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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ㅁㅎ 장인 (권오석) 이야기권오석에 의해 학살된 양민 유족 중에 변재환 박사(58세)가 있다. 그는 “권오석에 의해 살해된 유족회”의 대표다.그는 권오석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權오석씨는 태생부터 장님은 아니었다. 막걸리를 공업용 알콜?에 섞어 마시다가 실명된 것이다. 실명한 權은 6.25가 일어나기 전인 1948년에 남로당에 가입했다. 당시 우리 숙부님인 변백섭은 면장이었고 권오석은 면서기였다. 권씨는 사상관계로 의심을 받아 다른 면에 있다가 쫓겨 와, 변백섭 면장 밑에서 일을 하게 됐다. 이후 6.25가 나자, 권오석은 창원군 진전면의 치안대장이 되었다.


눈이 먼 권씨는 동네 사람들의 손바닥을 만져보고 사람을 죽일지 살릴 지를 등급별로 판정했다.\"


2002년 5월 3일,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ㅁㅎ은 장인의 묘소에 참배를 하면서 “장님(장인 권씨)이 부역을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 “조금 가담하고 더 가담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국민을 속인 것이다.


같은 시기에 권ㅇㅅ은 아버지 권씨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때 나는 어려서 부모님 일은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태생이 장님인 사람은 혼자서도 잘 다니지만, 후천적으로 실명한 권씨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권씨의 경우 장님이 된지 얼마 안 되었고 남편이 양민을 등급별로 손으로 판정하고 있을 때, 옆에서 부축했던 사람이 바로 노ㅁㅎ의 장모였다.


노ㅁㅎ 부부의 거짓말에 대해 변씨는 이렇게 반박한다.“장모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말이 되나. 나는 권양숙씨와 동갑이다. 나도 아버지를 통해 숙부님의 학살사건을 낱낱이 듣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어렸다는 이유로 모른다는 것인가? 더욱이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당시 권양숙은 15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왜 감옥에 갔는지 들었을 것 아니냐? 우리가 알고 있는 3.1운동이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아서 안 것은 아니지 않나.”


“학살당한 11명의 유족들은 궁핍하게 살았다. 6.25 이후 부모 두 사람이 있어도 어려운 살림인데 아버지 없이 산 유족들은 그야말로 피눈물 흘리 는 세월이었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했더라면 유족들은 부모형제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을지 모른다. 노무현 부부와 장모는 죄 없이 죽은 11명의 양민들을 위해서라도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사과해야 한다”


권오석의 좌익 부역활동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대검찰청이 발간한 ‘좌익사건 실록’에 있다. 피해자측 증언들에 따르면 권오석은 일제시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면서기로 일했을 정도로 똑똑해서 양민을 학살하기로 결정한 인민 재판에서 검사, 변호사, 판사 역할 등 1인 3역을 한 유일한 재판관이었고, 그의 말 한 마디로 양민의 생사를 가름하였다고 한다. \'실록\' 책자에는 권오석이 죽인 피해자가 9명으로 돼 있다.그러나 피해자 측 주장은 11명이다.


卞百燮(4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卞先燮(34,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卞曾燮(3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金玉甲(5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金万祚(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시락리金聖甲(46, 농업) 창원군 진전면 창포리朱正浩(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봉암리朴宗洙(51, 區長)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朴周漢(47, 농업)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鄭奉柱(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광촌리權五乾(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피해자 유족의 주장 중에는 권오석이 얼마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기에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당 선전부장으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또 치안대가 되었겠는가?


눈이 멀쩡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시각장애인을 간부로 기용한 사실은 권오석의 좌익사상이 투철하였고 좌익활동에 적극적이 었음을 방증하고 있다고 한다
송정호 법무장관은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양민학살로 수감 중이던 권오석이 자유당 정부 시절인 1956년 폐결핵 등의 질병 때문에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고, 5.16 이 나기 두 달 전인 1961년 3월27일 재수감됐다」는 요지로 답변했다.


김일성이 죽기 전 남조선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들과 의형제, 그리고 막내동생과 그리운 여인. 이들 4명을 가장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은 일본의 左派 거물 정치인 故 우스노미야 參의원과 김일성 사이에 1974년 9월 평양 대동강 별장에서 2박3일 회담을 하고 남긴 \'김일성-우스노미야 단독회담 보고서\'라는 비밀 보고서가 일본 공안 조사청 지하실과 평양 김일성 궁전 비밀금고에 남아 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우스노미야 를 통해 \"우스노미야 선생과 나는 형제간 이고 내가 2살 더 많으니 형이 되는 셈이지요.
또 아우님과
남조선의 김대중이 형제지간 이라고 하니 우리는 3형제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 3형제가 손을 잡으면 아시아에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우님께서 일본 총리가 되시고 막내 아우님인 김대중이 남조선 대통령이 되면 우리 3형제가 손을 잡고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항, 큰소리 치는 아시아 의 龍이 될 것 입니다\" 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또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韓完相 대한적십자 총재이며, 그가 그토록 그리워한 여인은 前 YWCA 총재를 지낸 孫寅實 여사였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를 넘어서\' 를 보면 손인실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상당부분 묘사돼 있는데 한때는 남조선으로 밀사를 보내 북한으로 탈출시키려고 까지 했었다.


그 다음으로 꼭 만나고 싶어한 - 평양으로 탈출까지 시키려 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북한 로동당·빨치산 혁명투쟁 교육시간에 등장하는 \'남조선 남로당 권오석 동지의 투쟁사\'의 그 권오석이다.


권오석 동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임에도 6.25 민족 통일전쟁(?) 에 앞장서 남조선 반역자들을 가려내 처단하는데 혁혁한 攻을 세웠으며, 馬山지구 전투에서 미군 몇 명을 포로로 잡아 오는데도 큰 功을 세웠다.


그는 패전 후 이승만 정권에 체포됐으나 끝까지 사상 전향을 하지 않은 채 북조선 조국을 배신하지 않겠다며 감옥 안에서 최후를 맞은 영원히 수령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남조선 빨치산 투쟁 영웅\' 이었다. 그 위대한 \'남조선 빨치산투쟁 영웅\'의 사위가 남조선 대통령이 되고 그 딸이 청와대 안주인이 되어 입성 하는 날, 평양 방송은 며칠 동안 권오석 동지의 공로와 그 영웅의 사위와 딸이 남조선 대통령이 된 사실을 방송하며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의 정신이 승리했다\'고 열 올리며 광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