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https://m.dcinside.com/board/hypergryph/113523
피드백 환영!
--------
눈에 띄게 쌀쌀해진 날씨와 함께, 처리해야 할 서류 업무들도 점차 늘어갔다. 대원이 늘어난 만큼 복지 보장이나 시설 준비, 외부 대원의 경우 소속 단체와의 협의 등을 처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업무량이 살인적인 건 자비를 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피곤해 보이는군.”
내 앞에 있는 오늘자 비서가 서류를 넘기면서 하품을 하고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프라마닉스를 떠오르게 하는 둥글고 짧은 귀에 길고 부드러워 보이는 반점 섞인 흰 꼬리. 눈밭을 연상시키는 흰 머릿결과 피부색. 그와 대비되게 검은색의 정장을 멋들어지게 입고 있는 훤칠한 키의 미남. 현재 로도스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쉐라그의 젊은 통치자이자 프라마닉스의 오라버니이기도 한 실버애쉬다.
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포트가 있는 선반으로 향했다. 그에게 비서업무를 몇 번 담당하다 보니, 커피라거나 간식 취향 정도는 알게 되었다. 분명 설탕 두 스푼이었지.
생각해보니 예전에 프라마닉스에게 커피를 줬을 때 쓰다고 찡그리는 것이, 커피포트가 끓는 것을 기다리며 떠올랐다. 혹시 쓴 걸 싫어하는 건 남매 공통인 건가. 아메리카노가 어울릴 것 같은 차가운 이미지랑은 정반대의 취향이라 무심코 인간미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걸 떠올리니 주전자 옆에 있는 달력으로 눈이 향했다. 어느새 프라마닉스와의 ‘비밀’을 가지게 된 지 2달이 가까워졌다. 그 이후로도 우리 둘은 간간이 농땡이를 부려 그 장소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요깃거리로 삼아 난간 너머의 풍경을 즐기게 되었다.
...그 덕에 업무태만이라는 명목으로 켈시에게 무진장 혼나고 아미야에게도 잔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농땡이가 가지는 매력은 생각보다 중독성이 컸던 탓에, 머리로는 안 하려고 해도 솔직한 몸이 먼저 움직여 버리게 만들었다. 프라마닉스가 자주 농땡이를 부리는 것엔 이유가 있다는 걸 대충 알 것 같단 말이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잡념은 하늘로 날아가는 비눗방울처럼 저 멀리 사라졌다. 다 끓여진 물을 커피가루와 설탕이 섞인 잔에 넣은 다음 잘 녹도록 티스푼으로 부드럽게 휘저었다.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두 잔을 쟁반에 올려두고, 입이 심심할 거 같으니 소량의 비스킷도 커피랑 동행시켰다.
쟁반에 든 컵을 실버애쉬에게 넘겼다. 그는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컵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맛이 그럭저럭 맘에 든 건지, 처음엔 귀가 쫑긋했지만 곧바로 살짝 기울여졌고, 꼬리의 끝부분이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에 약간 안도감이 든 나는, 원래 있던 자리에 앉아, 그처럼 잔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은은한 블랙커피의 향이 내 코랑 혀를 잔잔하게 감싸기 시작...
“요즘 엔야랑 사이가 좋아보이더군.”
“푸흡?!”
뜬금없이 나온 말에 졸지에 얼굴이랑 옷이 커피로 범벅이 되었다.
난 급히 상 위에 있는 티슈를 잡초 뽑듯이 집어 커피가 묻은 부분을 닦아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실버애쉬.”
엔야. 프라마닉스의 본명이다. 갑자기 왜 그녀의 이름이 구설수에 올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 때문에 저 말을 꺼낸 거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을 때, 실버애쉬는 무심한 듯 커피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요즘 너랑 엔야가 둘이서 같이 있는 빈도가 늘었다고 엔시아랑 내 수행원에게서 들었다.”
클리프하트에, 수행원이면... 마터호른? 아니면 쿠리어? 그렇게 눈에 띄었나... 확실히, 프라마닉스가 비서일 때는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농땡이를 피우러 갔으니, 그들에게 눈에 띄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다.
“궁금해서 직접 몰래 따라가 보려 했지만, 그 아이가 눈치챘는지 발을 얼려버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덕에 너희 둘이 뭘 하러 갔는지는 알 수는 없다만...”
그 성녀님, 발을 얼리는 게 취미라도 되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내 발을 얼리려 했더니...
차곡차곡, 말을 함과 동시의 실버애쉬가 처리하고 있던 서류의 산이 점점 높아져 간다. 대화하고 있으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수행하는 저 실력. 쉐라그의 젊은 지도자가 간단하게 될 리가 없다는 증빙 중 하나겠지.
“적어도, 엔야 그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미소?”
“성녀가 되라고 내가 명령한 그 순간부터, 엔야의 얼굴은 얼음장과도 같이 차가워졌고,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일 없이, 멍한 눈으로 모든 것을 초연하듯 바라보게 되었지.”
나였더라도 그랬을 거다,라고 생각 없이 말하진 않는다. 실버애쉬 가문에 얽혀 있는 3남매의 엉킨 매듭은 매우 복잡하다. 흑백논리로 해결될 일이 아니며, 외부자인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난 가만히 그가 말하는 것을 듣기로 했다.
“그랬던 그 아이가, 다시 감정을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너의 앞에선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평범한 소녀처럼 말이다.”
담담히 말하는 실버애쉬의 모습을 보며, 어렴풋이 프라마닉스랑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급해 보이면서도 담담해 보이는 표정을 가진 그녀를 보고 다가간 게 시작. 그 이후로 그녀가 로도스에 협력하러 온 칼란의 성녀인 것을 알게 되고 오퍼레이터로서의 신뢰관계를 다져가고,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얼굴을 자주 봐온 만큼, 실버애쉬가 한 말에 의문점이 하나 남을 수밖에 없었다.
“미소라면 자주 짓지 않나? 단적으로 클리프하트랑 있을 때도 미소 짓는 걸 종종 봤는데.”
“엔시아랑 있을 때랑 다르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 아니겠나.”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고,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소만이 아니라, 꼬리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꼬리?라며 의문을 표현하는 날 보며, 실버애쉬는 잔 옆에 있는 비스킷을 집었다. 이윽고 바삭,하며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넌 모르겠지만, 엔야는 과거부터 가지고 있는 버릇 중에,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거리 내에 끌어안는 것처럼, 특정 인물의 근처에 꼬리를 두는 게 있었다.”
커피가 다 떨어져서인지, 잔을 향했던 실버애쉬의 손이 멈칫했더니, 급히 그의 무릎 위로 도망쳤다. 얘기가 끝나는 대로 한 잔 더 타줄까 물어봐야겠군.
“그렇게 하는 대상은 지금 돌아가신 부모님, 그리고 성녀가 되라고 말하기 전의 나. 그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지. 얼마 전부터 네가 하기 시작한 걸 제외하고는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 버릇이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 보네?”
“역시 나의 맹우답군.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 너라면 저 예시를 보고 감이 왔을 테지?”
대답했다고 생각했더니 다시 훅 들어오는 그의 질문에, 난 말문이 막혔다. 프라마닉스의 부모, 실버애쉬, 그리고 나? 앞의 3명은 가족일 테니 그렇다 쳐도, 왜 내가 포함되어 있는 거지? 날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뜻인가? ...아니다. 그렇기에는 저 목록엔 프라마닉스 본인이 소중히 여기는 여동생인 클리프하트가 빠져 있다. 즉,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기억상실이라고는 해도 꼴에 박사 학위 딴 인간의 프라이드를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내 뇌 속의 엔진이 과열되는 것이 느껴졌다. 편두통이 느껴질 정도로 머리를 굴렸지만, 명쾌한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 같은 모습에 눈치챈 듯, ‘모르나 보군’이라며 실버애쉬는 옅은 한숨을 쉬며, 하고 있던 작업을 멈추며 말했다.
“그 아이가 널, 마음속 깊이 의지해도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마음속 깊이... 의지한다고...?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 답변이 날라오자, 과열되었던 머릿속이 냉각제라도 넣은 듯 식어갔다. 그 칼란의 성녀님이 나를 의지한다? 첸씨의 나이가 17세라거나 안셀이 알고보니 남자다 같은 개소리라도 들은 것 마냥 현실성이 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내 표정에 신경쓰지 않은 듯, 실버애쉬는 나에게 질문했다.
“괜찮다면 말해다오. 네가 엔야한테 무엇을 한 건지.”
단순히 호기심에서 발생한 질문이었겠지만, 어째선지 동생 걱정이 지극하신 이 젊은 통치자님의 시선이 심히 따갑다. 여동생의 호의를 산 나에 대한 가벼운 질투심이 아닐까 하는 망상도 해봤지만, 포커페이스에 능한 실버애쉬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난, 기분 탓이려니 하며 그저 같이 노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없다고 대답해 줬다.
“그저 같이 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라. 그런가.”
실버애쉬는 잔 위에 올려져 있는 나머지 비스킷을 입에 넣으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서류작업이 끝난 건가 싶었지만, 아직 전체의 10% 정도의 종이뭉치가 그의 오른쪽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니었다.
“어쩌면 엔야는... 아니다.”
그 말과 함께 실버애쉬는 깍지를 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살짝 쿠션을 두드리는 꼬리의 뒷부분. 뭔가 생각할 게 있을 때 그가 보이는 행동이다. 예전에 난간에서 봤던, 프라마닉스가 보였던 표정이랑 몹시 흡사한 게, 역시 남매라서 닮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나는 조용히 일어서서 다시 주전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페인을 연속으로 섭취하면 몸에 안 좋으니, 이번엔 과일차를 주는 게 낫겠지. 커피포트 아래에 있는 소형 냉장고에서 마터호른이 만들어준 오렌지 마멀레이드가 들어가 있는 병을 꺼냈다. 티스푼으로 몇 번 머그컵에 옮겨 담고, 끓인 물을 천천히 넣어서 저어줬다.새콤한 오렌지의 향이 증기를 타고 내 콧속으로 들어오는 것에 잠시 묘한 기쁨을 느끼며, 머그컵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여전히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내 인기척을 못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하지도 않은 걸 보고, 난 조용히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아직 해야 할 작업은 많다. 오늘 저녁식사 이전까지 끝을 봐야 다음 스케줄에 늦지 않을거다,라고 다짐하며, 난 작업을 속행했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나의 맹우여.”
사색에 잠겨 있던 실버애쉬가 갑자기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에게 질문해왔다.
“넌, 엔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덕분에 다시 한번 내 옷이랑 얼굴은 커피 범벅이 되어버렸다.
문학추
ㄱㅅㄱ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