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불타는 세상(2)
혜경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이 상태론 아침까지 버티기 어렵겠어요! 주위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집어 들어요.
그리고 놈들이 바닥에서 대가리를 내밀면 가차없이 내려치라구요! 다들 알았죠?"
다부진 그녀의 말에 박호철이 갑자기 딴 사람처럼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까짓 무기로 대항하겠다고? 아직도 몰라요?
밖에 있는 저것들은 유령이라구요. 구반장님의 노트에 써 있는 것처럼
저것들은 벌써 40년전에 죽은 구국결사대와 그들의 들개들이라걸 모르겟어요?
유령과 어떻게 싸웁니까? 놈들은 벽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고 벽을 사라지게 만들기도 하는....
우린 결국 모두 죽고 말거예요. 모두 죽을거라구!"
웃음으로 시작한 그의 말은 울먹임으로 끝을 맺었다.
혜경이 반박했다.
"박순경, 당연히 살기 위해서 이러는 거야.
저들은 절대 유령이나 귀신 따위가 아니야. 자, 다들 창고 주위를 보세요.
놈들이 이 안으로 들어 오려고 안달을 하고 있어요.
이유는 모르지만 웬일인지 저들은 이곳만은 다른 벽이나 건물을 통과했던 것처럼 그렇게 간단히 통과하질 못하고 있어요.
지금 저것들의 모습은 그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순한 짐승들일 뿐이예요.
이제 얼마후면 날이 밝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우린 살 수 있어요.
정PD님은 계속 노트를 읽고 나머지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저를 좀 도와 주세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순 없잖아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럴리도 없겠지만 설령 날이 밝아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고 해요. 내일밤은....
그리고 그 다음날 밤은.... 또 그 다음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요?"
배영환의 외침에 김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팽개쳐져 있던 낫을 움켜잡곤 박호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난 이대로 앉아 당하진 않겠어!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는게 낫지"
김감독의 외침에 강은영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두 차라리 싸우겠어요. 이대로 앉아서 기다리다간 죽기전에 먼저 미쳐버릴 것만 같애!"
박호철이 고개를 떨구곤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그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혜경이 그의 어깨를 감싸쥐며 토닥거렸다. 해일은 자신이 읽던 노트를 박호철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노트를 읽는 정도는 할 수 있죠?"
박호철의 파리한 눈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일은 박호철의 손에 꽉 잡혀 있던 그의 권총을 빼내며 다짐하듯 말했다.
"모두가 살 수 있을 겁니다.
박순경이 계속해서 노트를 읽을 수만 있다면......"
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배영환의 손에도 강은영의 손에도 그럴싸한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짐승들은 사방에서 흙을 파헤치며 바닥으로 기어들어 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후면 바닥 이곳 저곳에서 짐승들이 머리를 내밀 것이었다.
배영환과 강은영이 함께 벽의 한 면을 맡았고
나머지 해일과 혜경, 김감독은 각자 벽의 한 면씩을 맡아서 자리를 잡았다.
짐승들이바닥의 흙더미를 후벼 파는 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릴만큼 위험은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박호철은 해일 대신 구반장의 노트를 다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폐허가 된 마을회관 자리에 기와집이 들어섰다.
마을에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든 것은 그때 부터였다.
집을 지은 사람이 이사 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일가족은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저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한 사람 또는 두사람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라진 사람들은 어김없이 다음날이나 혹은 그 다음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는 예전 구국결사대가 사람들을 처형했던 바로 그 모습대로였고
시체들 중에는 그들이 데리고 다니던 들개의 존재를 짐작케 할 만한 것들도 있었다.
주민들의 가슴속에는 구국 결사대와 들개들의 망령이 되살아 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그들은 실제로 주민들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아직도 불과 몇분전의 일처럼 생생히 그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모든 자연의 법칙과 현실의 상식을 뛰어넘는 믿기 어려운 일이
내가 열다섯살이 되던 바로 그날 밤에 주민들의 눈앞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놈들은 13년전 그들이 불길과 함께 사라졌던 그 모습 그대로 유령처럼 우리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에겐 현실의 시간이 완전히 멈춰 버린 듯 완벽한 모습으로
주민들을 다시 사상범으로 몰아 세우며 마을을 지배하려 했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목촌리는 다시 과거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바로 코 앞에 버티고 있어도 목촌리 주민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어느 누구도 목촌리 주민들을 그들로 부터 보호할 순 없었다.
일부 마을을 떠난 주민들도 그들에게서, 그리고 목촌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아무리 멀리 달아났던 주민이라도 밤이 되면 결국 자신이 헤매고 있는 곳은
바로 이곳 목촌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목촌리 주민들의 운명은 두가지였다.
그들에게 끌려가 처형을 당하던지, 미친 정신병자가 되어 자살을 택하든지.... 사람들은 그들을 저승사자라고..... -
박호철이 마지막 문장을 채 마치기도 전에 김감독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라, 이 더러운 짐승아, 죽어!"
과연 김감독이 맡은 벽면의 맨 구석쪽에서 들개 한마리가 흙바닥에서 막 고개를 치켜들고 몸을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김감독은 손에 들고 있던 낫으로 짐승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기 시작했다.
"감히 어딜 들어와! 네깟 놈들이 감히 어딜 들어와!"
짐승의 검은 머리는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었고 김감독은 있는대로 악을 쓰며 낫을 휘둘러 댔다.
짐승의 머리가 힘없이 축 늘어진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이번에는 해일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해일의 쪽에선 두마리가 동시에 땅속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것들은 푸른 빛이 도는 광기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마리는 거의 땅에서 몸을 빼낼 뻔 했다.
그리고 그것은 끔찍한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다.
벽의 사방에서 짐승들은 머리를 치켜들었고 창고안은 비명소리와 총성,
그리고 짐승의 으르렁거림등으로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모두가 정신없이 사면으로 짐승들과 싸우는 사이 박호철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혜경이 고개를 돌렸을때는 이미 박호철의 몸이 절반쯤 짐승에 의해 바닥에 난 구멍으로 끌려 나가고 있었다.
"박순경!"
혜경이 악을 쓰며 쓰러지듯 그의 다리를 붙잡고 몇초간의 실랑이 끝에 다시 위로 잡아 올렸을때는
이미 그의 머리의 절반은 짐승의 입속에 있었고
그의 머리를 물고 있는 짐승은 혜경의 존재는 아랑곳 없다는 듯 탐욕스럽게 자신의 할 일에 충실하고 있었다.
혜경이 비명을 지르며 총구의 방아쇠를 당겼고
총성은 한발, 두발.... 총알이 떨어져 더이상 총성이 들리지 않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그녀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를 뜯어 말린 것은 해일이었다.
그는 박호철의 시체를 보곤 고개를 돌렸고 혜경은 미친 듯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혜경이 해일의 손을 뿌리치며 죽은 짐승의 머리를 권총으로 다시 내려치며 악을 썼다.
"다 죽여 버릴거야, 모두 다!"
"윤형사! 정신 차려요! 이래선 안되요!"
"놔! 놓으란 말이야! 저리 비켜!"
그때 해일의 재빠른 손이 그녀의 따귀를 세차게 후려쳤다.
그녀가 흠칫하며 해일을 올려다 보았다.
해일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 들어요, 윤형사! 박순경은 이미 죽었어요.
그리고 이 상태라면 잠시후 우리 모두 박순경과 마찬가지로 죽고 말거요.
내게 한가지 방법이 있어요. 우리 불을 지릅시다.
저기 창고문을 박차고 나가 닥치는대로 불을 지릅시다. 짐승들이니 불을 두려워 할거요!"
해일의 간절한 눈빛이 혜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경의 눈빛이 잠시 동요한다 싶더니 이내 그녀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그들의 등뒤에서 다시 강은영과 배영환의 비명이 들렸다.
배영환이 짐승 한마리와 뒤엉켜 뒹굴고 있었다.
강은영이 함께 짐승에게 달겨들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도와줘요! 어서요! 도와줘요!"
해일은 지체없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바닥에 가득 쌓여있는 짚더미를 한웅큼 움켜잡고 불을 붙였다.
마른 짚더미는 순식간에 불길을 빨아 들였고 그는 짚더미를 배영환에게 달겨든 짐승에게 휘둘렀다.
짐승은 타오르는 불길을 보자 배영환에게서 떨어져 구석으로 몰렸다.
그리곤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하려는듯 털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렸다.
짐승의 푸른 눈동자에선 붉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다들..... 짚더미를 벽면을 몰아요.
가운데 공간과 출구쪽만 남겨두고 나머지 짚더미는 모두 벽면으로 몰아요!"
해일의 외침에 김감독과 혜경이 허겁지겁 바닥에 짚들을 긁어서 창고의 주변으로 밀쳐냈다.
그러나 배영환은 온 몸이 피범벅이 되어 움직이질 못했다.
강은영과 김감독이 가까스로 그를 실내의 가장자리로 끌고 왔다.
일행은 모두 가운데 흙바닥 위에 모여 있었고 주변으로는 짚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짚더미 위로 여기저기 짐승들이 고개를 들이 밀었다.
해일은 주위로 쌓여진 짚더미에 불길을 던졌다.
순식간에 불길이 번져 나갔다.
놀란 짐승들이 캑캑거리며 그들이 고개를 내밀었던 그 구멍을 통해 다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뜨거운 열기가 타올랐다. 해일이 소리쳤다.
"다들 옷을 벗어서 막대에다 말아요. 그리고 거기다 불을 붙여서 이곳을 나갑시다.
밖으로 나가서는 닥치는대로 불을 질러요. 아예 이 저주받은 목촌리와 저 짐승들과 살인마를 모두 불로 태워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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