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달빛이 어스름하게 스며드는 밤이었다.





눈이 뜨여졌다. 시계는 3: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말그대로 '미드나잇'이었다. 요 며칠 자꾸만 잠에서 깨어났다.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또 불면증이 도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덜컥 앞섰다. 며칠 간 약 덕분에 우울함은 한결 가신 것 같았는데.





아니야, 아니겠지. 그 일 이후 아직까지도 신경이 예민해져버린 탓이겠거니 생각하며, 나는 찌뿌듯한 몸을 일으켜 침대 맡에 걸터
앉았다. 방 안은 한산했다. 그 흔한 초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손으로 옆자리를 짚었다.







자리에 있어야 할 남편이 보이질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안방 화장실 문을 열어 보았다. 어둠만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담배라도 피러 나간걸까. 문을 열어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찬가지로 짙은 어둠뿐이다. 베란다 너머론 보다 짙은 밤빛이 한가로이
흩어져 있었다. 널찍하게 드리워진 그 위론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남편이었다. 베란다 밖의 그는 검은 봉지에
고개를 처박은 채 무언가를 먹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







그를 부르려던 찰나, 알 수 없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무언가를 씹는듯, 또 뜯는 듯도 한 소리였다. 미간을 움츠려가며 그의
모습을 조심스레 살폈다. 허겁지겁 무언갈 뜯어 먹고 있었다. 별안간 섬뜩한 기분이 온 몸에 엄습했다.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그
게걸스러운 뒷모습에서 분명 기괴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숨을 주인 채 그의 모습을 훔쳐보다, 다시
잠이 밀려오는 듯도 했고, 혹시 그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꽤나 곤란한 상황이 닥칠 것 같다는 본능적인 느낌에, 안방으로 돌아와
다시 몸을 뉘였다.





30분 쯤 지났을까. 슬슬 잠에 빠지려 할 때 쯤, 삐걱이는 문소리와 함께 남편이 돌아왔다. 순간적으로 온 몸에 한기가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은 방에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쩝쩝대는 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실눈을 떠 슬그머니 남편을 훔쳐보았다.
그는 거울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어놓곤, 야기죽거리듯 불쾌한 웃음과 함께 이쪽저쪽으로 혀를 놀려가며 치아에 끼어있는 무언가를 열심히
제거하고 있었다. 아, 에, 이, 오, 우를 반복하며 꼼꼼히 확인하길 몇 번, 남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불을 파고드는 무언가 느껴졌다. 남편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몸을 뉘였다. 참을 수 없는 오싹함이 다시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차마 눈을 뜰 순 없었다. 왠지 어둠 속에서 남편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몸을 웅크렸다. 그리곤 조그마한 숨소리조차 새어나가지 않게 질끈 입을
틀어막았다. 이내 남편의 코골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뭘 그래서야. 그냥 모르는 체 했지 뭐."



"훗, 너희 남편도 참 이상하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한밤중에 일어나서 그리도 게걸스럽게 뭘 드셨을라나."







지연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양미간을 잔뜩 모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몰라, 근데 너무 무서웠어. 그 사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구.."



"얘, 남자는 원래 다 비밀스러운 모습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거야. 너는 어쩌면 아직도 그렇게 남자를 모르니?"



"그래도……."





지연이 희고 긴 손가락으로 찻잔을 더듬으며 말했다. 애초부터 지연의 머릿속에 내 얘기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오로지 지연의
시선은 커피숍을 분주히 헤집고 다니는 젊은 남자 종업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지연이나 나나, 지금이면 한창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다닐 나이였으니까. 나는 결혼을 서두른 편이었다. 어느 새 신혼 3년 차, 올해 스물다섯 이니, 무려 스물 두
살에 남편을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가끔은 이른 결혼이 후회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속박을 받는 게 많았기
때문이리라.







"선영아, 쟤 귀엽지 않니?" 지연이 손가락으로 종업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응, 귀엽네."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얘는 싱겁게."





고깝지 않은 지연의 태도에 내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연은 그제서야 종업원에게로 꽂혀 있던 시선을 거두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진짜 심각 한 거야?"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진 모르겠지만 그사람 요즘 정말 이상해."



"뭐가 어떤데?"







지연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물었다.





"나도 몰라. 그냥 그 사람, 나한테 요즘 부쩍 무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전처럼 살갑게 대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집에만
오면 밥 먹자, 씻자, 자자. 그게 끝이야. 나는 그이랑 대화도 하고 싶고. 여기저기 놀러도 다니고 싶고. 어쩔 땐 오붓하게
둘이서만 술 한 잔도 하고 싶고. 이것저것 다 하고 싶은 데 말야. 어쩌면 사랑이 식어버려서 그런건 아닌지."



"혹시, 너 산후 우울증 아니니?"







지연이 티슈로 입 주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 그럴수도 있겠지. 그이는 꼭두새벽같이 출근해서 해가 질 때쯤이나 되서야 들어오고. 나는 그 동안 하루 종일 좀스런
상념에만 젖어 살아. 독서도 해보고, 컴퓨터도 해보고, 집안일도 해보고. 종종 근처 공원에 나가서 산책도 해보는데. 이상한 건 늘
혼자라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는 거야. 결혼을 하고나니 오히려 더 외로워지는 것 같아. 내가 너무 서둘렀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야."



"으이그, 그러니까 그 때 이 언니의 말을 들었어야지."







지연은 혀를 끌끌거렸다.







연애시절 나는, 한 번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을 하기에 그는 너무나도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알다시피 결혼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한사코 그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기에, 나는 그가 청혼을 할 때마다 번번이
죄스러운 마음을 무릅쓰고 거절하기 일쑤였다. 결혼은 현실과 권태의 늪 속으로 온 몸을 내던져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꿈꾸던 결혼 생활의 환상따윈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산산조각 나버려, 결국에 돌아오는 것은 위자료 독촉장과 감당할 수도
없을 마음의 빚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곳저곳에서 주어들은 귀동냥쯤으로 충분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 내가 보기 좋게 실수를 해버렸다.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남편은 나의 선택을 존중하겠노라 말했다. 처음엔 지우려고
했다. 며칠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내 몸 속에선 생명의 약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점점
메워갈수록 굳건했던 결심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며칠 뒤, 나는 아이의 첫 심장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고, 동시에 나의 심장도
녀석과 같이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출산을 결심 한 이후, 우리는 양가 부모님께 이 사실을 고백하기로 했다. 물론 집안의 반대는 예상보다 더욱 거셌다. 특히 시댁의
반대가 심했다. 남편의 집에선 나처럼 어린 여자가 아닌, 경제적으로도 능력이 있고 보다 성숙한 여자를 며느리로 맞길 원했다.
심지어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남편의 집에선 나와의 교제 사실 조차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손에 이끌려 간
시댁에서, '이 여자가 나랑 결혼할 여자입니다. 제 애도 가졌습니다. 저는 이 아이를 나을 작정입니다.' 라며 온 집 안에 못을
박아 놓곤 홀연히 뛰쳐나와 버렸으니, 생각해보면 완강한 반대가 없는 것도 이상할 일이었다.







한 때는 시댁에서 낙태할 때 쓰라며 돈을 쥐어주고는 아이를 지우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그 사건은 지금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양가의 생각만큼이나 굳건했다. 그 의지가 명확하게 피력되고, 결국엔 누구도 그것을 쉽게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남편의 집안에선 울며 겨자 먹기에 가까운 결혼 승낙이 떨어졌다. 승낙 이후 남편과 나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을 지켜냈다는 마음에 며칠을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서둘러 혼례를 마쳤으면 좋겠다는 시댁의 아니꼬운 눈초리에, 쫓기듯 결혼식을 치르고 난 후 우리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발리로 향했다.
하지만 그 때였다. 장거리 여행으로 인한 여독이 미처 풀리기도 전에, 공항에서 나는 극심을 진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삽시간에 양수가 터졌고, 많은 양의 하혈이 시작됐다. 남편은 서둘러 구급차를 불렀다. 일각을 다투는 상황인지라 그의 표정엔 수심이
잔뜩이었지만, 나는 그 고통 속에서도 자그마치 피어나는 희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 곧. 이제 곧 우리의 아이를 만나게 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병원에서 우리에게 들려온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예정일보다 8주나 빠르게 아이는 자궁을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2달 남짓
정도의 조산이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이였다. 아이는 사산아였다.
뱃속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 낼 수 없었던 기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의사는 한시라도 서둘러 사산아를 적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그대로 방치한다면 자칫 내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진통은 더욱 극심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남편은 이미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얼마 뒤, 수술은 긴급하게 진행됐다. 차가운 바에
누워, 주삿바늘이 팔등 언저리로 무자비하게 꽂혀지고, 무영등의 눈부신 조명빛이 동공을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이 들던 찰나, 흐릿한
의식으로 눈을 떠 보니, 온 몸에 는 또 다른 주삿바늘들이 정신없게 꽂힌 채 덜컹거리는 병상위에 실려 회복실로 향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유 데미우르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