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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 선비가 있었는데 몇번이나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경비만 축내 급제 한번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최후로 가재를 정리하여 경성으로 과거를 보러 갔지만 역시 낙방했으니 처첩이나 아이들을 대할 면목도 없고 해서 결심하여 그는 경성 남산 골짝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밤중에 눈을 번쩍 뜨고 보니 시녀인듯이 보이는 여인 하나가 자신의 목줄을 풀며 간호를 하고 약간 간격을 두고 한 미녀가 등불을 들고 비쳐주고 있었다. 그는 여인들에게 안내되어 어느 굉장한 기왓집으로 들어갔다. 시내로부터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는 '이런 곳에 이다지 큰 기왓집이 있을 리 없는데 어찌 된 일일까.' 하고 의심하면서도 어떻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널찍하나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없고 가족이라고는 이 두 여인 뿐이었다. 여인들이 중탕틀 끓여 먹이기도 하고 얼마간은 두 여인사이에서 불편없이 지났다.

이 집 주인인 딸과 관계를 가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선비는 두고 온 가족들이 격정이 되어 한번은 "시골에 한번 다녀오겠소."하고 말하자, 여인은 어쩔 수 없이 허락하면서 이같이 당부했다. "저의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밤이 이슥해서 길을 나서세요. 그리고 도중 누구로루터 말을 건네도 응답하지 마세요. 그 사람과 말을 냐누시면 안됩니다. 지금부터 1년후가 되거든 돌아와 주세요."

설비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전에 살던 초가집은 간데없고 기왓집이 섰으며 창고도 지었고 논밭도 상당히 늘어 부자가 되어 있었다. "이계 어찌된 일이오?"하고 물으니까, "이겻은 모두 당신이 경성에서 보내준 돈으로 장만한 것이랍니다. " 하고 처는 대꾸했다. (미인의 그녀가 몰래 보낸 돈이었다. ) 선비는 도저히 1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3개월만에 끝내 사랑하는 여인을 보러 떠났다.

그럭저럭 밤이 이슥할 무렵 경성에 도착해서 여인집을 향해 발을 재촉하고 있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들은체도 않고 발을 재촉했다. 그러자 또 사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 같았다. 세번째 소리가 났을 때 뒤돌아보았다.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네 얼굴엔 살기가 있다. 지금 찾아가는 여인은 인간이 아니라 실은 지네다. 그 여인에게 속히면 넌 죽을 수 밖에 없어. 만일 살려거든 담배진을 입에 물고 있다가 여인의 얼굴을 향해 내 뱉으라. 그렇지 않음 넌 죽는다. " 이 말을 남기고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졌다.

선비가 여인의 짐에 들어서자 여인은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푹 숙 인채 아무 말도 열었다. 선비는 잎담배를 마구 피워 진을 잔뜩 물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틀 향해 뿜으려고 했지만은 인정상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실행하려다 실패하고 땅바닥에 내밭았다. 그러자 여인은 그제야 머리를 들고 웃음으로 맞이해 주었다. "저는 사실 인간이 아니라 천 년 묵은 지네랍니다. 아까 님께서 오는 도중 틀림엄이 돌아가신 아버님을 만났을겝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님이 아니라 천년 묵은 닭이랍니다. 닭과 저는 천년이 지날 때 한 인간와 만나게 되면 진실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닭은 저와는 상극이라 제가 님을 말날 것을 알고 저를 죽이려고 님의 아버님으로 둔갑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지만 님이 마음을 고쳐 저를 사랑으로 대해 주었으므로 저는 인간이 될 수 있겠지요. 담배진은 저의 원수이기 때문에 만일 담배진을 저에게 뿜었다면은 저는 죽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내일 아침 남산 아래 큰 바위 밑을 보아주십시오. 그곳에 저의 허물이 있을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고 보니 누어있던 곳은 바위였으며 어제밤까지 있었던 기와집도 여인들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녔다. 생각이 문득 나서 남산 골짝이로 달려가 말한 장소에 가서 큰 돌을 들어올려 보니 과연 지네의 허물이 있었다. 또 다른 시녀 같은 여인은 큰 지네의 동생으로 아직 천 년이 안된 젊은 지네였다나.



출전: 손진태, 《조선민담집》, 향토연구사, 1930, 145 ∼ 148쪽
채록: 손진태, 대구 이상오(李相旿),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