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불타는 세상(1)
총소리와 함께 배영환의 팔뚝을 물어 뜯던 짐승이 '캑' 소리를 내며 힘없이 늘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을 향해 달겨들던 짐승들도 이어진 총성과 함께 동시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병실은 온데 간데 없고 놀랍게도 그들은 깊은 어둠에 잠긴 울창한 숲의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낯선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김감독님!"
자신을 부르는 낯 익은 목소리에
김감독은 지금 자신이 끔찍한 악몽을 꾸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불쑥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정해일PD 였다.
해일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넋이 나간듯 자신을 올려다 보는 김감독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역시 김감독님이 맞으셨군요. 이렇게 다시 만날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또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강은영과 배영환을 바라보며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살아 있었군,
다행이야, 다행!"
해일의 뒤를 이어 낯 익은 또 다른 인물들이 나타났다. 혜경과 박호철이었다.
혜경을 보자 김감독이 더듬거렸다.
"이뿐이형사님,
내가 정말 꿈을 꾸고 있는건 아니겠지?"
혜경이 그녀 특유의 단호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불행하게도.... 이건 현실입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현실!"
배영환이 자신의 팔뚝을 움켜쥐며 다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강은영이 황급히 그의 팔을 부축했지만 어느새 그의 팔뚝은 검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해일이 그에게로 달려 갔을때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고통을 참으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게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현실이란 말이죠? 또다시 그 끔찍한 악몽이 시작된거구?
젠장,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기에 이런 생지옥을 헤매는지 모르겠군"
통증이 심한지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말끝은 다소 울먹이는듯 했다.
강은영이 보다못해 훌쩍거리며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배선배 힘내요. 다 잘 될거예요. 설마 이대로 죽기야 하겠어요?"
배영환을 힘겹게 부축해 일으키며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어떻하면 되죠?"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혜경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 우선은 몸을 숨길 곳을 좀 찾아 봅시다. 놈들이 다시 우리를 찾아 내기 전에....
다른 곳은 몰라도 저번에 주민들이 숨어 있던 그 창고안은 어쩐지 안전할거란 생각이 듭니다.
다들 그리로 옮기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이견이 있을리 없었다.
창고까지 가는 얼마 안되는 거리가 그들에겐 너무나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때마다 어둠속에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짐승들의 눈빛이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그들이 웬일인지 무턱대고 달겨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훨씬 안전해 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 놈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창고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을 주민이 집단으로 자살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창고는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지어진 듯 매우 단단하고 견고해 보였다.
바닥에는 짚을 깔아서 냉기를 막아 주었고 안쪽에 등잔이 매달려 있었는데
기름이 가득 차 있어서 불을 붙이자 환하게 실내가 밝아졌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여섯명의 사람이 그 안에 둘러 앉자 제법 아늑한 느낌까지 들었다. 역시 먼저 입을 연 것은 혜경이었다.
"이곳이라고 놈들에게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겁니다.
하지만 일전에 주민들이 이곳에 피신한 모양새를 봐서 그전에도 자주 이곳으로 피신을 했었던 것 같아요.
좋게 생각해서 놈들한테서 그나마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의견이 없다면 오늘밤 우리 모두의 운명은 이제 이곳에 맡기기로 하죠. 어차피 총알도 거의 없으니까....."
담담한그녀의 목소리에 실내는 침통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특히 박호철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한채 구석에서 몸을 최대한 구부리고 촛점없는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불안하게 떨고 있었다.
배영환은 팔뚝의 상처가 심해서 가까스로 고통을 참고 있었다.
응급처지를 하긴 했지만 출혈이 심해서 이 상태로 얼마간 더 시간이 지속되면 오히려 박호철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강은영은 배영환의 곁에 꼭 붙어서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김감독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짐승들이 신경 쓰이는지 자주 창고문을 흘끗 흘끗 건너다 보며
얼굴에 긴장감을 풀지 못했다.
해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힘겨운 듯 지쳐 보였다.
"우린 지난 몇시간 동안 지금까지 우리가 평생을 겪어온 일들보다 더 많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일들중 어느 하나도 우리의 사고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벽속에서 짐승과 살인마가 튀어 나오고, 사람들은 유령이 되어 버리고, 나이트 클럽의 벽이 사라지고
마침내는 결코 꿈에조차 오고 싶지 않았던 바로 이 목촌리에 또다시 이렇게 모였습니다.
결국 우린 모두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 처럼 죽을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해일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번쩍 들고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입밖으로 내지만 않았을뿐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해일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해일이 가슴속에서 낡은 노트 한권을 꺼내 들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 낡은 노트 한권에 집중되었다.
해일은 그 낡은 노트를 소중하게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가신 구반장님의 노트입니다.
진작부터 읽어 보고 싶었지만 저는 의식적으로 이 노트를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윤형사님과 박호철 순경 또한 저의 이런 마음과 같은 심정이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나 그 또한 제가 구반장님의 노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한번도 그 노트를 읽어 보자는 소릴 하지 않았으니까요.
다들 암묵적인 묵시하에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던 거죠. 왜 그랬을까요?
이 노트안에는 구반장님과 목촌리 마을 주민들,
그리고 제 친구 김한수 기자등 목촌리와 관련되어 죽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적혀 있습니다.
노트를 펼치는 순간 우리 또한 그 안에서 앞서 간 그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우리의 정해진 운명을 보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좀 더 솔직해져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구반장님은 이 일기장 안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대부분이 적혀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결국 우리 모두는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노트를 보고 나면 우린 더이상 삶의 의지를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우리가 이 노트를 열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 얘기에 이의가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십시요"
해일이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강은영은 더욱 서럽게 흐느껴 울었고 김감독은 빨간 불똥이 극에 달할때까지 깊이 담배를 빨아 들이고 있었다.
해일은 크게 쉼호흡을 한번 한 뒤 노트를 펼쳤다.
노트에는 깨알같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었다. 해일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둘러보고
자뭇 엄숙한 느낌마저 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소리내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해일이 노트에 적힌 기록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실내에는 해일의 목소리를 제외하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 이 얘기는 나의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것들과
이후 나를 비롯한 목촌리의 모든 주민들이 겪은 불가사의하고도 끔찍한 비극적 운명에 대한 기록들이다.
전쟁이 끝나자 목촌리에는 전쟁보다 더 가혹한 시련이 찾아왔다.
전쟁중 인민군들에게 가족들을 처형당한 소위 구국 결사대라는 사람들은
목촌리 주민 모두에게 전쟁중 빨갱이들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구실로 사람들을 잡아가 잔혹한 고문과 폭행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겁에 질려 달아나는 주민들을 공비로 몰아세워 무자비하게 처형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전쟁중 인민군들이 그들의 가족에게 했던 것처럼
도망친 주민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가 하면 훈련된 들개들을 풀어 사람들을 해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당시의 혼란한 시기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정부나 경찰들은 오히려 그들의 활동을 호의적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잠을 자고 나면 거의 매일 마을 사람들중 누군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주민들을 비롯한 온 마을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구국결사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마을을 벗어날 수 조차 없었다.
지금의 흉가가 있는 자리가 당시에는 공개처형이 벌어졌던 마을 회관이 있던 자리였다.
찌는 듯 한 어느 여름날,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는 온 대지를 녹여 버릴 듯 그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
마을회관에서는 사상범으로 낙인 찍힌 또 한명의 마을 청년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실내에는 구국결사대 수십명과 이젠 그들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수십마리의 두려운 들개들이
광기에 번뜩이며 가엾은 마을 청년의 자백을 강요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을회관 주위로 불길이 치솟은 것은 고문에 못 이긴 청년이 거의 모든마을 사람들이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자백을 막 끝냈을 때였다.
불길은 100여평 남짓한 마을회관을 에워싸고 삽시간에 치솟아 올랐다.
이글거리는 태양열보다 더한 열기가 주위를 뜨겁게 달구었다.
건물안에서는 차마 듣기에도 참혹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 애원소리가 뒤섞여 이곳이 지옥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불길을 바라보며 불을 지른 마을 이장과 몇몇 청년들은 이 일로 인해 그들에게 가혹한 형벌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가족과 마을 전체를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불길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생각될 즈음 갑자기 어디선가 찢어지는듯한 굉음이 온 마을과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고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천지가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였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불길이 갑자기 안으로 오그라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방의 불길은 그 중심부로 여겨지는 어느 곳인가에 구멍이라도 생긴듯 급속하게 빨려들기 시작했고
불길의 중심부에서부터 생겨난듯한 투명한 공기의 파동,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낯선 현상이 물결처럼 주변으로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고
거의 3시간은 족히 타오르던 불길은 차츰 기세를 꺾으며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불길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간 잿더미 위에는 쾌쾌한 유황냄새가 진동을 했고,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제대로 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일은 그 잿더미 속에서 한명의 구국결사대나 한마리의 들개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수사기관에서는 마을회관의 불을 우연한 화재로 결론지었고 증발한 구국결사대에 대한 수사도
이듬해쯤 되자 차츰 수그러 들기 시작했다.
마을엔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 들었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악몽들은 조금씩 잊혀지고 있었다. -
해일이 거기까지 읽었을때 예기치 못한 서너발의 총성이 창고안에서 울렸다.
해일이 읽기를 멈추고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두려운 눈으로 혜경을 바라보았다.
혜경은 창고안을 돌며 나무로 짜여진 벽에다 연거푸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짐승들이 창고 주위를 둘러싼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창고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으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혜경이 총을 쏠때마다 밖에선 광폭한 짐승들의 울음이 들려왔고 창고안에는 매케한 화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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