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신학의 연구와 학문의 중심지는 오직 새로 설럽된 대학들이었다. 1200년경 파리의 여러 학교 교사들이 "교사단"(universitas magistrorum)이라는 고유한 단체로 결합하였고, 그것은 곧 독립된 존재로 교회와 국가의 승인을 얻었다. 그레고리오 9세는 1231년에 이 단체를 주교로부터도 독립시키고, 많은 특전을 부여하였다. 이 무렵 볼로냐에서도 또한 그러한 "단체"(universitas)가 발생하였는데, 그러나 여기에서는 학생들이 결합의 주요 대표자들이었다.(학생단. universitas scholariun). 다음 시대에 그러한 결합체들이 많은 곳에서 생겨났다. 그것들은 간단히 "대학"으로 불렸다. ... "학문의 어머니"인 파리는 최대의 명성을 누리고 가장 많은 학생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 사람들은 성권(sacerdotium) 및 왕권(Imperium)과 나란히 학문을 독립된 제3의 "세계적 직권"으로 평가하였다. 쾰른의 참사회원인 로에스의 알렉산데르는 1284년에 재치가 많은 은유시 「파보」(pavo)에서, 이탈리아인에게는 성권을, 독일인에게는 왕권을, 프랑스인에게는 학문을 서구 민족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한 각기의 특별한 사명으로 돌렸다. 이러한 대학 중 하나에서 박사학위의 수여는 귀족과 동등의 지위를 의미하였다. 학문이 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 · Roland Fröhlich. 《세계 교회사》. 최석우 옮김. 244-245쪽
중세부터 닥터는 귀족 대우였음.
학문으로 따낸 귀족대우(닥터)와 귀족대우 못딴 쩌리(마스터)를 비교할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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