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질렀는데도 하나도 안 나왔다는 거 아니가. 분명 넣지도 않았는데 넣었다고 한 게 분명한기다! 사장님 내 말 듣고 있나?”


아이들과 헤어지고 거리를 걷고 있자니 대화가 어느 새 소녀가 하는 게임 얘기로 넘어가 있었다. 전혀 듣고 있지 않았지만 사실대로 말한다면 소녀가 삐질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주제이기에 대화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진 않을걸. 내가 어제 뽑았으니까.”

?! 사장님도 그 게임하나? 저번엔 게임 안한다하지 않았나! 내한테도 좀 보여도!”

넌 이런 걸 게임이라고 부르니?”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고 빨리!”


박사가 단말기를 꺼낼 기미가 없자 크루아상이 박사 대신 그의 안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냈다. 괜히 오랫동안 비서로 지낸 것이 아니라는 듯 소녀는 그를 대신해 익숙한 동작으로 비밀번호를 풀었다. 박사는 비밀번호를 대신 풀어줘서 고맙다고 하기 전에 질문을 던졌다.


너 내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사장님은 단말기도 그렇고 방 비밀번호도 그렇고 다 1로만 하지 않나. 원숭이가 훔쳐가도 그 정도는 풀 수 있데이.”

……고도의 기만전술이야. 천하의 로도스의 비밀번호가 그렇게 단순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한다고.”

아무도 생각 못하긴.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사장님 자는 사이에 얘들이 사장님 방에서 놀다가는 거 알고는 있나?”

? 어쩐지 요즘 과자가 없어지더라니. 내가 아끼던 과자들이라고!”

내가 안 가져갔으니 내한테 뭐라 그러지 마라. 소금맛 초콜렛 같은 걸 누가 좋아한다고. 아 됐다.”

, 역시 너는 아직 어른의 맛을 모르는구나.”


그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든 주먹을 껄껄 거리며 피하고 추가타를 막기 위해 소녀보다 몇 걸음 더 앞에서 걸었다. 크루아상은 무으하고 볼을 부풀리더니 거리를 걸으며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보지도 않고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움푹 꺼진 도로, 거리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를 재주 좋게 피했다. 소녀는 단말기에 눈을 고정한 채 박사에게 말했다.


내 친구신청 보냈으니까 무시하면 안된다. 그리고 나 걔 써보고 싶으니까 지원목록에 올려둔 거 건드리면 안된데이.

? 싫어. 이 녀석 1저지 밖에 안돼서 올려놓으면 아무도 나한테 친구신청 안할 거라고.”

내가 신청하지 않나. 내말고 또 누가 필요하다고.”

난 되도록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크루아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걸음 다가와 박사에게 단말기를 돌려주며 재빨리 그의 허리에 잽을 먹였다. 이번 주먹에는 지금까지 날렸던 주먹들보다 훨씬 힘이 실려 있어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소녀의 주먹은 분명 어떠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사는 거기에 응답하는 대신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 편이 더 쉬웠다.


그나저나 이번 달도 가챠로 다 쓴 거야? 돈은 계획적으로 쓰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아직 어린애구나.”

다 쓰진 않았다! 내한테 필요한 만큼은 다 남겨뒀다고! 자꾸 어린애 취급하지 마라!”


소녀가 발끈하며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손을 쳐냈다. 크루아상은 입을 삐죽인 채 박사와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박사가 소녀의 주먹을 피해 떨어졌던 몇 걸음보다 더 먼 거리였다. 삐진 소녀가 흔히 하는 행동을 보며 어린애 취급 받고 싫어하는 모습에서 역시 아직 어린 티가 난다고 박사는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거야? 어째 며칠 동안 걷기만 하는 기분이네?”

으응. 이제 다 왔다. 그러니까…….”

젠장! 개자식들! 두고 보자. 비켜!”


별안간 골목 안쪽에서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남자가 튀어나와 박사와 부딪혔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호흡도 불규칙하고 걸음걸이도 술 먹은 것처럼 비틀거리는 걸 보아 취객인 것 같았다.


점마 뭐고! 지가 와서 갔다 박아놓고 왜 우리한테 승질이고? 사장님 지갑 털린 건 아닌지 살펴봐라!”


크루아상이 어느 새 박사에게 붙어 역정을 냈다. 이 소녀가 화를 내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박사와 떨어져 있다가 그를 막지 못한 것이 어지간히 분한 모양인지 금방이라도 쫓아갈 것처럼 구는 소녀를 말리고 혹시나 그 남자가 소매치기를 하는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광석병 환자들이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이런 슬럼가 같은 곳은 일자리가 있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웠고 대부분은 범죄에 의지해 생을 이어나갔다.

박사가 주머니를 뒤지려던 순간 크루아상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의 팔을 잡았다. 그의 옷에 피가 묻어있었지만 박사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박사는 그제야 방금 지나간 사내가 비틀대던 것이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맞았기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박사는 아무리 야근 때문에 피곤하다고 해도 그런 뻔히 보이는 사실을 놓쳐버린 자신을 책망했다. 뒤늦게라도 도와줄 것이 없는지 물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골목의 그림자 사이로 사라진 뒤였다. 박사는 그를 쫓아가는 대신 자신을 바닥에 떨어트린 도자기 인형처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크루아상의 이마를 치며 안심시켰다.


내 피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나 그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요즘 훈련도 열심히 받고 있다고. 가게는 찾았어?”

사장님 진짜 괜찮은 거 맞제? 아프면 바로 말해줘야 한데이? 가게는 저 쪽에 있다.”


소녀가 이마를 문지르며 방금 전의 사내가 튀어나온 골목을 가리켰다.

식당은 다른 건물들처럼 낡고 허름했지만 슬럼가의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우선 이런 곳에서 보기 힘든, 굉장히 고풍스럽게 생긴 간판이었다. 하지만 간판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돼지 그림만 덜렁 그려져 있었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주변 환경이었다. 식당 앞에 서있는 커다란 트럭을 제외하고 영업하는 가게도 사람이 사는 집도 없이 모두 텅 빈 채로 방치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럼가 전체를 뒤덮다시피 하는 포스터나 낙서는 어디에도 없었고 창문 또한 깨져있지 않았다. 텅 빈 건물들이 이토록 깨끗하게 남아있다는 것은 노숙자들이 이 근처에 얼씬도 거리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그건 그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박사는 트럭 안으로 무언가를 옮기고 있는 사내들의 험상궂은 얼굴에서 그 이유를 금방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는…….”

사장님도 여 들어봤나? 내도 들은 건데 여기가 용문에서 제일로 용문 요리를 잘하는 집이라 카더라. 광석병 환자들이 하는 데라 남들이랑 같이 가자고 하기도 뭣해가 늘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는데 마침 사장님이랑 딱 마주친 거 아니가!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 부르제?”


이 곳이 박사가 생각하는 그 곳이 맞다면 그는 분명 이 식당을 알고 있었다. 지금껏 듣기만 하고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는 장소지만 저 간판을 보니 틀림없었다. 이 일대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가장 유명하다면 유명한 식당이었다. 하지만 박사가 궁금한 건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사실을 이 녀석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였다.


너 나 몰래 내 서류 봤지?”

사장님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내는 전혀 모르겠는데?"


박사는 로도스에 돌아가자마자 눈을 굴리며 시치미를 떼는 소녀에게 호되게 꿀밤을 날리고 바로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3이나 4로 바꿔놓으면 한동안은 안전하지 않을까.

그것보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거였다. 그들을 향해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던지던 사내들은 의구심을 거친 방법으로 해결하기로 한 모양인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쇠파이프와 야구배트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방금 튄 것처럼 선명한 핏자국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박사의 전문적인 의학 지식과 여러 가지 정황증거를 종합해봤을 때 그들 자신의 피는 절대 아니었다.


내 생각엔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와? 내랑 안 오면 나중에 몰래 혼자 올라고? 이런 중요한 데는 같이 와야 되는기다! 무슨 일 있어도 내가 지켜 줄테니 사장님은 암 것도 걱정 마라!”


크루아상이 같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어 말하고 박사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내들이 무기를 앞으로 내밀며 소녀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들 중 대부분은 긴장이 역력한 기색이었지만 그들 중 몇 명은 익숙한 듯 먹잇감을 눈 앞에 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퇴로를 막고 포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박사가 크루아상의 손을 잡아끌려던 순간 소녀가 활짝 웃으며 손을 들었다.


챠오!”


소녀의 기습적인 인사에 당황한 그들은 행동을 멈추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흉터가 난 사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어어.'하고 인사를 받자 나머지 일행이 한 층 더 얼떨떨해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인사를 받은 사내도 반사적인 행동이었는지 손을 흔들며 동료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사내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너 쟤 알어?”

아니.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럼 인사는 왜 받았어? 분위기 이상해지잖아.”

그냥 반사적으로 한 거야. 나한테만 뭐라 하지 말라고!


그들끼리 수군거림이 오고 갈 때마다 머리 위로 치켜세워져 있던 무기가 점점 밑으로 내려왔다. 결국 무기가 바닥에 닿자 인사를 받은 사내가 다른 이들에게 떠밀려 앞으로 나섰다. 그는 무기를 지팡이처럼 짚은 채 질문을 던졌다. 한 층 적의가 꺾인 표정이었다.

……댁들 누구쇼?”

내는 펭귄 로지스틱스의 크루아상! 잘 부탁합니데이!”

펭귄……? 뭔 이름이 그 따위야. 사장이 무슨 펭귄이라도 돼?”

로지스틱스. 멍청아. 대충 운송이라는 뜻이야. 초등학교 때 배우는 거잖아."

, 불만 있으면 니가 질문하던가. 학교를 나와 본 적이 없는데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아.”

"택배회사가 여긴 왜? 누구 택배 시킨 사람 있어?”

난 아니야. 근데 택배를 시킨데도 여기까지 오나?”

바보야. 아무것도 안 들고 있잖아. 택배 때문에 온 게 아니야.”

전하러 온 게 물건이 아닐 수도 있지 멍청아.”


뒤에 서있던 사내 중 한 명이 끼어들자 다른 사내들도 하나 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누가 누구와 대화를 하는지 모를 지경이 이르자 그들은 침입자들을 내버려둔 채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흉터 난 사내가 그들 째려보고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자 사내들이 양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내줬다. 여전히 그들의 뒷통수를 의심의 눈초리로 찌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손을 댈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헤헤. 내가 걱정 말라고 했제.”


크루아상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박사는 이 무모한 녀석에게 있는 힘을 다해 꿀밤을 먹여주고 싶은 기분을 꾹 참았다. 이제 와서 소녀 혼자 돌아가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고 사내들이 뒤를 막고 있는 이상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박사는 하다못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려 했지만 소녀는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글이 너무 길어서 잘렸다. 밥 먹는 내용은 다음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