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에는 수정산이라는 산이 있다. 엄광산이라는 큰 자락 아래에 구덕산, 구봉산, 수정산이 모여 있는 야트막한 뒷산이다.

나는 어린 시절 수정산 밑, 부산 산동네에서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했던 것은 아니고.

수정 4동 최초의 3층 저택이 바로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이었다.

 

경남 함안이 고향이던 할아버지는 성공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오셨다.

김영삼 대통령때 하나로 부산공동어시장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통합된 어시장들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부산의 감만동, 자갈치, 용호동, 송도,영도 등지의 어민들의 판매처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함안의 선산을 판 돈으로 자금을 마련한 할아버지는 수년이 지나자 결국 중간 유통상들 중 나름 큰손으로 인정받게 되셨다.

 

한편 해방이 되고, 징용을 갔거나 돈을 벌러 건너갔던 조선인들이 돌아오던 배가 부산 앞바다 송도 어귀쯤에서 침몰해 영도즈음의 어민들이 이들을 구조하러 나섰는데, 그때 거래처 때문에 영도에 가 있던 할아버지도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 할머니를 만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열심히 일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룬 증조 외할아버지 내외는, 자식들은 조선에서 키우자는 일념으로 해방 직후 조선으로 건너오던 분들이셨다. 그리고 이 때 싸들고 오던 재물을 꽤나 잃어버린 증조외할아버지 부부는 먹고 사는 문제야 둘째치지만 일단 할머니의 몸 건사가 더 중요한 문제였기에, 내 할아버지와 사랑하게 된 자신들의 딸을 큰 반대 없이 시집보냈다.

 

물론 할아버지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그 때문에 우리 할머니의 위치는 굉장히 애매했다. 할아버지 깨서는 초량에 자신의 아내의 집을, 수정동에 우리 할머니의 집을 하나씩 마련하고서 수정동에서 살았다. 비록 두 번째로 들인 부인이라고는 하지만 함안에서 부모님들끼리 쑥덕거려 만든 결혼과 자신들끼리 반해서 서로 결혼한 우리 할머니 중 우리 할머니 쪽이 더 비중이 크지 않았나 싶다. 심지어는 초량동의 원래 아내는 딸 하나밖에 낳지 못했지만 수정동의 우리 할머니는 딸 셋에 아들 둘을 낳아 줬으니 금쪽 같은 아들을 둘이나 얻은 것인데다가. 무엇보다 수정동에 집을 얻고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사업까지 술술 풀리니, 할아버지는 완전 복덩이를 얻은 느낌에 입에 웃음이 떠날 날이 없으셨고,  수정 4동 최초로 3층 양옥을 올린 집에서 할아버지는 나이 38살에 막둥이인 우리 아버지를 얻으셨다.

 

한편 초량동 산 밑의 집에 딸과 함께 살던 큰할머니(할아버지의 원 아내) 는 이러한 일에 큰 불만이 있으셨는지 없으셨는지 몰라도 심적으로 충격은 꽤나 있으셨던 것 같다. 무속신앙과 종교에 빠지셨으니... 초량동 집이 온통 무속기구로 가득차고 무당이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드니 결국 할아버지는 초량동 집에 완전히 발을 끊으셨다.

 

이런 할아버지가 큰할머니 집에 어느 날 찾아갔을 때, 할아버지는 한 남자가 큰할머니 집에 드나드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가정에 소홀해지고 왕래가 없다지만 마땅히 지아비가 있는데 아녀자가 다른 살림을 차리는가 하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솟아 당장에 달려가 멱살을 잡으려는 것을 초인적인 자제력(+그리고 큰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참고 가만히 일을 지켜보았다. 당연하게도 큰할머니가 바람을 핀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남자는 박수(남자무당)였고, 이 치는 묫자리 짜는 풍수도 보고 굿도 하는 잡 무당이었다. 그리 용하다고 알려진 박수는 아니었다만 할머니,할아버지와 같은 함안 출신인지라 이 박수무당은 초량동 집을 꽤나 들락거리고 있었다.

 

사실 큰할머니의 나이도 있고, 딸도 있고 하니 바람을 필 나이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박수에게 별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그래도 본부인인데 너무 소홀했나 싶어서 몇일간은 초량동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가족은 수정동에 더 많고 할아버지가 수정동 가족들과 산 것도 이미 몇 년이다. 제사도 이미 수정동 집에서 지내는 판이니 할아버지는 다시금 초량동 집에 소홀해지다 다시 방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하튼 사업이 잘 풀리고 돈이 많이 들어오니 할아버지는 다른 업종에 손을 한번 대 볼까 하면서, 처음에 생각하신 것이 제지업이었나 뭔가 라고 한다.

지금의 현대백화점이 있는 조방은 원래 조선방직이란 회사가 있었다는데 할아버지는 이곳에 투자하기로 하셨다.

 할아버지는 기왕 큰돈을 투자하기로 한 김에 이전번의 그 박수에게 투자를 해도 될지 안될지를 물었는데.

그 박수가 하는 말이 조방은 사장 얼굴에 기운이 나쁘고 운수가 별로니 자기는 정말 추천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몇 달 뒤, 조방은 사장이 해외에서 수입해온 소나무에 무슨 벌레에 감염되었나 해서 정부로부터 징계를 받고 회사가 아주 망했다. 이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투자를 할 때마다 박수의 조언을 받았고 신통하게 전부 맞아들어갔다. 돈은 아주 굴러들어 왔다. 이때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집 앞 근처 도로의 계단이 많아서 힘들다고 하자 그 날 저녁 바로 집 근처 도로를 사서 아예 시멘트로 포장하고 평탄한 오르막길로 만들어줄 정도였다.

이때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런가 지금도 그 집에 사는 우리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다들 알고 요전번에는 무슨 청년회장인가 하는 직위를 맡아달라고 온 적도 있고 나 어릴 때는 절이나 교회에서 후원금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왔다.

 

시간이 지나고 박수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할아버지에게 말했을 때 할아버지가 상당히 아쉬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떠나는 사람을 어찌 붙잡겠는지. 박수는 떠나기 전에 꼭 하나 알려줄 게 있다면서 할아버지, 그리고 아직 어리던 아버지와 함께 뒷산에 올랐다고 한다.

수정산은 모두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200m 정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산세가 신기하게 생겼는데, 수정산 위로 올라가면 큰 분지가 있고(어릴 때 여기 막걸리집이 있었던 느낌이다) 이 위로 구봉산 헬리포트, 엄광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있다. 산이 다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것인데 묘하게 봉우리들이 둘러싸는 분지에서 아직은 졸졸 흐르는 냇가보다도 얕은 물줄기가 흐르다가 이게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며 수정천으로 변하고 부산고등학교 밑, 곱창 골목까지 이어져 부산역까지 이어지는 큰 강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수정산의 어원은 어느 곳엔가 수정을 캐는 광산이 있어서 수정산이라고 하지만 동네 사람 누구도 이 곳에 수정 광산이 있었는지, 위치조차 감을 잡지 못하는데, 박수의 말인 즉 수정산의 한자는 修正(보석 수정) 이 아니라 원래 水淨이라며 물이 깨끗한 곳의 발원지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말하였다.

이 물이 계속 흘러내려가 수정동을 보듬는데, 문제는 물의 찬기운이 따스한 가정의 기운을 해쳐 수정동에 터잡은 할아버지의 집에 불화를 낳을 거라면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 수정천을 복개하라고 말을 하였던 것이다.

나름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부산고 앞을 복개했고, 이어서 수정산 위의 물줄기를 시멘트로 직선화하는 공사를 발주하셨고 상당한 돈을 썼지만 이로써 가정이 평안해 질거라고 생각하며 안심했고, 수정천을 복개하면서 위생상 큰 공헌을 했단 이유로 동구청장에게 상도 받으며 할아버지는 떠난 박수에게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렇게 만족하고 있을 때, 첫째로 할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엇다. 김영삼 대통령이 어시장들을 부산공동어시장이라는 하나의 거래처로 묶는다는 소리가 전해지자 거래량이 확 줄었고, 어획량이 감소하는 등 기타 악재가 너무 많이 닥쳐와서 집을 세 채를 놓고 살던 할아버지의 사업은 어려워져서 결국 할아버지의 건강도 나빠지고 할아버지는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 계속 한탄만 하셨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박수는 사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가화가 없어진다고 하였지.

첫째로 큰할머니와 우리 할머니 이외에도 새로 만나고 있던 첩이 떠나갔다는 것이다. 마음고생하던 할머니는 사업이 어려워지는게 이렇게도 도움이 되는 구나 하고 어이가 없어 하셨다.

둘째는 큰할머니 딸이 결혼해 큰할머니 집을 혼수로 주면서 명절 때마다 큰할머니와 할머니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께서 큰할머니에게 인사하고 오는 사위들 때문에 상당히 마음에 걸려 하셨는데 그게 사라진 셈이다. ( 참고로 아버지와 큰고모의 나이차는 14살이 난다)

셋째는 할아버지가 앓아 누우며 집안에 자주 있자 할머니나 가족들과 보는 시간도 늘어나고, 쌓아놓은 돈이야 있으니 늘그막에 같이 여행을 다니면서 금슬도 좋아졌다는 점이다.

 

결국에 박수의 조언이야 틀린 말은 없었던 셈이다.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가족은 물론 일이 바쁜 고모 부부들을 대신해 고종사촌들을 맡아 주면서 집안은 식구들로 차 3층집의 빈방이 없을 정도였고 가족들 사이에 큰 화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벌어 놓은 돈이 많으셔서, 사업이야 잘 안풀렸지만 사는 데 어려움은 커녕 풍족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1993년 내가 태어날 때까지 천수를 누리다 가셨다.

 

가족들로 가득 차고 바글바글거리던 집안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누나와 내가 기숙사로 나온 지금은 어머니와 아버지 둘만이 지키고 있다.

수정산과 구봉산,엄광산의 영을 받지 못한 탓인지, 나의 모교 중앙초등학교는 내가 졸업하고 곧 동일중앙초등학교로 통합되어 80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마감했으며, 그 자리는 지금 경남여중 건물로 쓰이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과 5공을 거치며 평준화 이후에도 어느 정도 명문고로 취급받았던 부산고는 몰락하였고, 남포동의 구도심에서 조금 떨어지면서 접근성이 나쁘지 않아 주거지역으로 낙점지어 부호들이 몰려들던 수정동과 초량동은 어느새 산 위에 있던 이들이 내려오며 편부편모가정이 늘어나고 학군도 많이 나빠지며 몰락하였다.

 

결국 수정산의 물길을 막자, 수정동은 지금 그 옛 흔적만을 남긴 체 쓸쓸하고 커다란 집들만을 남기고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노인들의 보금자리로 변했다. 가끔 기숙사에서 집으로 내려갔을 때, 꽤나 큰 양옥집들 주변에 둘러쳐진 높은 담벼락,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듯 꽂아 놓은 담벼락 위의 뾰족한 쇠창살들을 보며  이 동네의 시간은 80년도에 멈춘 듯한 기분이 든다. 그 공간 속에서 나고 자란 나 역시 80년대를 좋아하고 그 때의 감성이 뭔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묘하게 싸늘하고 차가왔던 분위기로 나는 세상, 그러니까 우리 동네를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사람이던-건축물이던. 

 

풍수지리라는게 실존하는 걸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고작 개울을 복개한 것 하나만으로 동네가 몰락한다? 과학을 배우는 공학도의 입장에서 솔직히 믿음이 가기는 커녕 웃기지 말라고 해 주고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렇지만 이것은 할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은 아버지의 사업이 계속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데 왜 그만두고 편히 쉬지 않으시냐는 물음에 대해 해 주신이야기이다.  

 

어머니와 결혼하고 항상 쪼들리던 소득을 보고 아버지가 청년시절 항상 하던 생각은 꼭 어느 정도 돈을 모아 복개천을 뜯어내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결국 우리들의 교육비와 생활비, 저금을 붓고 나면 남은 돈이야 형편없어서 복개천을 뜯으려는 생각은 못해봤고 지역 주민들 역시 싸늘한 반응이어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 생각만 하고 살아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누나와 내가 모두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니 사실 돈은 큰 의미가 없어진 지금에 와서야, 그때 천을 무리해서라도 뜯어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셨다고 한다. 천을 뜯어낸다고 사업이 잘 될 거란 보장이 없지만, 사업이 잘 된다 해도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가정에 불화가 생기지 않는가? 아버지의 결혼이 불안불안하면서 결국 이제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박수의 말대로 천을 덮어버린 탓이 아닌가? 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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