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세상사의 많은 것을 깨우친듯 했다. 세수를 할때나 자려고 누웠을때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
맹렬히 거부해 보지만 성숙한 이성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매몰차게 말해주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나한테 오겠지. 가만히 상상을 해본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밤 골목길..쥐새끼 하나 없는 그곳을 우연찮게 걷고 있다. 괜스레 무서운 생각이 들어 잰걸음을 재촉한다.
한번 자라난 생각은 기하급수적으로 거대해져서 종국에는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인다.
온갖 끔찍한 상상들이 한꺼번에 떠오르자 참지 못하고 뛰기 시작한다. 저만치 앞에 검은 형체가 서있다.
놀라서 심장이 멎는듯 하다. 자세히 보니 쓰레기봉지다.
아..깊은 안도감에 온몸이 축 늘어진다. 스스로가 바보같이 꿀밤을 한대 때린다.
무심코 옆을 보자 색동한 복의 귀신이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맙소사 색동한복이라니.. 다시 미친듯이 뛴다.
한참을 뛰다가 트럭에 달린 대형 반사경을 본다.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며 그것이 달라붙고 있었다.
"우아악"
또다시 미친듯 달린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추면 안된다. 저만치 모퉁이가 보인다. 저기로 숨어야겠다.
그곳으로 달려간다. 이럴수가..아찔한 상실감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곳은 시멘트 벽으로 막혀 있었다.
눈을 힘껏 감고 그 위를 손바닥으로 한번더 가린다. 귀신이 코앞에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결코 나를만지지는 않는다.
언제까지나 서서 나를 지켜볼것이다. 언제까지나...
초등학교시절의 마지막 방학식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못보던 신발들이 보인다. 아버지가 낯선 사람들과 무언가를 의논중이다.
거실로 들어서자 그들이 나를 바라본다. 아저씨둘과 아줌마 한명. 개량한복을 입은 그들은 저녁까지 먹은 다음에야 일어섰다.
며칠후 그들이 다시 왔을땐 무척 요란스런 복장이었다. 온 집안에 새끼줄을 치고 거기다가 부적을 매달았다.
집안 구석구석 가져온 부적을 모두 매달자 이번엔 상을 차리기 시작한다. 커다란 상위에 온갖 과일들이 올라온다.
마지막으로 돼지머리가 올라오자 상차리기가 끝났다. 여자가 방울을들고 널뛰기를 시작한다.
알아듣지 못할 괴상한 노래와 함께 온 집안을 뛰어 다닌다. 두명의 남자는 각각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두꺼운 책을 펼쳐든다.
상바로 앞에서 아버지가 절을 하기 시작한다. 연신 절을 해대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서글퍼졌다.
짙은 향냄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굴레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는 아버지가 불쌍해서였을까,
아무튼 내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 언젠가 조상 한 분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정해진 운명이지만 순순히 항복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낮부터 시작된 굿판은 자정까지 이어졌다. 나는 자지 않고 굿판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새벽 두시가 되자 껌뻑 졸던 내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촛불들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것 중 몇개는 실제로 꺼져버렸다.
무척 생소한 느낌. 거대한 무언가가 집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다.
굿이 효과가 있는 것인가. 우두커니 서있던 그것이 조금씩 움직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한다.
'헉'
끔찍한 두통에 소리를 지를뻔 했다. 뭔가가 서서히 옭죄여 오고 있었다.
원망과 저주..피끓는 감정들이 회오리 치듯 사방천지로 몰아친다. 때맞춰 그것이 점점 빨리 움직인다.
절름발이 병신처럼 뒤뚱거리며 아버지 주위를 빠르게 빙빙 돈다. 아버지의 안색이 시퍼렇다. 곧 죽을것 처럼 위험해 보인다.
지켜보기만 하는 나도 이럴진대 당사자인 아버지는 어땠을까. 빙빙돌던 그것이 갑자기 지랄발광을 해댄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기괴한 동작을 짓는다. 시퍼런 한. 뿌리깊은 원혼들의 한이 일제히 몰려든다.
세사람도 굿을 멈추고 벌벌 떨고 있다. 그들도 처음 경험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이만한 원한이 쌓일 수 있을까.
그들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대를 이어올때마다 한이 쌓이고 쌓였다.
남김없이 갈무리된 그것은 깊이를 짐작키 어려울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아버지가 꺽꺽 넘어간다.
아버지의 전신을 그것이 미친듯이 어루만진다. 그러던 한순간, 그것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곤 서서히 얼굴을 아버지에게 가져간다.
'안돼'
아버지가 보았다던 할아버지의 최후가 떠올랐다.
"스윽"
그것이 손을 뻗어 이마로 가져간다. 죽을 것 같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다. 그 옛날에 아버지는 기절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모든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천천히 머리카락을 치운다.
양쪽으로 머리카락이 갈라진다. 일순간 머리카락이 확 제쳐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니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끝이었지만 내게는 시작인 셈이다.
아버지는 예상과는 달리 제법 평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두었다. 죽는 것이 차라리 편했던 것일까.
죽어서야 비로소 벗어났다고 기뻐했던 것일까. 사람들로 붐비는 장례식장에서 골똘히 생각해본다.
밝은 대낮에, 형광등까지 모조리 켜져 있고 수십명의 사람들까지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한쪽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아닌 나를 향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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