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과 별 소득 없는 얘기가 몇 번 더 오고 갔다. 더 이상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 나는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둘러대며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와 차에 몸을 실었다. 답답한 마음에 연거푸 들이킨 아메리카노 몇 잔 탓인지, 입 안을 맴도는 텁텁한 느낌이
도무지 운전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껌이라도 씹으면 좀 나아지려나. 마침 근처 골목에 편의점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얼마죠?"



"천원입니다."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지만, 몇 년 사이에 껌 가격이 꽤 많이 올랐다. 그저 평범한 츄잉껌 일뿐인데. 포도맛. 어렸을 때 부터
포도를 좋아했다. 포도는 장점이 많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선 포도주를 심장병, 천식, 피부병, 그리고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쓰기도
했었다고 한다. 어쩌면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는 말에 더욱 더 포도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 일이 있은 이후로
포도를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여하튼 포도는 가장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였다.





편의점을 빠져나와 다시 차에 몸을 실었다. 은박지를 벗겨 껌 하나를 집어들었다. 밀가루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입 안으로 쏙 넣어 몇
번을 오물거리니, 점차 껌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텁텁함은 확실히 가시는 듯 했다. 문득 백미러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부지런히 껌을 질겅대는 모습이 괜시리 생경하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쩝쩝. 쩝쩝. 쩝쩝.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쩝쩝대는 소리가 차 안에서 가득 울려 퍼졌다. 물론 차 안엔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별안간 어제 보았던
남편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몸서리가 쳐졌다. 남편의 얼굴이 머릿 속에서 떠올랐다. 소름이 돋았다. 어디선가 남편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결국 껌을 뱉어버렸다.





*







"왔어요?"







나는 도어락 소리에 반사적으로 외쳤다. 남편이다. 그는 나를 보곤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를 퀭한 웃음이었다. 부쩍 수척해진
그의 얼굴에서 광대까지 내려온 그늘은 그 웃음을 더욱 께름칙하게 보였다. 어제의 기억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자기야."







인기척도 느끼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내 뒤로 남편이 다가와있었다. 갑자기 그가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짐짓 옅은
미소를 지으며 뒤척이듯 몸을 빼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더욱 더 세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엉덩이에서 빳빳하게 서 있는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그것을 내 둔부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몇 분이나 그것을 문지르다
나를 덜컥 돌려세워서는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의 손을 자신의 그곳으로 가져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남편의 그곳을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옅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아이 다시 가질래?"



"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밀쳐버리고 말았다. 3년 전의 일 이후로, 나는 성관계에 대한 중증 이상의 공포가
생겨나 버렸다. 초반 1년 간은 죽은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려 수면제가 없인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에게
섹스란, 마음 속 깊은 곳에 멍울져 버린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헤집어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남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애써 그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게 아니라……."



"뭐야, 이렇게까지 밀칠 필요는 없잖아."



"아니, 나도 모르게……."



"대체 언제까지 이럴꺼야?"



"여보……."



"이젠 제발 좀 그만하면 안 돼? 무려 3년 전 일이야. 3년이라구."



"………고의가 아니었어요."



"됐어. 지겹다, 이제."







남편은 차가운 말투와 함께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압적인 태도의 남편이 낯설었다. 물론 그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런 모습은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나는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알 수 없는 소리에 다시 눈이 뜨여진 건 그 날 새벽이었다. 짙은 어둠사이로 희멀건 형체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영이
확실했다. 남편이겠지. 실눈을 떠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서랍 속에서 꺼내든 무언가를 바스락거리며 뒤지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는 꽤나 거슬릴 정도의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도, 오로지 그것들을 세 맞추는데 열중이었다. 남편은 그것들을 다
세고 난 뒤 속삭이는 듯, 또 야기죽거리는듯 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이곤 안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숨소리를 죽인 채 그의 발자국
소리를 더듬어 들었다. 끼익, 쿵. 새시가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고, 다시금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쩝쩝'







그 날도 역시 남편은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쩝쩝대고 있었다. 나는 멀찍어 떨어져 그 모습을 훔쳐보다, 이윽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그의 뒤에 다가섰다.





허여멀건 달빛이 베란다 맡으로 짙게 쏟아졌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뚜렷이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워낙 주변이
어두웠던 탓에 정확히 뭘 먹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형태와 감질만을 아스라이 알아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분명 조그맣고
미끌한 표면을 지닌 무엇이였다. 더구나 그가 완벽하게 거실 쪽으로 등을 지고 있던 탓에, 그 이상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드르륵'





그 때였다. 느닷없이 남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정색 봉지를 허겁지겁 챙기기 시작했다. 그의 눈 속엔
당황스러움과 난감함이 뒤죽박죽 엉켜있었다. 입가엔 진홍색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얼룩덜룩했다. 그는 나의 시선이 그의 입가로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듯, 재빨리 손등으로 입술을 훔쳐냈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곧 남편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동공은 불안한 듯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한 동안 적막함이 흘렀다. 얼마 쯤 지났을까.
나는 소파위로 간신히 몸을 앉혔다. 그러나 남편은 미동도 없이 멀뚱히 서있을 뿐이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그의 눈에선 알 수 없는
이채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경직된 자세로 한 동안을 그렇게 꿈쩍없이 앉아있었다.









그 날 아침, 그가 출근을 할 때 까지, 나는 꼼짝없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남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니, 마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씻고, 밥을 먹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심지어 다녀올게, 라며 자상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하고 출근길에 나섰다.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온 몸을 휘감고 돌기 시작했다. 나는 소파위로 힘 없이 쓰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