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테잎속의 비밀(3)
"글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알기론 선배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아, 나도 처음엔 그게 미움인줄 알았어.
근데.... 그게 아니었어. 나도 내 자신의 이런 감정을 알고 스스로에게 몹시 놀랐어.
은영씬 나같은 사람이 넘보기엔.... 뭐랄까..... 훨씬 잘 나가는 여자잖아. 그리고 은영씨에게 난 너무 어울리지도 않고....."
강은영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번졌다.
"정말 선배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선배같은 사람이 나한테 그런 감정을 가졌단 말예요?"
강은영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볼때
배영환은 역시 그녀는 자신의 여자가 되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에게도 말로만 듣던 사랑의 아픔이라는 낯선 상처가 찾아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얘기는 전혀 그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선배는 정말 바보예요.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하지 왜 구박을 해요?
좋다고 말하면 제가 딱지라도 놓을 줄 알았어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였던 배영환이 다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사실은 저도 선배한테 뭐랄까....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맨날 구박만 하니까 선배는 저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줄 알았죠"
"저.... 정말이야? 지금 한 얘기가 정말이냐고?"
배영환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은영이 기겁을 하면서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곤 속삭였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우린 지금 갖혀 있다구요.
그리고 바로 옆방에 김 감독님도 있는데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요?"
"아무려면 어때, 차라리 이렇게 갇히게 된게 난 오히려 잘된 일 같아.
안 그랬으면 아마 난 영원히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 했을거야. 고마워, 은영씨. 고마워!"
배영환은 자신과 강은영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유리벽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필경 강은영을 있는 힘껏 껴안고 말았을 것이다.
* * *
모니터를 지켜보던 우일만 박사가 장수사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물리학 분야의 저명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테잎도 가져 오지 못했단 말이요?"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안에 그들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낭패군, 테잎이 있어야 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좀 더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있을텐데.... 손박사 생각은 어떻소?
아직도 목촌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무속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우박사가 질문을 던진 사람은 뜻밖에도
처음 해일이 테잎을 들고 찾아갔던 손남의 박사였다.
"아닙니다. 저 역시 지금은 우박사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밤 그들이 저 사람들을 찾아오겠군요?"
"아마 내 추측이 맞다면....."
"그래도 너무 잔인한 방법이 아닐까요, 이런 식으론?"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오. 이미 달아난 세사람도 마찬가지고.
몇 일 더 버틸 수 있을진 몰라도결국에는....."
* * *
경찰서엔 마침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의경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급한 서류를 찾으러 왔다고 둘러대곤 구반장의 서랍을 뒤쳤다.
구반장의 말대로 그의 서랍속에서는 과연 보통 노트 두께의 서너배는 됨직한 두껍고 낡은 노트가 나왔다.
혜경이 그것을 가슴에 소중히 숨기고 막 사무실을 나오려고 할 때였다.
둘중 고참되는 김한민 수경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윤형사님, 죄송합니다. 지금은 여길 나가실 수 없습니다"
"김수경!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야? 나갈 수 없다니?"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만약 윤형사님이나 박순경님이 돌아오면 잡아두라는....."
"아니, 왜 나를 잡아 두라는거지?"
그러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했다.
"그게....저..... 현재 윤형사님은 살인용의자로 수배중입니다"
"뭐... 뭐라구? 살인 용의자?"
"그렇습니다"
이번엔 뒤에 서 있던 이영운까지 가세하며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손엔 벌써 은빛 수갑이 들려 있었다.
"너.... 너네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꺼야?"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김한민이 이영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갑 채워!"
이영운이 쭈삣거리며 막 혜경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 할 때 혜경의 팔꿈치가 그의 턱을 올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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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이 '욱'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턱을 감싸쥐며 뒤로 물러섰다.
놀란 김한민이 '어....어?'하는 사이 이미 혜경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어떤 자식들인지, 까불지들 말라 그래!
이 윤혜경이를 그렇게 호락 호락하게 봤다간 큰 코 다칠 줄 알라는 말도 꼭 전하라구, 알았어?"
그녀는 하얗게 질린 김한민을 남겨둔 체 날쌔게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경찰서 밖 차안에는 해일과 박호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숨을 몰아쉬며 차안으로 뛰어든 혜경이 소리쳤다.
"어서 출발해요!"
그녀의 소리에 맞춰 해일이 엑셀에 힘을 주자 차는 급한 가속음을 뒤로 하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찾았어요?"
해일이 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네! 근데 아무래도 이곳에 머무는 건 위험한 것 같아요.
이미 우리 세사람에 대해 전국에 수배령이 내린 모양이예요"
박호철이 말도 안된다는듯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가 무슨...."
"지금 그런거 따질 때가 아냐. 서울로 가는게 낫겠어요.
이곳은 바닥이 워낙 좁아서 마땅히 숨을 곳도 없다구요"
해일이 대답했다.
"그럽시다. 테잎도 보고 하려면 나도 이곳보단 서울이 편하니깐....."
그들이 서울에 닿은 것은 밤 9시가 넘어서 였다. 아무래도 집이나 방송국 쪽에는 이미 기관원들이 깔려 있을 것 같아
강남에서 프러덕션을 하는 후배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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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늦은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해일의 후배 이근택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해일 일행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일형, 이 밤중에 무슨 바람이야? 바쁜 사람이 날 다 찾아 오고?"
"여기 혹시 나 찾아온 사람 없었냐?"
"에이... 참 형두..... 여기 형 찾아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근택아, 부탁 하나만 하자. 오늘 나 너네 편집실 좀 쓰면 안되겠냐?"
"방송국 편집실은 어쩌구?"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래. 한번만 좀 봐주라!"
"글쎄..... 좋아, 그럼. 대신 다음에 술 한잔 사야 돼! 나갈때 알지? 그냥 문 닫고 나가면 자동으로 문 잠기니까"
세사람만 편집실에 남자 해일은 서둘러 테잎을 꽂았다. 먼저 볼 테잎은 광속에서 찍은 테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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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란이 굿을 하는 모습이 제일 처음이었다. 그리고 얼마후 그녀가 귀신을 부르겠다며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녀의 이마에 번지르하게 땀이 번질 무렵 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신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사람은 잔뜩 긴장한채 화면을 주시했다. 막 이정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혜경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일이....."
해일이 소리쳤다.
"이 다음 부분을 잘 봐요"
해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광의 안쪽 벽면에서부터 푸른기가 도는 연기 같은 것이 이정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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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오세창의 뭔가 잘못됐다는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박호철이 흥분하여 말했다.
"저게 뭐죠?"
광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오세창이 어서 끌어 내리라며 소리를 지르자
스텝들이 이정란에게 달려 들어 그녀를 끌어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나왔다. 해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땐 정말 장정 네사람이 달려 들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더라구요"
이정란의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가고 스텝들의 우왕좌왕하는 소리도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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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정란을 붙들고 있던 스텝들이 한거번에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고 찢어지는 이정란의 비명쇠와 함께
그녀의 몸이 무엇인가에 물어 뜯기듯 옷 밖으로 붉은 피가 흥건하게 새어나왔다.
+ 박호철은 테잎을 보면서 연신 몸을 떨었다.
"어떻게 저럴수가....."
김혜진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스텝들이 광에서 뛰쳐 나가는 모습이 부분적으로 카메라에 잡혔고
누군가 뛰쳐 나가며 카메라를 건드렸는지 카메라의 앵글이 살짝 돌아가서 이정란의 모습은 카메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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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카메라는 광의 안쪽 벽과 함께 이정란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해일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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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일은 아직도 당시의 섬뜩함이 되살아 나는지 목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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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해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쫓기듯 광에서 빠져 나오자 벽을 비추는
광안에는 이정란의 헐떡이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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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디선가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해일이 긴장하여 소리쳤다.
"바로 이겁니다!"
세사람은 뚫어지게 화면을 쳐다 보았다.
붉은 톤이 도는 광 안쪽 벽에서부터 희미한 안개가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혜경이 소리쳤다.
"그 날밤에도 저런 안개가 있었어요, 그렇죠?"
해일이 대답했다.
"제 친구가 죽기 직전에 제게 전활해서 그랬어요. 안개가 보이면 놈들이 나타난 증거라고....."
안개의 농도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고 뭔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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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하진 않앗지만 세사람은 모두 그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푸른 광채가 도는 눈들.....
그들은 그 끔찍한 짐승의 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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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철이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이예요. 저것들이 어떻게 나타난거죠? 어디서 나타난거죠?"
해일이 그 부분의 테잎을 다시 되감아서 재생시켜 보았지만 놈들은 푸른 빛 도는 안개속에서 서서히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고
마치 광 안쪽 어딘가에 숨어있는 다른 세계에서 바깥 세상으로 달려 나오듯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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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의 뒤쪽에선 해일의 눈을 번쩍이게 하는 바로 그 살인마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놈의 손에는 예의 기다란 막대기가 들려있었다.
윤곽 정도만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지만 해일은 그가 바로 그날밤의 살인마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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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잎은 거기서 끝이 났다. 세사람 모두 충격에 휩싸여 말이 없었다. 한참만에 혜경이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장수사관이 한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군요.
이번 사건이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던 말 말이예요"
해일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요.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벽속에서 저런 것들이 튀어 나올 수 있는지.... 유령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일단 두번째 테잎도 보자구요"
두번째 테잎이 틀어졌다. 해일로선 가능하면 보고 싶지 않은 테잎이었다.
테잎의 시작은 억수처럼 내리는 폭우속에 유령처럼 버티고 선 흉가의 전경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쏟아붓듯 내리는 폭우를 보자 세사람은 금방 간밤의 그 지루하고 끔찍했던 기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해일이 빨리감기로 테잎을 뒤로 돌리자 테잎에는 정신없이 광에서 뛰쳐 나오는 스텝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해일은 거기서 다시 테잎을 재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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