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르르륵
또르륵
후우우..
화창한일요일아침,나는책상앞에걸터앉아한손으로
10분째4B연필을굴리고있는중이다.
한창청춘을불태울대학교3학년이뭐하는짓이냐..라고물으신다면미안한일이지만,지금부터내가해야할일은그런것과는거리가멀다.하지만해야하는일이기때문에,반드시.
시작은아침6:30에온전화한통이었다.
여보세요..?
어,엄마?
응,정우야.아침일찍부터이런얘기해서미안하지만,오늘이할머니생신이시거든?엄마아빠는일이있어서할머니댁에찾아뵙지못할것같으니까네가좀갔다오렴.
응?!갑자기그게무슨말이야?
여기서거기까지얼마나먼지생각해보고하는말이야?!
서울에서전철타면금방갈수있잖니.좀부탁할게~끊어~.
자,잠깐!엄마~!
뚜ㅡ뚜ㅡ뚜ㅡ
...아..
멍미?!
..갑작스럽게걸려온전화.
주말이라친구들과약속도있었지만거절할수없었던이유는단지엄마의막무가내성격만이아니었다.할머니란나에게..매우특별한존재이기때문이다.
나의할머니는이상한분이었다.젊었을땐한국최초의과학기술을배운여성으로손꼽혔었고,해외에여러분야로유학도다니시면서풍부한지식을쌓으셨다.그러가가미국의한무기제조업체에몸을담으셨고,나이가들어은퇴하시면서한국으로돌아와나를돌봐주셨다.이런엄청난할머니를둔탓인지나는어려서부터과학을좋아했었다.지금도어릴때할머니가들려주시던우주선이야기가떠오를정도이다.결국,그림에소질이있어미대에진학하긴했지만,나의어린시절은할머니의과학이야기로빼곡히채워져있다.
하지만..벌써뵌지5년도더됐네...
꼭가봐야겠다고마음을먹었다.그래,할머니께훌쩍성장해어느덧대학생이된손자의모습을보여드려야지..
짐을싸야겠다.
여기서할머니가계신시골까지는기차를타고4시간정도는가야하기때문에하루만에돌아오는건무리다.하룻밤정도자취방이아닌곳에서자보는것도나쁘지않겠지.좋아,가자.
오랜만에나와본서울역.
역시나엄청나게붐비는인파로발걸음을옮길수가없다.
힘들게겨우겨우표를사고기차에올랐다.
기차가출발합니다.
피슈ㅡ우ㅡ욱
덜컹
덜컹
덜컹덜컹
아~살거같다.
달리는기차안에는사람이많지않아한적했다.자리에앉아옆에짐을털썩내려놓고뒤로기대었다.오랜만에타보는기차.
어릴적엔명절때마다이런기차를타고고향으로내려갔었지..
반대쪽창밖으로스쳐지나가는풍경들이나를향수에잠기게한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
한30분쯤흘렀을까.
더이상바깥으로고층건물이보이지않는다.무성한초목이끝없는숲을이루고있을뿐.가면갈수록도시가사라져간다.
역에서사온새우깡을뜯어옆에놓고하나씩집어먹었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치이이익ㅡ
응?..
이어폰을빼고눈을떠보니열차를연결하는문이열리고있다.
사람들에가려누가들어오는지는잘보이지않았지만,연신가는목소리로스미마셍을연발하며이쪽으로다가오는걸보니외국인여행객같다.
아야!발을밟았잖아!
스미마셍~죄,죄송합니다~..
어,한국말을할줄아나보네.
발을밟힌듯한사내가의미심장한말을하더니언성을높이기시작했다.
이봐,이구두어떻게할거야?당신때문에완전히찌그러져버렸잖아!
미,미안해요..난모르고..
미안하다면다야?!
이런,외국인이라고일부러그러는것같다.
이구두는말이야,내가작년에유럽갔을때50만원주고사온거야!당장물어내지못해?!
에?아,저,저기..미안합니다..
참나.이게보자보자하니웃기는년이잖아?!딱보니까불법체류중인것같은데,신고한번당해보고싶어?"
상황이험악해지고있다.어서말려야..!
그쯤해두시죠.외국인을상대로너무하시는것아닙니까?
넌또뭐야?!
손해배상은제가대신해드리겠습니다.저여자분은그만괴롭히십시오.
어디선가갑자기나타난말쑥한복장의남자가말했다.
자,여기50만원있습니다.
툭
남자가옆의의자에내려놓은것은지폐다발이었다.
시비를걸던남자는잽싸게돈을집어들더니액수를확인했다.
그리고나선상대를위아래로훑어보더니,
흥,뭐야.20만원부족하잖아!공항에서세금을떼어가는바람에사실상70만원은하는거라고!
말이너무심하잖아?!
..그정도로만족하고사라져주시는게좋을텐데요.당신이신고있는구두,국내업체가만든것아닙니까.그것과똑같은제품을여기제비서가신고있습니다만.
말하는이의뒤로거구의남자가다가왔다.
크..허억..!사,살려줘..
남자는겁에질려안색이창백해지더니,돈을안주머니에쑤셔넣고옆의칸으로허둥지둥달려갔다.몇몇사람들이그멋진신사에게환호를보냈다.나도손에난땀을닦으며박수를쳤다.
이야ㅡ,아주속이다시원하네!
젊은사람이보통내기가아닌데그래?!
남자는미소를짓더니,거구의남자에게뭐라고몇마디하고는자리로가서앉았다.
..휴우ㅡ.
남자인내가봐도멋있다.그일본인여자는그에게반하기라도하지않았을까?..
어라?
주위를둘러보았지만,그녀는보이지않았다.
또다시옆의칸으로이동한걸까?
...이상한일이었다.그렇게예의바른여자가.
뭔가급한일이라도있었을까...
잘모르겠다.다시몸을기대고눈을감았다.
나는금방잠이들고말았다.
주위가소란스럽다.
무슨일이지..?
스피커에서뭐라고안내방송이나오고있는데,잘들리지않는다.
고개를흔들어잠을깼다.
승객여러분께안내말씀드립니다.현재기차는목적지점까지
반정도남은곳에있습니다.다음역에서20분간정차할예정입니다.다시한번안내말씀드립니다.현재기차는...
쉬었다갈거라고..?잘됐다.과자도떨어졌는데,바람이나좀쐬고와야지.
자리에서일어나다른사람들사이로줄을섰다.다들피곤한기색이었다.열차안의공기가무겁게느껴졌다.
덜컹덜컹
덜컹
덜컹
기차가속력을점점줄이더니,이윽고역앞에멈춰섰다.
피슈우ㅡ우ㅡ욱
문이열리자사람들이물밀듯이빠져나갔고,나도그틈에끼여있었다.
보자,편의점이..
툭!
아야!
엇,죄송합니다.
괜찮아요..앗,당신은아까그!
나의앞에는아까그멋진신사가미안해하며서있었다.
예?아,아까절유심히보시던분이군요.반갑습니다.
전삼성..
아뇨,저..유심히본게아니라..
삼성인공지능부서장신강민이라고합니다.같은길인데,말동무라도하면서가도록하죠.
..이사람..분명히아까내말을..씹었다..
아니,그보다일행이있을텐데?
예?일행분들이계시지않아요?아까비서분도있고.
하하하..사실그분은초면이었습니다.제가우연히두사람의구두가똑같다는사실을발견하고도움을구했던거예요.
네?!
방금뭔가아주충격적인말을들은것같은데..?
이제보니이사람코난이잖아?!웬과학자?
..뭘그렇게놀라세요.홈즈도자주써먹는방법인데.아니,루팡쪽인가.하핫.
어안이벙벙해져있는나를보며그가털털하게말했다.
이미지와는다른인간미가이사람을뭔가신비스러운존재로만든다.
재미있는사람을만난것같아..
뭐,맛있는거라도먹으러가죠?
아,예.
우린편의점에들러과자와음료를샀다.이사람도나처럼과자를좋아하는구나.
기차에올라타자리를잡고앉았을때내가강민씨에게물었다.
그런데강민씨는어디로가시는중이죠?
그러자그는잠시멈칫하더니,
..조금외딴곳에있는섬에가는길입니다.잘모르실수도..
?!혹시..
백령도아닙니까..?
어,알고있어요?그섬을?
저희할머니댁이거기있거든요.지금가는곳이에요.
그래요?허..이거참.
이런우연도다있군요.
저도그곳으로가는겁니다.
역시..!이거잘됐네요!
그뒤로백령도에도착하기전까지우리는많은이야기를때로는열띤토론식으로,때로는농담으로나누었다.강민씨는어떤인공지능기술연구소의소장인데,잠시휴양차섬으로가는것이라고했다.
우연히만나는인연을가벼이여기지마.
인연은우연이전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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