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오래전 일이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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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어요?’ 라는 말이 대학원생의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다.
과거에 학교를 떠들썩하게 달군 탓에 대부분의 교사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가 있는가.
학생들이 향유하던 괴담을 단두대에 올려놓은 장본인이 과거의 사건을 잊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같아보였다.
교사가 오로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 녹취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나, 대학원생은 쉽사리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병아리 수준이기는 해도 전국을 다니며 구전 이야기를 채굴해오던 노련한 연구가였다.
이대로 이야기를 이어가다간 아무것도 건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대학원생은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정일형 선생님은 그걸 다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1층에 절뚝거리는 귀신을 봤다, 보면 뭐 큰일이 난다 그런 괴담이 퍼져가지고, 선생님. 그러니까 이재현 선생님이 창고문 열고 애들한테 다 보여주고 그랬대요. 이것도 기억 안나세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은 안나.”
“그러신적이 있다는거죠?”
“그러긴 했는데 그게 왜? 중요한거냐?”
“그게 사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퍼뜨리지 말라고 하는게 구비문학계 입장에서는 조금 타격이 가는 행동이라서, 왜 그러셨는지 좀 알고싶고요.”
“...”
대학원생은 침을 한번 삼킨 뒤,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밝혔다.
“왜 하필 계단 창고에 귀신이 있다는 괴담이 생긴건지 개인적인 견해가 있으시다면 말씀을...”
드르륵
교사는 대답 대신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학원생은 녹음기를 끄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관악부 선생님이랑 좀 만나야해서 먼저 가봐야 해. 물어볼거 있으면 다음주에..”
“다음주에는 여기 떠나신다고 들었어요.”
대학원생은 힘있게 또박또박 말했다.
교사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이 보기엔 그냥 애들 괴담일지 모르지만 저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
“이 이야기가 왜 생겼는지... 제가 알아야 하는데... 자꾸 피하시면 어떡해요.”
덜컥
대학원생이 말을 마쳤을땐 이미 혼자 교실에 남겨진 뒤였다.
그는 답답한 표정으로 가슴을 한 대 쳤다. 한숨을 크게 내쉬어도 먹먹한 가슴은 어찌할 수 없었다.
드르륵하고 교실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학원생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뒷문쪽을 쳐다봤다.
“어떻게 됬어?”
“괜히 기대했네.”
고수머리의 중학생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대학원생에게 받은 가디건을 반듯한 교복 위에 숄처럼 두르고 있었다.
“아무말도 안하고 그냥 나갔어.”
“뭐? 왜 아무말도 안했어?”
“기억이 안난대.”
“...오래전 일이라 그런가?”
“아니. 내가볼 때 그 사람 뭔가 알고있어.”
“그걸 어떻게 알아?”
“넌 알 필요 없어. 확실한건 알고 있는데 숨기고 있다는거야.”
“그러다 아니면 어떡할라고 그래.”
“저사람 내일도 학교 오지?”
“관악부원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알아.”
“내일 모레가 합주회니까 꼭 올거야. 와야만 해.”
대학원생은 중얼거리며 피곤에 찌든 몸을 일으켰다.
두시간 전에 도서관에서 몰래 잘라온 사진이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거렸다.
10년 전에 괴담만 학교에 돌아다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소녀의 실종도 떠들썩하게 교내에 퍼져있었으나, 그 사건은 얼마 안가 쥐도새도 모르게 잊혀졌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종 전에 미리 찍었던 졸업사진 덕분에 그녀의 사진을 10년 전 졸업앨범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 낯익은 얼굴은 과거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는 교내 채플 시간마다 단상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전공생이었으며 동시에 관악부원이었다.
또한 나를 따라다니는 중학생 아이의 말에 따르면 요즘 학교에 나오지 못한다는 그 아이 또한 관악부 소속이었다.
단순한 괴담의 한계를 넘어 학생의 숨통을 조이는 이 괴현상이 관악부와 관련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말도 안하고 어디가?”
중학생이 얼굴을 찌푸린 채 뒤따라왔다.
아이는 대학원생이 괴담을 믿는다고 말한 이후부터 그를 진드기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이에게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싶긴 하지만 벌떡 소녀에게 빙의당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심약한 아이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대학원생은 고심 끝에 몸을 돌려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좀 쫓아다녀라 제발. 넌 집에도 안가냐?”
“...”
“나는 도서관에 가서 늦게까지 있어야 하니까 너도 집에 가라. 뒷문으로 나가지 말고 꼭 정문으로 나가고.”
아이는 서러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섰다.
아까부터 들은 말이라곤 ‘넌 몰라도 된다.’ ‘신경쓰지 마라’ 밖에 없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아이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정문 계단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끝까지 지켜보던 대학원생은 터덜터덜 윗층 도서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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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어느덧 2층까지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총 3개로, 후문쪽, 정문쪽, 우측문쪽 계단이 있었다.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계단은 후문이었으나 요즘들어 후문으로 하교하는 학생을 찾아보기가 드물었다.
1층 귀신이 후문에서 주로 나온다는 소문이 퍼진 결과였다.
그대로 정문쪽으로 내려가려던 아이는 문득 좀전의 일을 떠올렸다.
‘꼭 정문으로 나가라.’
그 말이 떠오른 순간, 정문으로 내려갈 생각이 씻은듯이 사라졌다.
한동안 가만히 서있던 아이는 잔뜩 화난 얼굴로 후문쪽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항심리로 똘똘 뭉친 탓에 괴담이 무섭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1층 복도를 지나가며 좌우로 흔들리던 팔이 한순간 우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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