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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대중이 맞습니다.
그런데 정식 남편이 죽고 난후 남편의 형하고 붙어 먹어서 난 자식이죠.
그게 김대중 잘못이겠냐 만은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저 내용은 국제 저널리스트인 손충무씨의 김대중 X파일 탄(김일성의 꿈은
김대중의 남조선의 대통령 만드는 것이었다)책에 나오는 내용이고요
그 밖에 엄청난 사실이 기술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사실 중에는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권오석 사위인 노무현을
대통령 만들어라라고 지령을 합니다.
그 지령을 받은 김대중은 전자개표기로 노무현을 대통령 만들었다 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김정일의 최소한 재가를 받아야 하는 둣...
이제 김대중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거짓말과 진짜는 어떤 것이었나를 한번 살펴보자.
ㅡ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후광 (後廣) 김대중 선생은 본관이 金海 이시다. 아버지는 김운식 공이고 어머니는 장수금 여사이며 1924년 1월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에서 태어나셨다ㅡ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멀쩡한 거짓말이다. 김대중은 자신을 만들어준 진짜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私生兒(사생아)이다. 지금 같으면 DNA 검사를 해보면 간단 하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로 되어 있는 김운식은 김대중이 7살 때 자신의 호적에 첩의 아들로 이미 7년 전에 태어난 庶子로 올려 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고 먼 훗날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대중의 호소로 본부인과 이혼하고 4일 후 김대중의 어머니와 바로 결혼 정식, 정부인으로 올려 김대중을 嫡子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張齒島-후에 장수금으로 개명)씨는 18살 때인 1911년 같은 옆 섬 마을에 사는 제갈성조(諸葛成祚) 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딸 2명을 낳았다.(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초본)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하자 제갈성조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과부가 된 젊은 제수씨를 위로 해주기 위해 자주 동생 집을 방문하다가 비밀리에 육체관계를 가졌으며 아이를 임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여러 증언과 기록에서 나온다.
인구 1천 여명 정도의 좁은 섬 마을에 젊은 과부의 배가 불러오자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갈성복은 장노도 여인이 출생한 건너편 섬인 뻐리섬으로 이사를 보내면서 친구인 윤창언(尹昌彦) 에게 중매를 서는 것처럼 하여 동거를 시켰다. 윤창언은 본래 농악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인과 사별한 후였다.
동거를 한지 얼마 안되어 출생한 것이 사내아이였다. 그의 이름을 윤대만(尹大萬-또는 윤성만)이라고 불렀다. 그가 훗날 김대중이로 변한다. 윤대만 이가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가 되는 장도산이 조산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윤창언씨의 조카 윤일만 경찰관 증언, 공화당 조사 팀 조사 기록)
그 2년 후 장노도는 다시 사내아이를 출생했다. 그는 윤창언과 사이에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윤대의(尹大義) 라고 불렀다고 한다.
몇 년 후 윤창언도 사망했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는 졸지에 딸 2명 아들 2명을 길러야 하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녀가 어려울 때 김대중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한때 동거했던 시숙 제갈성복이 돈을 내어 뻐리섬 선창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
그 주막집에 큰 섬을 돌면서 발동선을 이용 방물장사(생활용품 장사)를 하러 자주 섬에 오던 김운식(金云植) 씨와 동거를 하다가 윤대만이 7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호적이 필요했다.
당시 뻐리섬에는 초등학교가 없었고 서당만 있었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본 섬인 큰 섬으로 가던지 목포로 가야만 했다. 장노도는 뻐리섬의 재산을 정리, 목포로 옮겨 가서 여관을 경영하면서 김운식의 호적에 첩으로 올라간다.
당시 호적에는 본부인 외에 제1첩 ?제2첩을 호적에 등재했으며 첩하고 사이에 출생한 자녀들은 서자(庶子-첩이나 외부에서 외도를 하여 얻은 자식)로 올렸다.
1924년(단기 4257년) 7월 7일 윤대만이 김대중(金大仲) 으로 이름이 바뀌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등재되었다.(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
당시 김운식에는 본부인 김순례(金順禮)가 있었으며 그사이에 아들 대봉, 딸 매월, 안례, 용례 등 1남 3녀가 있었다.
목포 北국민학교(초등학교)와 목포상고를 거쳐 6,25 전쟁 후 부산 피난 건국대학교 야간부 2학년을 다니다가 목포에서 1954년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제갈대중이 맞습니다.
그런데 정식 남편이 죽고 난후 남편의 형하고 붙어 먹어서 난 자식이죠.
그게 김대중 잘못이겠냐 만은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저 내용은 국제 저널리스트인 손충무씨의 김대중 X파일 탄(김일성의 꿈은
김대중의 남조선의 대통령 만드는 것이었다)책에 나오는 내용이고요
그 밖에 엄청난 사실이 기술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사실 중에는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권오석 사위인 노무현을
대통령 만들어라라고 지령을 합니다.
그 지령을 받은 김대중은 전자개표기로 노무현을 대통령 만들었다 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김정일의 최소한 재가를 받아야 하는 둣...
이제 김대중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거짓말과 진짜는 어떤 것이었나를 한번 살펴보자.
ㅡ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후광 (後廣) 김대중 선생은 본관이 金海 이시다. 아버지는 김운식 공이고 어머니는 장수금 여사이며 1924년 1월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에서 태어나셨다ㅡ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멀쩡한 거짓말이다. 김대중은 자신을 만들어준 진짜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私生兒(사생아)이다. 지금 같으면 DNA 검사를 해보면 간단 하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로 되어 있는 김운식은 김대중이 7살 때 자신의 호적에 첩의 아들로 이미 7년 전에 태어난 庶子로 올려 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고 먼 훗날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대중의 호소로 본부인과 이혼하고 4일 후 김대중의 어머니와 바로 결혼 정식, 정부인으로 올려 김대중을 嫡子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張齒島-후에 장수금으로 개명)씨는 18살 때인 1911년 같은 옆 섬 마을에 사는 제갈성조(諸葛成祚) 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딸 2명을 낳았다.(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초본)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하자 제갈성조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과부가 된 젊은 제수씨를 위로 해주기 위해 자주 동생 집을 방문하다가 비밀리에 육체관계를 가졌으며 아이를 임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여러 증언과 기록에서 나온다.
인구 1천 여명 정도의 좁은 섬 마을에 젊은 과부의 배가 불러오자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갈성복은 장노도 여인이 출생한 건너편 섬인 뻐리섬으로 이사를 보내면서 친구인 윤창언(尹昌彦) 에게 중매를 서는 것처럼 하여 동거를 시켰다. 윤창언은 본래 농악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인과 사별한 후였다.
동거를 한지 얼마 안되어 출생한 것이 사내아이였다. 그의 이름을 윤대만(尹大萬-또는 윤성만)이라고 불렀다. 그가 훗날 김대중이로 변한다. 윤대만 이가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가 되는 장도산이 조산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윤창언씨의 조카 윤일만 경찰관 증언, 공화당 조사 팀 조사 기록)
그 2년 후 장노도는 다시 사내아이를 출생했다. 그는 윤창언과 사이에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윤대의(尹大義) 라고 불렀다고 한다.
몇 년 후 윤창언도 사망했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는 졸지에 딸 2명 아들 2명을 길러야 하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녀가 어려울 때 김대중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한때 동거했던 시숙 제갈성복이 돈을 내어 뻐리섬 선창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
그 주막집에 큰 섬을 돌면서 발동선을 이용 방물장사(생활용품 장사)를 하러 자주 섬에 오던 김운식(金云植) 씨와 동거를 하다가 윤대만이 7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호적이 필요했다.
당시 뻐리섬에는 초등학교가 없었고 서당만 있었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본 섬인 큰 섬으로 가던지 목포로 가야만 했다. 장노도는 뻐리섬의 재산을 정리, 목포로 옮겨 가서 여관을 경영하면서 김운식의 호적에 첩으로 올라간다.
당시 호적에는 본부인 외에 제1첩 ?제2첩을 호적에 등재했으며 첩하고 사이에 출생한 자녀들은 서자(庶子-첩이나 외부에서 외도를 하여 얻은 자식)로 올렸다.
1924년(단기 4257년) 7월 7일 윤대만이 김대중(金大仲) 으로 이름이 바뀌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등재되었다.(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
당시 김운식에는 본부인 김순례(金順禮)가 있었으며 그사이에 아들 대봉, 딸 매월, 안례, 용례 등 1남 3녀가 있었다.
목포 北국민학교(초등학교)와 목포상고를 거쳐 6,25 전쟁 후 부산 피난 건국대학교 야간부 2학년을 다니다가 목포에서 1954년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홍어비추눌르고튀튀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