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여중생 성폭행범 & 살인혐의범 김길태의 아이큐가 86이라는 사실은 여러 신문기사들을 통해 대서특필되는 중에 있다. 김길태의 아이큐를 강조해 거듭 말하고자 하는 기자들의 본심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자기들의 아이큐는 이토록 높아서 저희는 세련되었다는 강조일까?
김길태에 대하여 지나치려 했으나, 두 가지가 계속 나를 걸리게 했다. 두 가지.
하나는 낮은 지능지수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이름에 관해서다.
아이큐 86이 어떤 단계인가 찾아보았더니 위키피디아에 나온 더만 구분표에 의하면, 보통 또는 평균적 지능의 한계선이었다. 아이큐 84는 둔하고 이해능력이 느리고 고통에 대해서도 지각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86은 거기에서 약간 오른 수준이다. 또 다른 구분 위츨레는 더만의 늦은 인지능력, 고통에 대한 둔감 한계를 아이큐90까지라고 구분했다.
한 마디로 김길태는 소위 말하는 바보, 또는 거기에서 약간 아주 약간 높은 상태인 것이다.
아이큐 70은 돌고래의 지능 수준이다. 아이큐 50은 견공 수준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적절한 지능과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양육, 훈련 덕분이다. 인간사회를 벗어나 늑대무리에서 자란 인간의 경우 - 최근까지도 러시아 지역에서 어떤 이유로 늑대사회에서 양육된 인간늑대가 발견되었고 그들은 예외없이 인간 아닌 늑대 행동과 발성을 하였다. - 인간이라고 부르기 힘든 측면이 있다.
본 필자는 이전부터 한국사회에 유난한, 괴물 보도, 특이하게 큰 물고기나 파충류, 특이한 모양을 지닌 어류들에게 그것을 "괴물"이란
형용사적 접두어를 붙여가며 호들갑떠는 보도를 하는 일부 기자들, 그리고 블로거들에 불만을 품어왔다. 괴물이라는 것은 자기들 시각에 그럴 뿐이지, 그 종의 양태에서는 당연한 형상이다.
김길태의 평균 이하인 지능지수를 보며 드는 의문은, 그에게 과연 자기 범행을 인지할 최소의 능력이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나아가 그에게 솟구칠 자연본능적 성욕을 제어할 자기성찰이나 자제심 같은 인간의 고차원적 능력이 있을까 라는 부분이다.
성욕을 자제하고 잔인한 행위가 빚는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것은 인간에게 특히 고차원적 자각능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정상 내지 정상 보다 높은 지능을 갖고서도 많은 범인들은 자기 제어에 실패하여 흉악한 범죄, 성폭행, 살인을 만들어 놓는다. 많은 경우 특히 교활한 연쇄 살인마의 경우에는 충분한 인지능력, 예상능력까지 갖고서도 살인한다. 이 경우 높은 지능이 오히려 그들의 살인과 범행은닉을 돕는 기재로 작용한다.
하지만, 김길태에게는 그런 지능, 자기 행위를 성찰할, 마지막 보루가 선천적으로 결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점 때문에 본 필자는, 지금같은 김길태에 대한 보도 태도는 - 다른 높은 지능의 살인범들과 똑같이 다루는 - 이번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김길태 사건은 이 사회에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저지능지수의 사람들, 지적 장애나 마찬가지인 사람들, 그들이 성장해서 혼자 서기 해야 할 경우에 대한 양육장치, 보호장치가 있는가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들개 또는 사나운 식육견이 뛰쳐나와 사람을 공격한다면, 그저 사살해버리면 되겠지만, 그것 또한 그들의 지능이 형편없이 낮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을 관리하던 관리자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김길태의 관리자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김길태 처럼 낮은 지능을 본의 아니게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의 경우는 누가 행위의 책임자가 되어야 할까? 바로 사회다.
김길태에 대해 하나 더 짚어볼 것은,그의 이름이다. 길태라는 이름에 대해 기자들은 그것이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길태라고 지어졌다고 보도했다. 아마 직접 그 주변에서 들은 설명일 것이다.
본인이 품는 의문은, 어떻게 길에서 태어났다는 그런 절망적인 이름을 말도 못하는 영아에게 붙이고 평생 남들이 부르도록 만들 수가 있나 하는 점이다. 한 마디로, 아이에게 어릴 적부터 "노숙자" 라고 이름을 붙여 부른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 이름을 가진 아이가 그렇게 발전하리란 것은 너무 뻔하다.
당신에게 아이가 태어났는데, 하필 병원으로 가던 택시 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길위에서 태어났으니 길태 라고 붙이게 하겠는가. 내 아이라면 그리 이름 붙이겠는가. 당신 아이라면! 길태란 이름은 너무 잔인했다.
길태 라는 이름 하나에서 김길태가 어떤 "애정"을 받으며 성장했는지가 너무 눈에 선히 보여지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길태라고 부른다면, 그런 부름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번 두번도 아니고 하루에 열 사람이 열번씩만 길태라고 부르면 매일 백번이고 십년간 그런다면 36만5천번이다. 아이 머리가 돌을 것이다.
지능지수도 형편없이 낮은 아이에게 매일 길태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이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라고 저는 생각한다. 이미 그 아이에게서 정상인되기를 포기하란 끊임없는 메시지나 마찬자기인 것이다.
김길태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형편없음이다. 버림받는 약자에게 무자비하고 아무런 이해심도 타협의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김길태가 전과 18범이었으니 그 이전에 그를 담당하였던 검찰이나 판사는 알 것이다. 그에게 형편없는 인지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런 그가 다시 출소하면 어찌 되리란 것을. 김길태보다 최소한 지능지수가 열배는 뛰어난 정상인들일 테니, 그 정도는 예측함이 당연하다.
헌데, 그 당연한 예측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들짐승과 같은 수준의 지적 준장애 , 체력은 월등하며 - 어른을 다시 풀어놓은 것이다.
책임은 책임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우리가 김길태 사건에서 책임을 인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들짐승 사회나 같은 사회다. 아니, 늑대들은 인간이 버린 자식도 갖다 그들의 언어로 기르는데 성공하지만, 인간들은 같은 인간이 버린 인간을 같은 인간 언어로 기르는데 걸핏하면 실패하니, 사회성의 성숙도 분야에서는 인간이 훨씬 늑대 만도 못하다.
김길태가 버리워진 장소는 교회 앞이었다. 최소한 김길태를 낳았던 어느 엄마는 그 아이가 교회 다니는 착한 심성을 지닌 사람들의 손에 의해 거두워지기를 간곡히 바라 거기 바렸을 것이다. 아이를 낳아 제 손으로 그 핏덩이를 버리고 싶은 엄마가 하늘 아래 어디 있겠나. 버릴 지언정, 착하고 훌륭하신 분들이 자기 아기를 거둬 교회 기독교인들 처럼 착하고 훌륭히 길러달라는 그 간곡한 절규가 그 행위 안에 있었다고 본다. 가련한 일이다.
김길태에게 이제라도 검찰은 한국사법부는 제 정신이 있다면, 똑똑한 지능인들이 형편없는 바보에게 닥달하는 야수 같은 풍경 만들지 말고, 당장이라도 정신과 의사 내지 정신의학자를 불러 대동해 김길태를 상담시키어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 우리들만이라도 김길태 같은 짐승이 되지 않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는 길이라 본다. 바보를 흉폭하게 만든 것은 주변의 정상인이 져야할 책임이니 말이다.
길태, 길에서 태어났다는 소리를 매일 들으며 자라야 했던, 그가 바보인가 아닌가 부터 우리에게 확인시키기 바란다. 바보가 아니거든 무기든, 사형이든 중처벌함이 마땅하며, 바보이면, 다른 재생과정을 밟게 함이 옳다.
지능이 일,이 단계, 십, 이십단계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낳는다. 지진처럼.
그리고 앞으로는 아이, 영아에게, 아무 것도 모르며 선택능력도 없는, 형편없고 무자비, 냉혹한 이름을 지어 부르는 행위도 근절, 감독해야 맞다. 그 아이가 자라 사회 미래구성원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 인생이 무슨 장난인가. 길에서 태어나 길태라 부르다니. 그 형편없는 윤리의식은 놀랄 지경이다.
2010.3.13. 파아란 한은경.
한국은 피의자의 인권을 중시하고 미국은 피해자의 인권을 중시한다. 복수주의로 가는 것이 옳은지도 생각해볼 문제지만 과연 이글을 쓴 한은경 또는 한은경의 가족이 김길태와 같은 인간에게 강간 또는 살해 당한다면,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 dc App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속단은 순진을 넘은 무지이고 위선이자 오만이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