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랜 벗인 정훈이는 그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안경을 고쳐썼다.
"왜..?"
나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두손을 가볍게 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불면증이야.."
정훈이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더니 결국 처방전을 꺼내 무엇인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아냐, 아냐.. 처방전 없이.. 그냥 줄 순 없을까?"
처방전이 남게 되면 일이 곤란해진다.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정훈이를 나도 똑바로 쳐다보며 싱긋이 웃어주었다.
"아..환자 취급 받긴 싫거든.. 그렇지 않아도 내 마누라가 날 환자 취급하고 있는데.. 자네에게 처방을 받은걸 알면 아마 날 병원에 입원시키려 들걸."
그때 마침 정훈이를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작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고 다음환자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정훈이는 별다른 말없이 나에게 수면제 한봉지를 내밀었다. '하루에 두알만 먹어야 한다'는 주의와 함께.
오늘은 비가 오는 밤이다. 아마 아내는 오늘도 밤외출을 할것이다.
사실 내가 불면증에 걸린 이유는 바로 그런 아내때문이다.
아내는 부슬부슬 비가오는 밤마다..검은 비닐점퍼를 꺼내입고 살금살금 현관문 밖으로 나가곤 했다.
아내를 미행해 보려 한적도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녀는 마치 날렵한 검은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나를 따돌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참다못해 그녀에게 왜 몰래 집을 빠져나가냐며 화를 내며 따져보기는 했?지만..그녀는 고개를 뻣뻣이 치켜든 채 한마디로 잘라 결론을 낼 뿐이었다.
"그건 다 당신이 만들어낸 환상이예요! 오, 여보, 차라리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요즘에 당신이 불면증에 너무 시달리다 보니 그런 환상을 본 걸거에요."
억울했다. 나는 환자가 아니다.
그러나 아내이외의 다른 사람들 모두도 나를 '불면증'이라고 평하는 것을 보면 그거 하나만은 확실한 것 같다. 사실 그것은 내 아내 탓이지만.
머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고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사실 잠을 제대로 잘수 없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도움이 될 뿐이었지만, 이 참기 힘든 두통은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현관문을 키로 돌려 열고 곧장 부엌으로 걸어갔다.
커피메이커가 진한 헤즐넛향을 풍기며 검은 액체를 한두방울씩 뽑아내고 있었다.
아내는 불면증을 더욱 심하게 만들 뿐이라며 내가 커피 마시는 것을 질색했지만 나는 내 혀와 코를 동시에 즐겁게 해주는 커피를 포기할수가 없다.
아내와 세트로 쓰고 있는 부부 커피잔을 꺼내 커피를 따라낸 다음 안방으로 들고 갔다. 아내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손톱을 물어 뜯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싫어 나는 불쑥 티브이를 켰다.
"은호는?"
올해 고3인 아들은호 얼굴을 제대로 본지도 며칠 된 것 같다. 사실 나는 가끔 신경질을 억누르지 못하고 집안 물건을 때려 부수곤 했다. 아내는 마치 어린양을 백정손에서 빼돌리는 듯한 눈길로 나에게 은호를 독서실에 다니게 하자고 했었다.
고3은 신경이 날카롭다나..
"오늘은.. 독서실에서 잘 거예요."
"나.. 노력하고 있으니까.. 앞으론... 잘할꼐.."
아내는 놀란 눈길로 힘없이 중얼거리는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더니 엷은 주홍빛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로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여보..고마워요.. 사실 나 좀 힘들었었어요.."
나는 괜히 멋적은 심정이 들어 티브이의 볼륨을 올리며 아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아나운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건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또 한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7일전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김모양의 시신이 오늘 김양의 집 근처 하수도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시신의 일부가 없어진 것으로 보아 경찰은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고..."
사실 나는 정신병자라는 단어가 매우 싫다. 불면증이 계속되면 안된다고 치료를 받아보라 했던 아내의 말에 그토록 분개한것도 그 단어..'정신병자' 때문이다.
어두운 방에 갇혀 울부짖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우리 아버지를 보고도 다들 그렇게 불렀었다.
치료.. 정신병...
정신병도 유전된다고 말하던 정훈이 녀석이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턱을 한대 올려친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주먹을 쥐어보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는 결코 정신병이 아니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안 하는 '정상인'으로 살 것이라고.
아내는 내 손에서 하얀 바탕에 장미 무늬가 그려진 커피잔을 받아들고 웃음을 지었다. 안방은 금세 향긋한 헤즐넛 향기로 꽉 차있었다.
"여보..그리고 뜨거운 물로 샤워하면 잠이 더 잘온대요."
아내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며 새로 사왔다는 허브향 입욕제를 건네 주었다.
그러나 나의 불면증은 확실히 중증인가 보다. 아내가 모처럼 사온 입욕제까지 썼는데도 불구하고...옆에서 새근새근잠들어 있는 아내의 숨소리를 뚜렷하게 들으며 천장만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낮에 정훈이에게 받은 수면제 30알을 정성껏 가루로 만들어 아내의 커피에 타놓았으니..
아마 그녀는 일어날수 없을 것이다.
밖에선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오늘밤은 아내도 밖으로 나갈수가 없다.
아니, 밖으로는 나갈수 있지.. 다만 그게 자신의 의사가 아닐테지만.
나는 아내의 겨드랑이에 두손을 집어넣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나 제법 키가 큰 아내의 두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린다.
아내를 거실의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내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 정신병자!!-
아까부터 머리속에서 뱅뱅 돌고 있는 말 한마디가 끈질기게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난 정신병자가 아니다! 내 아버지는 그랬지만. 바람난 아내를 응징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정상인'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사실 아닌가
게다가 나는 아내를 죽임으로 해서 불면증에서 벗어날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내를 베란다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