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빛 지휘봉이 춤추듯 허공을 휘저었다.

지휘봉이 날렵하게 휘어 올라갈 때마다 온갖 악기들이 제각기 함성을 내질렀다.

음악실뿐 아니라 학교 전체로 울려퍼지는 베르디의 교향곡은 완전히 지휘자의 지배 아래 놓여있었다.

온 몸을 유연하고 아름답게 흔드는 것은 지휘봉뿐이 아니다.

지휘자의 흰 와이셔츠, . 그 모든 것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악단의 잠재력을 폭발적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힘겹게 지휘를 따라가던 트럼펫 단장이 연이은 연습에 지쳐 악기를 내려 놓았다.

억지로 마우스 피스에 입을 갖다 대어도 입의 근육이 모두 풀려 고음을 낼 수가 없었다.

악기 하나가 빠졌을 뿐이었기에 일반인이라면 그 차이를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으나, 지휘자는 순식간에 작은 결함을 잡아냈다.

연주에 금이 간 그 순간, 흔들리던 지휘봉이 우뚝 멈췄다.

악단의 구성원이 모두 학생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연주가 멈췄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내리기 전까지 단원들 모두 악기를 붙잡은 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만 들려오는 불쾌한 침묵 속에서, 지휘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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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꾸 틀려.”

 

 

아무도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지휘자는 눈을 번뜩이며 모든 파트를 돌아보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은 트럼펫 파트에 멈춰섰다.

 

 

트럼펫 파트장.”

 

 

“....”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소녀는 아까 전에 악기를 내려놓았던 학생이었다.

그녀는 힘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지휘자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도 네가 전공자야?”

 

 

“...”

 

 

대답해봐.”

 

 

“....”

 

 

전공자가 어디 연주중에 악기를 내려놔!”

 

 

튜바 소리처럼 육중한 호통이 전공생에게 작렬했다.

전공생은 눈가를 훔치며 뭐라 항변하려 했다.

 

 

“5교시부터 연주를 해서... 너무 힘들어서...”

 

 

쉬는 시간을 줬잖아! 입술 관리 하라 했지!”

 

 

전공생인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울분이 섞인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지휘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지휘봉을 케이스에 넣더니, 악장에게 무언가 지시하곤 지휘실로 들어갔다.

깐깐한 지휘자가 사라지자마자 단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악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악기를 내려놓고 훌쩍이던 학생이 제일 먼저 교실을 빠져나왔다.

한쪽 눈가를 꾹꾹 누르며 나가던 중, 어리숙하게 서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자신에게 뭐라도 물어보고 싶은 표정으로 쉼 없이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

전공생은 눈을 크게 깜박여 눈물 자국을 애써 숨겼다.

헛기침을 한번 해서 떨리는 목청을 가다듬고, 남자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치켜떴다.

설마 학생이 먼저 말을 걸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탓인지 그는 질문의 갈피를 전혀 잡아내지 못했다.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며 가만히 서있던 여학생은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언제 나오시니?”

 

 

등 뒤로부터 예의 그 답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학생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합주 끝았으니까 잘나신 그 분 곧 나오실 거구요, 전 그 분 나오는거 보기 싫어서 빨리 갈거거에요.”

 

 

잔뜩 흥분한 탓에 그녀에게서 존댓말과 예삿말이 섞여 튀어나왔다.

여학생은 한결 시원스러운 표정으로 모두 들으라는 듯 계속 악담을 퍼부었다.

 

 

자기 제자들 실력은 키우지도 못하는 지휘자가 오랜만에 왔다고 애들이나 굴리는데, 왜요? 그분 보려고요?”

 

 

, .”

 

 

남자는 잔뜩 질린 표정으로 검지를 입에 갖다댔다.

울분을 전부 터뜨린 여학생은 한층 가벼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교실에서 얼굴만 내밀고 지켜보던 학생들이 동시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중학생도 있었고, 고등학생도 듬성듬성 섞여있었다.

남자는 학생들을 피해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누군가를 계속 찾았다.

학생들이 모두 나왔는데도 안을 들여다보며 서있는걸 보니, 안에 남은 마지막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분명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여러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던 교실은 정적만이 흘렀다.

붉게 물든 햇빛이 교실을 가득 채울 때 즈음 돼서야 지휘실의 문이 열렸다.

한 손에는 악보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지휘봉 케이스를 든 지휘자는 거만한 표정으로 교실을 훑어보았다.

모든것을 점검하고 교실을 나서려던 그 순간, 복도에 서있던 남자가 그를 멈춰세웠다.

 

 

실례지만 10년 전에 이곳에서 근무하신 이재현 선생님이 맞으신가요?”

 

 

교사라 불린 사내는 묵묵히 맞은편에 선 남성의 얼굴을 살폈다.

잔뜩 경계한 표정으로 위 아래를 살피며,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는 10년 전에 이 학교에 다녔던 학생입니다만, 그때 학교에 있었던 괴담을 조사하기 위해서 학교에 왔습니다.”

 

 

, 그 괴담?”

 

 

전직 교사는 간단하게 대답하곤 지휘봉 케이스를 매만졌다.

 

 

그런데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

 

 

저는 국문학과생인데 당시 있었던 괴담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 논문에 도움이 돼서 그렇습니다.”

 

 

“...”

 

 

전직 교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간단히 한마디 할 뿐이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데.”

 

 

바로 기억하셔야 할 필요는 없고요, 제가 다 알고 있으니까 기억이 다시 나도록 도와드릴게요. 일단 앉으시죠.”

 

 

글쎄 모른대도.”

 

 

사실 제가 여기서 2시간은 기다려서, 조금이라도 조사를 좀 하고 싶은데요.”

 

 

대학원생은 전혀 물러날 생각 없이 문 앞에 서있었다.

계속 거절해봐야 시간낭비일 뿐이란 생각에, 교사는 교실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난잡한 교실 대신 깔끔하게 정돈된 지휘실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대학원생은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놓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녹음까지 하려고?”

 

 

. 논문에 거짓자료를 썼다고 클레임이 들어올 수도 있어서요.”

 

 

“...”

 

 

"오랜만에 여기 오니까 좀 기분이 색다르네요. 관악부원중에 고등학생도 있던데, 원래 이런가요?"

 

 

 

"예전부터 고등학교랑 중학교 동아리는 합쳐져 있었잖니."

 

 

 

"아 그랬었나요? "

 

 

 

"그랬지. 예전부터."

 

 

 

그렇구나... 그런데 제가 10년 전에 괴담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기억 나세요?”

 

 

잘 기억은 안난다.”

 

 

아 그러시구나...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요 저기 저 계단 창고에 귀신이 있다는 얘기를 좀 들었어요.”

 

 

누가 그런 말을 해?”

 

 

“10년전에 계셨던 선생님한테 여쭤보니까 그런 괴담이 많이 돌았다 하시더라고요. 그때 음악 선생님한테 애들이 막 몰려와서 묻고, 그래서 선생님이 창고 문 열어서 그런거 없다고 화도 내시고... 기억 안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