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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정말 사소한 것에도 쉽게 휘둘리곤 한다.

기분좋게 길가를 거닐다 돌부리에 한 번 걸려 넘어졌다고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하고

친구나 가족의 빈말이나 다름없는 농담을 듣고는 토라져 하루종일 속을 썩히기도 한다.



나는 예전부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라고 믿어왔고, 실제로 스스로가 그 말을 증명하며 살아왔다 자부하지만 이런 날에는 나 자신이 제법 낮설게 느껴진다.

예컨데, 지금처럼 책상 위에 어지럽혀진 서류를 정리하다 뜬금없이 블라인드를 젖혀 창 밖에서 쏟아지는 함박눈을 감상하는 꼴이 참으로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집무실의 조명이 세지 않은 탓에 이 곳에 있는 가구며 사물들은 온통 그늘이 져서는 실루엣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반나절 가까운 시간 동안 서류를 확인하는 데에 의지한 것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등 하나가 전부였다.

덕분에 눈이 피로하긴 했어도, 창틀 너머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송이는 빛이 들지 않는 새벽의 집무실과 대비되어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 눈구경을 잠깐 하다가, 정박지에 조촐하게 세워진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온갖 화려한 장식과 꼬마전구가 매달린 끈으로 장식되고, 꼭대기에는 별을 씌워놓은.

로도스가 용문에 정박하는 건 잠깐일테니 우리쪽 사람이 세워놨을 리는 없고, 아마 이 곳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작은 파티를 준비하고 있겠지.

저 나무를 보고 나서 머리 맡에 놓일 선물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올해도 벌써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보면, 나도 나이를 먹을대로 먹었구나 하는 씁쓸한 기분이 밀려오는 것이다.



올해에는 나도 크리스마스 선물 만큼이나 기다리는 것... 사람이 있다.

산타클로스는 아니지만, 붉은 옷을 걸치고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선물을 전해준다는 건 나름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남은 서류를 마저 정리하고 창문의 블라인드를 끝까지 젖히고 나면, 경쾌한 박자의 발소리와 문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커피 향기로 그 사람이 왔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손님을 맞을 시간이다.



똑. 똑. 똑.

"박사, 들어가도 돼?"



나는 금새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어서와, 안젤리나."



아직 꼬마숙녀의 태를 채 벗지 못한 이 앳된 소녀의 이름이다.

안젤리나는 커피 두 잔이 담긴 작은 철제 트레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상태로 조심스럽게 문턱을 넘었다.



"커피 가져왔어."

"수고했어. 여기 앉아."



집무실에 손님이 앉을만한 곳은 낮은 단상을 앞에 둔 2인용 소파 하나가 전부였다.

평소에 이 방을 이용하는게 나 하나 뿐이라 별 문제는 없지만, 이렇다보니 혹여나 두 사람이 앉을 일이 생기면 바로 옆자리에 앉는 꼴이 되어 난감해지는 것이다.

물론 새 의자를 하나 더 갖다 놓으면 금방 해결될 일이지만...



"박사 옆에 앉아도 되지?"

"어차피 앉을만한 데가 여기밖에 없는데, 허락 받을 필요 없잖아."

"뭐... 그건 그렇네."



적어도 지금은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켈시 선생님도 참 야박하시지. 의자 하나 더 놓는 것도 허락을 안 해주신다니. 차라리 내가 하나 사서 갖다놓을까?"

"하하... 사양할게. 분명 혼날테니까."



거짓말이다.

애초에 켈시는 의자 하나 놓느냐 마냐 하는걸로 참견해올 정도로 한가한 인물이 아니다.



"우타게는? 오늘도 결석이야?"

"응. 요즘 많이 바쁘다고 해서."

"너무 자주 빠지는 거 아니야? 그래도 이번주 어시스턴트 당번인데..."

"본인이 하기 싫다고 하니까, 나도 딱히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래서 내가 대신 하고 있기는 한데, 정말 괜찮은걸까..."

"너만 바쁘지 않다면, 난 괜찮아."



거짓말이다.

우타게하고는 사전에 말을 맞춰놨다. 그녀를 매수하느라 월급의 상당 부분이 날아갔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다.



"자, 커피. 따듯할 때 마셔야지."

"응. 매번 고마워."

"그나저나 박사도 참 특이하다니까. 커피를 마셔야만 밤에 잠을 잘 수 있다니... 보통은 그 반대 아니야? 커피를 마시면 잠에서 깬다고들 하잖아."

"그건... 체질 차이 아닐까?"

"...별난 체질이 다 있네."

"그래도 덕분에 매일 너를 보니까, 심심하지는 않아."



새빨간 거짓말이다.

블랙 커피를 마셔야 잠이 온다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긴 할까?

심지어 난 블랙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돌이켜보니 나는 안젤리나의 앞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거짓말들을 뻔뻔스레 입 밖으로 내고 있었다.

만약 내가 어느 동화 속에 나오는 목각인형이었다면, 아마 반대쪽 벽에 닿고도 남을 지경까지 코가 길어져 있었겠지.

그래도 이런 유치한 거짓말들로 이뤄낸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안젤리나의 옆자리.

안젤리나와 함께하는 시간.

그리고, 진한 커피 향기를 뚫고 코끝을 간질이는 안젤리나의...

설탕... 냄새?

잘 모르겠다.

애초에 설탕에 냄새가 있던가?

어쨌든 그런 단내음이 바로 옆에서 풀풀 풍겨오는 덕에, 평소에 즐겨먹지도 않는 블랙 커피가 지금은 나름 먹을만하다.



"박사?"

"어... 어?! 왜?"

"커피 다 식겠어."

"아... 그렇지."

"무슨 생각 했어?"

"아무 생각 안 했어."



스스로가 커피잔을 부여잡은 채로 얼빠진 얼굴을 하고는 멍을 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민망한 나머지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고 괜히 단상 위를 두리번거리며 흘겨봤다.



"...오늘은 커피가 두 잔이네?"

"응. 나도 한 번 마셔보려고."

"너도 이런거 마실 줄 알아?"

"나도 이제 어른이잖아. 이런 것도 버릇을 들여놔야지."

"어른이라니, 새삼스럽게..."

"몰랐어? 올해 지나면 나 이제 정식으로 성인이잖아."

"아..."



생각해보니까, 벌써 그럴 때가 됐구나.

올해 지나면, 이라고는 하지만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안젤리나는 이제 어른이구나.



"축하해. 이제 어엿한 성인이구나."

"헤헤. 그렇게 됐네."

"그럼 이제 나하고 같이 술도 마실 수 있는건가?"

"우와, 방금 대사는 완전 아저씨같았어..."

"아저씨라고 들어도 할 말 없는 나이긴 하지. 잠깐 기다려봐."

"응? 갑자기 어디가?"



이전에 선물로 받은 것이지만, 집무실 구석에서 묵혀봤자 쓸데가 없는 물건이다.

나는 서랍 맨 아랫칸에서 묵직한 상자 하나를 꺼낸 뒤, 망설임없이 포장을 풀고 그 내용물인 푸른색의 큰 병을 드러냈다.

그리고 상자 속에 같이 들어있는 두 개의 잔을 헝겊으로 대충 닦아내고 병과 함께 품에 안아 상으로 가져갔다.



"그거... 술이야?"

"예전에 사르곤에 갔을 때 받아온거야. 겉보기엔 꽤 독해보여도, 과일주라서 그렇게 도수가 높지 않대."

"그걸 어쩌려고?"

"한 번 마셔볼래?"

"뭐... 내가?"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원래 술은 어른 앞에서 배우는 거라고 하니까. 어때?"

"음... 그래도 엄밀히 따지면, 나 아직 성인 아닌데?"

"어차피 신년까지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까. 별 상관 없지 않아?"

"그런가..."


안젤리나는 잠시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내 언제 망설였냐는 듯이 시원하게 답했다.



"좋아! 박사랑 함께니까,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 . .



그 뒤로 십 몇 분이나 지났을까.

사실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았다.

안젤리나가 술을 처음먹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나도 다음 날 업무를 보려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채로 깨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둘 다 적당히 절제하면서 몇 잔을 기울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다할 안주도 딱히 없었고, 원래는 딱 한 잔 맛만 보여주고 다시 넣을 생각이었는데 안젤리나가 의외로 잘 먹는 바람에 어느새인가 본격적으로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분위기에 취한다고 하던가.

꼭 술에 쩔어서 인사불성이 되는게 아니더라도, 남녀가 둘이서 같은 자리에 앉아서는 희미한 조명 아래서 천천히 올라오는 취기를 느끼다보면 서로가 모르게 진솔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법이다.



"박사, 나 어른이 된 거 맞지?"

"응. 맞아."

"사실 나는 실감이 안 나. 내가 어른이 된다는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어른이 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

"박사도 그런 생각 했어?"

"그럼. 지금 네 기분 어느정도는 이해해. 주변에서 어른으로 대접해주는게 두렵지. 정작 나 자신은, 내용물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맞아, 딱 그런 기분이야! 왠지 내 성격도 억지로 바꿔야 할 것 같고..."

"앞으로 철 들으라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겠지. 그런게 싫어?"

"응. 싫어."

"...그렇구나. 사실 나도 그랬거든. 철 좀 들어라, 어른스럽게 굴어라... 그런 소리 듣는게 싫었어."



...

거짓말이다.

안젤리나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한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으니까.

애초에 기억상실증 환자한테 그딴게 있을리가 없지.

지금 내가 경험이랍시고 떠들어대는건 전부 희망사항이다.

안젤리나가 변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안젤리나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이기적인 말을 하는데, 안젤리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

지금쯤이면 눈치챘을텐데. 내가 기억상실증 환자라는 것, 내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을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술을 마셔서 그런걸까?

아니면...

그걸 전부 알면서도, 호감 좀 얻어보려고 아는 척, 성숙한 척 있는대로 떨어가며 되도않는 거짓말을 지껄이는 내 모습을 보고 속으로 비웃고 있는걸까?



"박사도 그런 고민을 했구나. 나만 그런게 아니었어."

"다들 살면서 한 번은 거쳐가는 시기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게 이상한거야."

"어쩌면 우타게도, 엠브리엘도..."

"너랑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너 혼자서만 어른이 되는게 아니잖아."

"있지, 박사."

"응?"

"내가 어른이 되면, 박사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지금의 네가 아니게 된다면, 그 말이 하고 싶은거지?"

"응. 만약 내가 갑자기 변하게 된다면..."

"싫어."



단언했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박사?"

"만약 네가 억지로 어른을 연기하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숨기려한다면 아마 나는 널 싫어하게 될거야."

"그런..."

"그렇지만, 반드시 어른이 될 필요는 없어."

"...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스스로를 굳이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달력이 넘어갔다고 해서 네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건 아니잖아? 나는 네가..."

"어른이 되는게 싫어?"



그녀가 말을 끊었다.

마치 차마 흘려들을 수 없는, 황당한 말을 들은 것처럼.

안젤리나가 내게 되묻는 목소리는 차분하고 상냥했지만

그건 내게 더없이 단호하고, 잔혹하게 들렸다.




"박사는 내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게..."

"그럴 수는 없을거야. 나도 곧 있으면 성인이야. 언제까지고 어린애 취급을 받을 수는 없잖아."

"하지만..."

"난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꿈도 있어. 그런 것들을 하려면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되잖아. 박사가 날 싫어하게 되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안젤리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한 아이구나.

옛날 생각이 났다. 내가 공감하는 척을 하기 위해 억지로 지어낸 가짜 어린 시절 추억 따위가 아닌, 진짜 내 기억.

안젤리나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다.

그 당시의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뭐랄까.

무어라 말하기 힘들지만 굳이 묘사해보자면, 경직되어 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이 사무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었고,

광석병이라던지 재앙이라던지, 여러가지 일에 휘말린 탓에 농담의 농 자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었고,

기억을 잃고 막 깨어난 나와는 다르게 상상 이상으로 전문적이고 프로다워서, 아예 접근해볼 생각조차 못해본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나와 함께 어울려주고 대화를 주고받은게 아미야인데,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막중한 의무와 책임에 대해 알고 난 뒤로는 함부로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내가 어쩌면 방해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때 안젤리나를 만났다. 천진하게 웃어주고, 평범하게 안부를 물어왔다. 그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내게는 큰 활력이 되었다.

그녀를 만나고 있을 때 만큼은 어른으로서의 짐을 덜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세상 속에서 혼자서 빛을 내는 그녀가 나를 친구로 대해주니까, 나도 그런 존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때서부터...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 우타게를 설득해서 나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집무실에는 소파 하나만 덩그러니 놓았고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매일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잔다는 둥 어린애같이 떼를 썼다.

그녀가 변하는게 싫어서, 어른이 되지 말아달라며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렸다.

그게... 끝이다.

나라는 인간의 밑바닥이다.



"박사..."



그리고 나는, 술김에 머저리같이 이걸 전부 떠벌렸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소리를 했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내용 전부 말했겠지.

이제 무슨 말을 듣게 될까?

분노? 경멸? 증오? 조소?



"박사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있지, 나도 박사를 이해할 수 있어. 박사가 느끼는 감정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한테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난... 그냥 널 보고 싶어서..."

"내가 뭐 때문에 매일 커피를 가져왔다고 생각해? 나도 다른 할 일 많아. 딱히 일이 없어서, 한가해서 그랬던게 아니란 말이야."

"그럼..."

"박사를 존경했으니까, 박사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으니까! 박사가 매일 최선을 다하니까, 힘들고 피곤할거라 생각해서 일부러 시간내서 찾아간거야!"



이건 평소의 안젤리나가 아니다.

분명 술 때문이겠지. 술 때문에 평소에는 안 할 법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 더 잔인하게 말하자면, 이게 그녀의 본심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 거짓말이야? 그냥 내가 보고싶었다고?"

"..."



이제 할 말은 없다.

더 이상의 거짓말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박사는... 내가 되고 싶었던거지?"

"..."

"내가 박사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박사는 내가 되고 싶었잖아."

"넌 이해 못해."

"나도 알아. 이제 어른이니까!"

"넌 어른같은게 아니야!"

"그냥 부정하는 거잖아. 단지 그랬으면 좋겠다고, 내가 쭉 어린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소리가 높아진다.

이렇게 싸울 일이 아닌데.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일인데.

감정이 격해지고 심장이 빨리 뛴다.



"박사는 나를 그냥 인형으로 생각했던거지? 난 박사에게 인정받으려고, 박사처럼 되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그냥 곁에 두고 아무때나 들여다보는 인형 정도로 생각한 거잖아."

"그런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난 박사가 어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마음에 안 들면 떼쓰고, 안되면 억지부리고, 수틀리면 거짓말하는 어린애잖아!"

"너 진짜..."



안젤리나의 팔목을 붙잡았다.

홧김에 그랬나? 아니면 그녀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서?

애초에 팔을 붙잡아서 어쩌려는거지?

내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내 몸과 입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넌... 모르잖아... 어른으로 살아본 적 없잖아. 어른이 뭔지도 모르잖아!"

"박사... 그만..."

"네가 뭘 알아? 사람은 쉽게 안 변해. 겉껍데기는 나이를 먹어도 알맹이는 그대로인게 인간이고 사람이야."

"아파..."

"주변에서 어른이라고 불러주면 그대로 영문도 모른채 어른이 되는거라고.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기나 해?"

"..."

"난 어른으로 살아온 기억 밖에 없어. 그럼 잠깐 정도는 책임을 내려놓고 어린아이로 살아볼 기회가 있어야 하는거 아니야? 넌 그것도 이해를 못해준다는 거야?"



마음의 밑천이 드러났다.

내 속마음은 전부 까발려졌으니, 더 이상 숨기거나 가식을 떨 이유가 없다.

여기서 더 추락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알려줄게. 어른이 된다는게 얼마나 무서운건지."



붙잡힌 안젤리나의 팔목은 벌써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밀어붙였다.

기세에 눌려서인지, 큰 힘을 가하지 않아도 그녀의 몸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안젤리나의 등이 소파에 닿자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상체가 기울어졌고

중심을 잡기 위해 나머지 손으로 그녀의 머리 옆을 짚자 영락없이 먹잇감을 덮친 맹수 꼴이 되어버렸다.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으로 뭘 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그녀에게 화를 냈지만, 다치거나 상처받는걸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냥 겁을 주려는 의도였다. 안젤리나가 스스로 자각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 꽤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던 건 사실이니까.

어두운 방에서, 남자랑, 술을 마신 채로, 옆자리에서, 단 둘이.

안젤리나가 말한대로 그녀가 "어른" 이라면, 충분히 험한 짓을 당하고도 남을 상황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데...



"..."



왜 아무것도 안하지?

비명을 지르거나.

몸부림을 치거나.

손을 뿌리치거나.

하다못해 그냥 그만하라고 한 마디만 했어도 그만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박사."



나는 그대로 벙쪄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망부석처럼 굳어있었다.



"박사는 아직 나를 어린애라고 생각하는거지?"

"뭐?"

"그러면... 지금 해줘."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박사는 내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아. 난 그런거 원치 않아. 차라리 그럴 바에야... 박사가 직접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줘."

"그게... 무슨..."



안젤리나의 팔목을 붙들고 있던 손아귀에 저절로 힘이 풀렸다.

그러자 그녀는 풀린 손을 뿌리치지 않고, 아직도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손으로 되려 깍지를 끼며 맞잡아왔다.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이게 무슨 상황이지?

방금까지만 해도 터질듯이 끓어오르던 흥분은 어느새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혹여나 이게 질 나쁜 농담이 아닐까 싶어 그녀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녀는 지금껏 지어보인 적이 없을 정도로 진지한, 그와 동시에 적잖게 긴장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결심과 각오를 했다는 뜻이겠지.

이건 설마...



"잠깐, 안젤리나. 안 돼. 이건..."

"어른이 되어야 하는건 나 뿐만이 아니야. 박사도 마찬가지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넌... 그러니까... 그..."

"미성년자?"

"그래! 그러니까..."

"어차피 신년까지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까. 별 상관 없지 않아?"

"..."



안젤리나의 설탕 냄새.

내가 덧씌운 커피 냄새.

그리고 어른의 술 냄새.

전부 뒤죽박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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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정말 사소한 것에도 쉽게 휘둘리곤 한다.

말 한 마디에 휘둘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하고

술 한 방울에 휘둘려 그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잊는다.

나는 예전부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라고 믿어왔지만, 이젠 잘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온 나 자신과 어떤 한 여자가 그 가치관을 너무나도 쉽게 부숴버렸으니 말이다.

나도 변했고, 그녀도 변했다.

하지만 그게 썩 나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변했다" 라는 말에는 질책과 후회의 뜻이 담겨있지만, 동시에 감탄과 응원의 뜻도 담겨있으니까.



"어, 왔어?"



1월 1일 새벽, 로도스 함내 식당. 꽤 늦은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불러낸 이유가 있다.



"박사! 먼저 와 있었네?"

"이런 날에 늦으면 안되니까."

"일단 불러서 오긴 했는데... 대충 짐작은 가지만, 무슨 일이야?"

"그야 당연히..."



준비해온 물건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설마... 또 술이야?"

"안심해. 이번엔 그냥 캔맥주니까."

"그래도 술이라면 이제 쳐다도 보기 싫은데..."

"저번 일은 미안했어. 설마 사르곤산 과일주라고 딴 게 희석해서 먹는 칵테일 용 술이었을 줄은 몰랐지."

"그거... 도수가 어느정도 된다고 했지?"

"40도. 그래도 작은 잔으로 두 세번 마셨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이건 그렇게 센 건 아니지?"

"적당히 마시면 저번처럼 머리가 깨지는 일은 없을거야."



그 말을 듣고는 그제서야 의심이 좀 가셨는지, 안젤리나는 캔 하나를 집어들었다.



"오늘은 진짜 정식으로 안젤리나가 성인이 되는 날이니까, 축하해야지."

"그럼 저번에 먹었던 술은?"

"그건... 그냥 실수였던 걸로 하자."

"나 그때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박사는 기억나는거 있어? 나 뭔가 사고친건 아니지?"

"글쎄... 나도 필름이 끊겼나봐. 기억이 안 나네."

"수상한데..."



맥주캔 한 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둘만의 조촐한 연회가 시작됐다.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안젤리나가 정말 어른이 된다면, 난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하겠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망설이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안젤리나의 말대로, 어른이 되어야 하는건 그녀 뿐만이 아니니까.

캔 속에 담긴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갈 때, 나의 길고도 험한 성인식이 비로소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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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는 없다

글싼놈이 안해봐서 모른다

알아서 뇌내망상 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