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5.115) 2020.04.06 11:30:44

작성자-Nemuru_machi




내 이름은 김재하. 사실상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고등학생이다. 올해로 2학년이고, 벌써부터 수능 준비한다고 바쁜 보통 고등학생.




성적이 뛰어나지도, 운동신경이 좋지도, 잘 생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교우관계는 좀 좁은 편에 속했다.




어딘가의 만화나 소설 주인공처럼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야자 때문에 학교에서 거의 14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내는 그런 학생이지.








나에겐 10년 지기 친구가 하나 있다.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알았던 녀석인데, 벌써 10년인가.




녀석은 꽤 호탕하다. 털털하고 나보다 운동신경이 좋아서, 지금은 농구부에서 에이스로 뛰고 있다.




그리고 여자애들에게도 인기가 많아서. 발렌타인 데이때는 처리하지도 못할 양을 받아서 혼자 다 쳐먹는다.








"뭐하냐?"








내 앞에서 태평하게 소시지빵을 먹으면서 바라보는 이 녀석 말이다.




봄의 햇빛 아래에서 태평하게 느긋한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저 좋은 스펙을 타고 태어났는데, 저 미남 얼굴을 그렇게 쓸거라면 나 줘. 어차피 너 여자잖아?








"뭐하냐니까?"








그렇다. 내 10년지기 친구는 여자다. 시원하게 자른 단발. 꽤나 신경쓰는지 선크림을 발라둔 흰 피부.




봉긋하게 부푼 가슴과 선이 가는 팔과 다리. 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다리엔 감색의 스타킹이 신겨져있다.




여러모로, 정확하게 내 취향을 꿰뚫는 옷차림이다.








"그냥 이것저것 잡생각."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에게 대충 대꾸해줬다. '사실은 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말하기엔 쪽팔리기도 했고,




그리고 이 녀석과 나는 한 번 고백받은 쪽과 차인 쪽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냥 친구로는 안되냐고 말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뭐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인게 잘못이었다.








"시시한 놈."








그 때 연을 끊었어야, 이렇게 미련갖지 않았을 텐데.








"선배랑은 잘 되가냐?"








"오냐."








질투심인가, 가슴 한구석이 꾹 조여온다. 아마도 질투라고 생각한다. 한 학년 위의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도와달라고 하길래..




결국엔 이어줬지만. 솔직히 말해서 후회했다. 내가 왜 도와줬을까하고.








매년 생일을 서로 챙기던 것도 녀석쪽에서 부담스러워해서 올해는 넘겨버렸다.








"야, 이번 주말에-"








녀석이 뭔가 이야기 하려고 할 때, 그 말을 가로 막듯이 다른 놈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학년 위인듯 붉은 명찰을 찬 여선배가 내 쪽을 똑바로 보고있었다.








"야, 할 말 있으시다는데?"








내가 윗학년에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남자라.. 저런 미인 선배는 모르는데 말이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선배에게 걸어갔다.








"야, 어디가냐?"








뒤에서 날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너 또 주말에 데이트 가는거 자랑할 거잖아.




대충 녀석의 목소리를 씹고 선배에게 다가갔을 때 선배쪽에서 내 쪽에 편지를 내밀었다.








"어.."








"나, 너 좋아하는데.... 그 이거 줄테니까 보고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붉어진 얼굴로 이쪽에 편지를 내밀어 왔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제야 이 사람이 누군지 생각이 났다.




가끔 혼자서 무거운 짐을 나르길래 몇 번 도와웠는데, 그걸로 꽤 호감을 받은 것 같았다.








"뭐야, 이 새끼 고백 받았다!"








가까이서 보고있던 놈이 교실에 폭풍같은 사실을 털어놨고 선배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뛰어서 사라졌다.




다른 놈들의 질문 공세 속에서 나는 무심코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창백해진 얼굴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 * *








"아, 존나 지친다."








당이 땡긴다. 빌어먹을 새끼들, 고백 하나 받은 걸로 거의 취조 수준으로 심문해 오는데 매 쉬는 시간 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해서 엄청 피곤하다.




야자하기 전에 저녁을 먹고 와야 배 안이 든든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녀석이 내 쪽을 바라봤다.








"..같이 먹을래?"








녀석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선배랑 사귀게 된 이후로 나랑은 점심시간에도 제대로 같이 안먹는 주제에,








"김 선배 기다려. 남자친구님하고 같이 드시지 그러세요?"








대충 평소처럼 톡 쏘아서 거절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식당은 갔다가 체하기 딱 좋겠고(주로 녀석과 그 남자친구 때문에).




오늘도 대충 빵으로 때워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을 뒤로 하고 교실을 나섰다.








"저기."








한참 걷다가 날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봤다. 오늘 내게 고백해온 선배가 조용히 도시락통을 들고 서 있었다.








"선배 급식 안드세요?"








"원래 먹는데, 너 급식 안 먹길래.."








"그건 제가 좀 죄송한데요.."








조금 부담스럽네 이거. 사실 난 이 사람을 잘 모른다. 이 사람도 날 잘 모를거고. 그냥 단순히 몇 번 마주쳐서 도와준 정도로.




내 모든 성격을 알 것 같다고 판단한 걸까? 누군가 날 좋아해주는건 기쁘지만, 가급적이면 제대로 날 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죄송해요. 밥보단 빵파라."








"펴..편지는 읽어 봤어?"








아.. 잊고 있었다. 내용을 훔쳐보려는 놈들이 좀 많았어야지. 말은 안해도 녀석도 내 편지를 읽어보고 싶은 눈치였고.








"죄송해요 아직.."








"아냐, 그 천천히 읽고 대답해줘. 근데.. 진짜 같이 안 먹을거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기 죽은 얼굴로 사람을 바라보는게 이렇게 사람을 위축시키는 일이었나 싶은데.




뒷 머리를 머쓱하게 긁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








고개를 끄덕이고 선배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요?"








"내가 좋은 곳을 아는데.."








선배가 내 팔을 끌어 안고 팔짱을 꼈다. 그리곤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나를 유도했다.




사귀지도 않는데 팔짱을 껴온건 둘째치고, 팔에 가슴의 부드러운 감각이 그대로 남는게 문제다.




내 주니어, 정신차려라. 이건 단순히 장소를 안내해주는 거다. 여기서 섰다간 천년의 사랑도 식어버릴거다.








"여긴데."








한참을 끌려가서 도착한 장소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앞 뜰의 벤치였다.




달빛이 그대로 비추는 곳이라 꽤나 운치가 있었다. 선배는 자신도 벤치에 앉아,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리며 내가 앉을 것을 요구해왔다.




엉거주춤하게 벤치에 앉으니, 선배가 도시락 통을 열고 젓가락을 반찬을 하나 집고 있었다. 소시지다. 칼집을 내서 구운건지 약간의 기름 냄새가 소시지에서 맡아졌다.








"아~"








그대로 이쪽을 향해 젓가락으로 집은 소시지를 내미는 선배를 보며 뭔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난 단순히 혼자 그 무거운 짐을 나르는게 불쌍했을 뿐인데. 선배 입장에선 그걸 호의로 여겨주고, 내게 이것저것을 부딫혀온다.




간절한 얼굴로 이쪽에 내밀어진 소시지를 받아먹고서 천천히 씹었다.








평범한 소시지 맛이었다. 고소하고 약간 짭조롬한 햄 맛이 났다.








"선배. 이름이 뭐에요?"








햄을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고나서, 내가 선배에게 말했다.








"김.. 현지."








"정말로 제가 좋아요? 저랑 이야기 별로 안했잖아요. 제 이름은 알고 계세요?"








선배가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하잖아. 그.. 궁금해서 다른 애들한테 물어봤었고, 마이에도 써있고.."








내가 멍청했었다. 모를 수가 없구나. 이름.








"그럼, 사귈까요?"








어차피 잘된거야. 이걸로 나랑 녀석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거다. 잘난척 하던 인싸도 그랬지.




실연은 다른 사랑으로 잊는거라고. 잘난척한다고 개패놓긴 했어도 여자를 매번 갈아치우는 녀석의 말이니 맞는 말이 아닐까.








어렴풋한 달빛과, 희미한 형광등빛이 선배를 비추고 있었다. 검은 긴 장발. 얼핏보면 후배로도 보이는 앳된 얼굴.




슬림한 몸매는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선배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서 취향으로 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선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진짜?"








"네. 진짜로요."








"무.. 물리기 없기."








내가 피식 웃었다.








"알았어요."








아마 미래의 나는 지금의 말을 뱉은 나를 죽이고 싶어 하겠지.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는 선배에게 진지했다. 선배와 키득대면서 대화를 나눴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녀석을 좋아한다는 마음 따위, 내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선배 앞에서




가슴속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이걸로 녀석과도 끝인가.. 10년 친구지만 멀어질 때가 된거지.








그렇게 낙천적으로 생각하면서 선배와 밥을 먹고 교실로 돌아갔다.








* * *








나, 이민주는 내 뒷자리에 앉은 녀석을 보면서 아까부터 궁금하던걸 물어봤다.








"너, 어디서 먹었냐?"








"뭐가."








불퉁한 얼굴로 내쪽을 바라봐오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속에서 나도 모르는 열불이 나는걸 느꼈다.








"오늘 매점에 없던데."








"남이사. 나도 가끔은 매점이 아닌 곳에서 먹고싶기도 하거든?"








"나 없으면 아싸새끼면서."








"이젠 아니거든? 여자친구 생겼고."








"어?"








순간 내가 잘못들은 듯 했다. 내가 아니면 다른 녀석들과는 대충 이름만 아는 느낌으로 지내던 녀석이 여자친구라니.








"뻥치지마."








"진짜야. 아까 낮에 왔던 선배 있잖아. 그냥 OK했지 뭐."








순간 시야가 일그러졌다. 가슴이 꾹 조여오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표정이 왜 그러냐? 내가 여자친구 사귄게 그렇게 꼽냐?"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을 피했다. 어라, 분명 난 남자친구인 선배가 있는데 왜 이녀석의 일이 신경쓰이는걸까.








"별로."








"싱겁긴."








어떻게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이번 주말에-"








"미안. 무리야. 첫 데이트 약속 잡았거든."








뭐야 그게. 항상 내가 주말에 놀자고 하면 거절 안했잖아?








"서로 사귀게 된 기념이라더라. 시내로 갈건데. 너 첫데이트 때 어디 갔었냐?"








"시꺼."








"삐졌냐? 주말에 안 놀아줘서?"








"아냐 그런거."








"너 남친 있잖아. 한결선배. 그 선배랑 놀아."








그대로 나는 몸을 돌렸다. 어떻게든 문제집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잘 안됐다.




그냥 질투가 났다. 선배가 있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머릿속으론 알고있는데.. 가슴 쪽이 쿡쿡, 찌르는 듯이 아팠다.




선배가 다른 여자랑 있을 땐 전혀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대체 왜?








"화 풀어."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책상 위에 캔커피를 올려뒀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있으니 벌써 쉬는시간 같았다.




녀석이 건네준, 커피를 조용히 두 손으로 쥐었다. 내가 냉커피보단 온커피를 좋아 한다는 걸 아는 녀석이라 그런지, 매점까지 가서 사온 모양이었다.








"뺏기기 싫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