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었다. 석달전 선우가 병원에 교통사고로 실려왔고..
그날 이후 선우를 보아온 경화였다.
처음엔 측은하고 가엾은 마음에 그를 향해 해 맑은 미소를 보여줬었고..
그렇게 그와 조금씩 가까워지면서..이젠 그를 사랑하게 되버린것이다..
물론...그러면 안된다는것도 알고 있다......
선우에겐........평생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 가슴에 새겨져 있을테니까..
석달전......
교통사고로 실려온 남자와 여자...
여자는 병원으로 후송되는 중 목숨이 끊어졌고 남자는 혼수상태였다.
붉은 피로 뒤범벅이 된 남자와 여자..
가장 행복해야하는 순간에 그들은 최악의 슬픔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행복한 신혼부부에서.....
이미 목숨이 끊어진 여자의 하얀색 예복은 붉은 피로 짙게 물들어 있었고
검은색 양복의 남자는 의식을 잃고 생과 사의 중간지점에서 헤매고 있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던
도중..졸음운전을 한 덤프트럭과 충돌해버렸고..
사고는 크게 났다. 남자는 에어백과 안전벨트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있던 여자는 목숨을 잃고 만것이었다.
남자의 이름은...장선우...여자의 이름은 김지연...
경화는 남자의 담당을 맡았다.
사흘만에 의식을 찾은 남자는 미친듯 울부짖으며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당히 가슴 아프게 했다.
여자의 사망을 알려야 하는 경화로써도 마음이 착찹했다.
"김지연씨는...사고당일 병원으로 후송도중 사망했습니다..."
"아니야...아니야..그럴리가 없어....흑....지연아...지연아....흑흑..
옷때문에 불편해서 안전벨트를 안매겠다고 우겼을때....내가..끝까지..
안전벨트를 채워줬어야 했는데....흑...지연아..."
선우는 울부짖으며 자신의 팔에 꽂혀있는 닝게 주사바늘도 거칠게 뽑아
버렸다. 자신도 그 여자와 함께 가야한다며....
가까스로 선우에게 진정제를 놓았고 선우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뒤로 선우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항상 멍한듯한 모습이었다.
경화는 웬지 그런 선우가 마음에 걸렸고..좀더 밝은 미소를 보이며 선우에
게 신경을 썼다.
선우의 쾌유는 생각보다 빨랐지만...가슴에 입은 상처는 전혀 치료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지울수 없는...이름...
그들은 얼마나 행복에 젖어 있었을까....얼마나...사랑하고 있었을까...
미래에 대해 얘기하면서...앞으로 낳을 아기에 대해 얘기하면서...
경화의 노력을 알았는지 선우는 조금씩 경화에게 웃음을 보여주었고..
마음도 천천히 열어주었다.
눈매가 선한 선우에게 경화는 그렇게 빠져들고 만것이었다..
"...경화씨 왔어요..?"
선우는 어느순간부터 경화를 [의사선생님]이 아닌 [경화씨]라고 불렀다.
"네...몸은 좀 괜찮아요?"
"...그렇죠..뭐...언제쯤 퇴원할수 있는거죠?"
"글쎄..경과를 더 봐야하지만..허리와 다리 골절이 심하게 파손이 되어져
있는터라..한달이나 두달쯤은 더 병원에 있어야할것 같네요.."
선우는 말없이 웃음을 지었고 경화는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해 얼른
선우의 병실에서 나와야 했다.
"그럼..전 이만 가볼게요..편히 쉬세요.."
돌아서 병실문을 나가려할때였다.
"....고마워요....항상 신경써줘서.."
나지막히 들리는 선우의 말에 경화는 눈물을 쏟을것 같았다..
"저기..장선우씨....그분...잊을때까지..기다리면..안될까요...?"
경화자신도 자신의 고백에 놀라고 있었다. 말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선우는 당황하는듯 했다. 그러더니 이내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어쩌면...잊지 못할지도 몰라요...."
경화는 꾸벅 인사를 하며 병실을 빠져나왔다.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선우의 마지막말이 왜 이렇게 아프게 들리는걸까...
당연한 말이었는데도...
그렇게 이주일이 또 흐르고 선우는 점점 회복이 빨라져갔다.
그리고 선우와 경화는 서로 더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좋은 사이
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아직 완전하게 경화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건..
경화도 다 이해할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날 수술과 응급환자들 덕에 잠 한숨 자지 못한 경화는 몰려오는 피로에
자신의 책상에 머리를 기대고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쯤 꿈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을까...
[따르르릉...따르르릉...]
크게 울려퍼지는 전화소리에 경화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고 주위를 둘러
보니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따르릉..따르르릉...]
경화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수화기를 들었다.
"최경화입니다.."
"......."
"여보세요? 말씀을...."
"흐으윽...흑...용서할수 없어........"
귀를 찢어 놓을듯한 흐느낌...그리고 여자의 목소리..
갑자기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누구십니까..?"
"흐흑..흐으윽.......너도....그리고...그도....용서하지 않겠어...."
"이것보세요!! 누구십니까?"
경화는 쇠박힌 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장난전화일거라고 생각하고 싶었
기에..
전화는 끊어졌고 경화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뒤..매일 똑같은 내용의 전화가 계속 걸려왔고..
경화는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아니겠지...? 하..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어쩌면 죽은 지연의 혼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뇌리를 스쳐지
나갔고 경화는 그럴때마다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
[따르르릉...따르릉..]
이젠 전화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경화는 신경질적으로 전화 코드를 뽑아버렸고 어둠속엔 정적이 흘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경화가 불을 켜려고 할때였다.
[따르릉...따르릉...따르릉.....]
차가운 기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해져왔다.
분명 전화 코드를 뽑았는데...어떻게 전화벨이 울리는 걸까....
경화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이 뽑은 전화 코드를 확인했다.
전화 코드는 뽑혀진 그대로였다.
[따르릉...따르르릉...]
지겹게도 울려대는 전화벨소리..
경화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흐으윽...죽여버리겠어...너도....그도...용서하지 않아...."
서늘한 무언가가 경화의 목덜미를 지나 경화의 어깨를 스치고..경화의
등까지 훑고 지나갔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듯한 오싹함..
경화는 전화수화기를 힘없이 떨어뜨리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헙............."
말문이 막혀버렸다. 소리조차 지를수가 없는 공포...
하얀 예복에 붉은 피가 짙게 얼룩진 채...서 있는 여자...지연이었다..
회색빛깔의 눈동자는 경화를 죽일듯 노려보고 있었고 붉은핏물이 든 손은
경화를 향해 뻗어있었다.
"흐으윽...흑....용서할수 없어.......흑...."
여자의 눈에 흘러내리는 눈물...창백한 입술의 움직임..
경화는 뒷걸음질을 쳤다..
"...사...사랑한다면...아직도...선우씨를...사랑한다면.....이러지 마세
요....이제..그만..선우씨를..놔주세요...."
어렵게어렵게 꺼낸 경화의 말에 지연은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금 천천히
스륵 몸을 움직여 경화에게로 다가왔다. 사고당시 다리가 잘려진 지연이
었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지연도 한쪽 다리가 잘려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는...나와의...약속을...잊었어.....흑........"
뒷걸음질치던 경화의 몸이 잠시 허공에 떠있는듯하더니 이내 경화의
찢어질듯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꺄아아악............."
창문으로 내던져진 경화의 몸은 7층높이에서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고
경화의 비명소리도 그쳤다.
[따르르릉....따르릉....]
벌써 몇일째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벨...
선우는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시간에 누군가 병실로 전화를 걸 사람도 없었고 느낌도 좋지 않았다.
[따르릉....따르릉....]
선우는 귓전에 계속 맴도는 전화소리가 상당히 거슬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수화기를 들었다. -내일이면 퇴원인데...뭐..별일있겠어..?-
"여보세요? 604호실입니다.."
"흑.....흐으윽.....당신이...어떻게....나한테 이럴수 있어...?"
"........지연이.........?"
"나와의....약속을...잊은거지....? 흐으윽....용서하지 않겠어..."
"여보세요!! 지연아..지연아!!! 흑...지연아...흐으윽..."
괴로움에 지연의 이름을 외치던 선우는 이미 끊어진 전화수화기에 대고
흐느껴 울었다.
"미안해...흑....내가...내가..잘못했어.........너에게로..가야하는데..
너무...늦었지...? 용서해줘......흐윽...."
선우는 선반위에 있는 과도를 집어 들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어둠속에서 사방으로 튀었다.
지연은 외로운 여자였다. 27년간 고아로 살아온 지연에겐 부모는 물론이고
친척들조차도 없었다. 어린 핏덩이였을때 고아원앞에 버려졌었고..
그래서 그런지 지연은 버림받는걸 가장 두려워했다.
그리고 선우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그 둘은 매일처럼 약속을 했다..
"선우씨..나 버리지 않을꺼지....?"
"당연하지..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버리겠니...? 걱정마...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아도...절대 널 버리지 않아..그러니까..너도 날 버리지마.."
"죽음이..우릴 갈라놓아도?"
"하하..그래..니가 먼저 죽으면..내가 따라갈꺼야...반드시..그럴꺼야.."
"헤....나도..그래...선우씨없으면..못사는데...선우씨가 죽으면....
나도..선우씨 따라갈꺼야....절대로..헤어지지 않을꺼야...."
"그래..우리 이대로 딱 100년만 더 행복하게 살다가..한날 한시에..손
잡고 죽자...그리고..죽어서도..사랑하자....사랑해..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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