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군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십여권의 책더미를 쌓아놓고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윤혜경 형사와 박호철 순경이었다.
한참을 자료들을 살피던 박호철이 몸을 뒤로 젖혀 크게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다.
\"윤형사님, 오늘은 이만 하죠. 전 눈이 아파서 더이상 못 하겠어요. 그리고 지금쯤 반장님이 돌아오실 때도 됐고.
반장님이 알면 또 난리날 텐데\"
\"미안해, 박순경까지 고생하게 해서....그래, 오늘은 이쯤 하자구\"
\"그런 소리 마세요. 근데 목촌리 마을과 주민들에 대해 이렇게 조사하는 이유가 뭐죠?
이것들이 살인사건과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찾은 자료들 복사하고 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좀 더 분석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혜경과 박호철이 가슴에 하나 가득 자료들을 안고서 도서관을 나온 것은 이미 날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구회열 반장이 오늘 집안 일때문에 오후 늦게나 잠깐 경찰서에 들린다는 소릴 듣고
그녀가 박순경에게 부탁하여 함께 도서관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 갔을때는 벌써 구회열 반장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잠깐 나 좀 보자구!\"
구반장은 손에 잔뜩 서류더미들을 들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해선 회의실로 그들을 불렀다.
혜경은 오늘은 아무래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구반장을 따라 갔다.
회의실에 앉은 세 사람 사이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구반장은 손에 든 볼펜으로 책상을 딱딱 두드리며 두 사람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참다못한 혜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반장님.... 오늘 근무 시간에 자리 지키지 않은 건 정말 죄송해요\"
\"죄송한게 그게 다야?\"
\"박순경 데리고 나간 것도.....\"
\"그리고 또?\"
\".........\"
그녀가 말문이 막혀 고개를 숙이자
구반장이 자신이 들고 들어온 종이 뭉치들을 탁자위에 팽개치듯 던지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다 뭐야?\"
구반장의 말에 혜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모두가 팩스들이었다. 혜경이 서울 시경 자료실에 있는 경찰학교 선배에게 부탁 하여 받은
목촌리 출신 주민들에 대한 신상 기록들이었다.
\"이것들 때문에 오늘 경찰서 팩스가 완전히 마비됐어, 알아?
다른 급한 팩스가 하나도 못 들어와서 난리가 났었단 말야! 너, 나 아주 목 짤리게 만들려고 작정햇냐, 작성했어?\"
구반장의 벽력같은 소리에 박호철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으로 변했다.
가슴이 철렁한 것으로 말하자면 혜경쪽이 훨씬 더 했다.
선배가 보내 주기 로 했던 자료가 이렇게 많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어디 한번 내가 납득하게 설명을 해 봐, 이것들이 다 뭔지\"
구반장은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가 마침내 결심한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반장님, 이번 사건을 제가 정식으로 수사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그리고 반장님께서도 절 좀 도와 주십시요.
이번 사건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우리 일입니다\"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 변화에 구반장이 기가 막히는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책상을 쾅하고 내 리치며 소릴 질렀다.
\"그건 안될 말이야. 안된다구, 절대! 안돼!\"
혜경 또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선 더 세게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상부에서도 계속 시경팀을 도와 수사에 협조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분명히 우리 관할내에서 일어난 우리 일인데 왜 안되요, 왜요? 겁나세요? 무서우세요?\"
그러자 이번엔 구반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붉게 상기된 얼굴을 실룩거리며 혜경을 향해 다가왔다. 박호철이 말릴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상황은 더욱 험악한 분위기로 번지고 있었다.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쬐끄만게 이쁘다 이쁘다 하니깐 정말 끝도 없이 기어올라!\"
구반장이 금방이라도 한 대 후려칠 듯 한 기세로 노려보자 혜경도 질세라
두 눈을 똑바로 뜨며 대들 듯 가슴을 내밀었다.
\"저도 더이상은 못 참겠어요. 상관이면 다 예요?
근무 태만에다, 유흥업소 단속은 커녕 돈 받고 봐주기나 하고.... 제가 다 모를 줄 알아요?
경찰 옷만 입으면 다 경찰이예요?\"
그녀의 말에 구반장이 부들 부들 떨면서 박호철을 향해 더듬거렸다.
\"야, 바.... 박순경아, 지... 지금 윤형사가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더듬거리며 말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구반장을 향해 혜경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마, 상관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예전에 제 주먹이 가만 있지 않았을 거예요\"
\"유.... 윤형사님!\"
박호철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그러나 뜻밖에도 구반장은 현기증이 나는지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곤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왜요? 양심에 찔리시나요? 더 얘기해 드릴까요?\"
혜경이 여전히 소릴 지르면서 험악한 기세로 노려보자 구반장이 손을 내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너 잘 났다, 너 잘 난거 아니깐 제발 살살 좀 얘기해라. 귀창 터지겠다. 애가 무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야, 박순경 아, 문 열고 이 여자 얘기 혹시 들은 사람 없나 한번 봐라.
아이구 어지러워, 아이구 머리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박호철이 구반장의 말대로 회의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살피곤 자리로 돌아오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데요?\"
\"확실하냐?\"
\"네\"
\"제....제..... 갑자기 왜 저 여자 이름이 생각이 않 나냐?\"
박호철이 얼른 대답했다.
\"윤형사님요, 윤형사\"
\"그래.... 윤형사, 박순경아, 나 오늘 제 때문에 여러 번 숨넘어갈 뻔 한다.
도대체 윤형사가 뭘 믿고 내가 돈 받고 봐주기 했다는건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박순경아, 넌 이해가냐?\"
\"그럼, 제가 직접 증거를 들어 보일까요? 아니면 증인이 필요 하세요?\"
\"그만!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리 서로 흥분하지 말고 차근 차근 말로 풀자구.
내가 뭐, 특별히 뒤가 캥긴다거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돼.
다만, 정 윤형사가 그 사건을 그렇게 수사 하고 싶으면..... 하라 이거야.
난 단지, 그런 험한 사건에 윤형사 같은 연약한 여자를, 아니, 연약한 여자란 말은 취소하고..... 하여튼 부하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평양 감사도 본인이 싫다면 할 수 없는 거지.
그럼, 더이상 할 말 없지?
난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만 좀 퇴..... 퇴근할 테니까 퇴근 하려면 하고,
남아서 일들 하려면 하라구.
구....굿나잇!\"
구반장이 비틀거리며 회의실을 나가자
박호철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혜경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윤형사님, 정말 대단 하시네요? 저 같으면 꿈도 못 꿀텐데.... 근데 반장 님이 정말 돈 받고 봐 주기 했다는 거 사실이예요?\"
\"그거야 박순경이 알아서 판단 하라구.
난 집에 가서 자료들 좀 더 뒤져봐야 겠어\"
혜경은 회의 탁자에 흩어져 있는 팩스 자료들을 주섬 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조금 심하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왜 이토록 집요하게 이번 사건에 매달리게 되는지 자신도 명확히 알진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목촌리 사건의 이면에는 베일에 가려진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확신이었다.
오늘도 그녀는 도서관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목촌리에서 일어난 괴이한 살인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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