걸 가지고 어서 그 곳으로 가."



혜주는 아쉬웠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진규와 좀 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작전이 종료되는 대로 반드시 진규를 다시 찾아오리라 다짐했다.



"참, 진규야. 만일 이게 치료용으로 대량 생산되게 된다면 네 연구는 사업성을 잃게 될 거야.

곧 상품으로 출시될 예정일 텐데 아마 타격이 클 거야."



"상관없어. 어차피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혜주는 진규의 말이 더욱 고마웠다.



"약속할게. 정부에서 분명히 보상이 있을 거야. 내가 꼭 보상을 받아낼게.

금전적으로든지 아니면 국립 연구소에 평생 연구원 자리를 보장한다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어차피 난 지금 내 위치에서도 전혀 불편함 없으니까."



진규와 혜주는 샘플로 제작된 드링크제 300병을 대대장의 차에 실었다.

그리고 혜주는 운전석에 앉았다.





"일이 끝나는 대로 꼭 찾아올게."


"그래. 어서 가. 늦겠다."


"응."


혜주는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로 손을 흔드는 진규의 모습이 보였다. ..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두 친구의 10년만의 재회는 이런 식으로 멋없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혜주는 해안도로를 질주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동이 틀 것이었다.



어차피 치료약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므로 동이 터도 상관은 없다지만 될 수 있다면 대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작전지역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동쪽 하늘에서 여명이 비춰오기 시작했다.

혜주는 비밀통로로 다시 들어가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혜주는 핸들을 틀어 처음 붉은방으로 들어갔던 그 길로 차를 몰아갔다.


바리케이트가 쳐진 그 곳에는 초병이 지키고 있었다.



초병은 대대장의 차번호를 알아보는 듯 움찔했지만 이내 대대장이 차를 타고 들어올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총을 두 손으로 잡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혜주는 바리케이트 앞에서 차를 세웠다.

초병은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다가오더니 차에 탄 사람이 혜주라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어떻게."


"놀랄 것 없어요. 일단 바리케이트부터 치워줘요. 들어가야 하니까."


"일단 상부에 보고하고……."



초병은 너무 몰란 나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머뭇 거렸다.


"중령님도 이미 알고 계세요. 걱정 마요."


혜주는 뒷좌석에 놓여있는 드링크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창 밖으로 내밀었다.


"자 받아요."


"뭡니까?"


"치료약이에요. 우리 모두를 살려줄. 이걸 구하러 갔던 거예요."


초병을 머뭇거리며 병을 받아들었다.


"살고 싶으면 얼른 마시는 게 좋을 거예요."



초병은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병을 들고는 무전으로 뭐라고 뭐라고 연락을 취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날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초병은 마침내 무전을 다 듣고 나더니 들고 있는 병을 따서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차 앞에 놓인 바리케이트를 힘겹게 옮겨 치웠다.



혜주는 차를 그대로 운전해서 붉은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모두를 살릴 수 있다.'





죽음의 마을이 된 붉은방에도 희망의 햇살이 비추이는 순간이었다.
















혜주가 붉은방에서 철수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산골마을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붉은방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일들은 비밀 속으로 묻혀져 갔다.



과장을 비롯한 모든 희생자들은 잘 조작된 사고로 위장되어 가족들에게 사망소식이 전해졌고,

혜주는 과장의 영결식에도 참가를 했다.


혜주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병원에서의 생활은 전과 다름없었다.



다만 한가지 달라진 점은 수시로 정부측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한다는 것 뿐.



오늘은 국무총리와 점심 약속이 되어있었다. 다섯 붉은손들 중

살아남은 대대장과 혜주가 함께 참석하기로 되어있었다. 아마도 보상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갈 것 같았다.


총리의 집무실에 도착한 것은 한 10분 정도 약속시간에 늦었을 때였다.

혜주는 비서의 안내를 따라 총리실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총리와 대대장이 먼저 와서 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탁자에 앉아 둘은 유쾌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대장 역시 국무총리와 맞대면을 할 정도로 거물급 인사 취급을 받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혜주는 사과의 말을 앞세워 문으로 들어섰다.


"아, 뭐 이쯤이야. 오기만 하면 된 거지."


대대장이 유쾌하게 대답하면서 혜주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김혜주씨." 총리 역시 혜주를 웃는 얼굴로 반겼다.


"일단 앉아요."


혜주는 빈 의자에 앉았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오늘 두 분과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은 보상 문제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중령과는 향후 5년 이내에 소장으로 진급을 하는 것으로 이미 합의를 보았소이다.

이제 혜주씨만 남았는데. 혜주씨는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소?"



"글쎄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바는 없어서."



"그래요? 일단 정부 쪽에서는 최태식 과장님이 맡고 계시던 국립보건원 연구이사 자리를 제안하고 싶은데요."



혜주는 총리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혜주에게는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과장이 혜주에게 주려고 했던 바로 그 기회.



혜주는 그것이 필요했다.





"네. 멋진 제안이네요. 하지만 전 그런 시시콜콜한 것보다는

과장님이 실제로 맡으시고 계시던 일을 이어 받고 싶은데요."



"실제로 맡았던 일이라?"





총리는 짐짓 혜주를 떠보았다. 혜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최태식 중령님이라고 해야겠군요."



총리의 얼굴에 놀라움이 비쳤다.

설마 혜주가 과장의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었다.



옆에 앉아있는 대대장의 얼굴에도 의아스런 놀라움이 서렸다.





"과장이 군인이었단 말이요?" 대대장이 총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 이 참. 이런 자리에서 말하기가 곤란한 문제군요."

총리는 대대장의 눈치를 살피며 얼버무렸다.



"일단 나가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그러죠."


셋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출처 무늬만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