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그날 밤 말들의 토막이 요며칠간 불쑥불쑥 머리 속에서 튀어나왔다.
남부럽다고 할 것이 한 두가지 뿐일까. 솔직해지면 솔직해 질 수록 꼽아가는 손가락이
부족해져만 갔다. 하지만 할머니의 설명을 계속해서 곱씹다보면, 손가락을 꼽아보는
물질적 보상 따위는 하찮아 빼앗을 가치도 느낄 수 없다.
모든 것이었다.
마치 그 사람 본인처럼….
황금같은 주말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오늘도 집안에서 밥 대신 라면을 조리고 있었다.
밥 대신이라 칭하기에도 과장스럽다. 쌀을 헹구고 밥솥에 앉히고 기다고 오뎅이나 볶고,
매일 먹던 신김치만 덩그렁한 식탁을 차리기가 싫어서 라면을 먹는 것이었다.
이런건 밥 대친이라기 보다는 굳이 식량충당이란 표현을 쓰는 편이 더 어울렸다.
결국 신김치는 꺼내야 했지만.
면만 대충 건져먹고는 나머지를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양은 냄비는 주둥이에 벌건 라면 국물을 묻혀둔 상태로 물에 잠겼다.
주방에 붙어있는 베란다의 선인장 화분 밑.
부모님 몰래 꼬불쳐 두었던 담배각을 꺼내 들었다.
왼쪽 맨 끝 창문틀 사이에서 아빠가 쓰는 라이터를 집었다.
엄마의 잔소리에도 좀처럼 라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자리였다.
불을 붙여 첫모금을 깊어 들이 마시니 "너 혹시 베란다서 담배 태우냐?" 하고
아빠가 물어 왔던 일이 떠올랐다. 대답하기도 전에 "늬 애미는 아니고." 라는 식으로
말을 해버려서 찍소리 하나 할 말이 없었다.
들켰다는 당혹감을 체 들어내기도 전에 아빠는 말했다.
"여자가 담배 같은 거 피워서 시집 가것냐?"
피우지 말아라도 아니었다. 냉큼 자기 할 말만 하고 아빠는 횡하니 사라져버렸다.
담배 같은 거 피워도 남자도 사귀고, 시집도 가고 애도 낳고 다 잘한다. 말대꾸도 듣지 않고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친구가 있다.
"담배 피우는 여자는 지적이어 보인데."
잠자던 속마음에 칼날같이 번뜩 일어서는 말이었다.
'그건 당신같은 사람들이나 듣는 말이고, 나는 대놓고 피우면 좋은 소리 못들어.' 하고
대답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질투심이 묻어나는 표현따위,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담배 뿐만이 아니다. 친구는 나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게 추한 모습이 없는 사람이다.
사레가 들어 입 밖으로 맥주를 뱉어도 귀엽다는 소릴 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매끄럽던 손가락. "손톱 같은 걸 뭐하러 다듬어 귀찮게." 털털하게 말을 뱉지만
그렇게 깔끔하면 다듬을 필요도 없겠지 싶었다. 그런 손을 갖어 본 적이 없어서
속에서 부글부글 심술이 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당시에. 아마도.
짧은 소매를 입으면 햇볕을 받아 도드라지는
흰살은 몸에 배인 자신감처럼 보였다.
가만히 눈만 뜨고 있어도 온갖 남자들 꼬드기는 그 은근한 남갈색 눈동자는 어떻고….
호들갑스럽게 "여자가 봐도 예쁘다." 떠드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와~ 소리 나오는 존재였을까.
칭찬을 대신 들어 준 것도 몇 차례나 되었는지.
아침꼭두 더벅머리를 틀어올리는 것도 맵시로 승화되는 사람.
항상 주위에서 보호 받는 사람.
예쁘다. 그런 단순한 말로는 표현이 다 되지 않는 수 있는 사람.
피부가 허여니 뽀얀 것이 아름답지만, 그런 겉모습이 그녀의 장점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말 한 것처럼 그렇게 그녀는 타고 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 부터 계속해서 머리 속을 굴러다니는 생각이었다.
작은 공프공 같은 이 생각은 머리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 때마다
데굴데굴 소리를 내며 나를 사로 잡았다.
하루 종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달고 달아가는 뒷방 속 먼지 쌓인 비디오 테잎처럼
화질이 흐려가는 아주 오래 전 기억까지도 전부 끄집어내 돌리고 또 돌리고.
"사람은 살다가 보메는 남으 것이 부럽기도 하고 그러잖어? 샥시도 다 같을거여."
할머니의 말이 떠오를 때 마다.
가시바늘 같은 죄책감이 양심을 찔렀다.
할머니의 말에 수긍을 해버리면 나의 지금까지의 생각들은
사람을 죽일까 말까의 고민이라고 밖엔 설명할 길이 없다.
시간이 지날 수록 할머니의 말이 아주 틀린말도 아닌 것 마냥 무게감을 얻어가고 있는 듯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남의 것을 갖는 대신에 그 사람이 죽는다면.'
죄스러우면서도 친구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는게 한탄스러웠다.
할머니의 말이 가슴을 때렸는지도 몰랐다. 선택받은 사람.
나는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말들로 점점 자신을 자기합리화 시켜만 가는 내가 있었다.
'아니야,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달콤한 말에 반항을 하는 중이야.'
스스로를 타이르지만, 나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짓말 골라서 하는 중이었다.
화장대에 번듯이 자리하고 있는 환약 두 덩이가 그 증거였다.
마치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시간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졌다.
죄의식이 이렇게 계속해서 허울을 벗고나면, 나는 사람도 죽일 수 있게 되는 걸까.
화장대로 부터 화장품의 진한 향에 섞여 환약의 쓴내가 방안을 돌았다.
약냄새가 느껴질 때마다 그릇 된 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만 같았다.
들킨 것인지, 깨달은 것인지….
약냄새를 가리려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덮어버린 채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빛이 쏫아져 감은 눈꺼풀 밖이 성가셨지만, 그대로 낮잠을 청했다.
매번 주말과 같이.
안올린줄 몰랐네요 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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