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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로도스의 정규 업무 시작 시간이 7시인 걸 감안하면 야간 순찰 담당인 오퍼레이터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꿈나라 속을 헤엄치고 있을 때지만, 지금의 내겐 남몰래 외출을 해야 할 시간이다.

‘좀 더 멀리, ‘농땡이’를 부리러 가지 않겠어요?‘

어젯밤 프라마닉스가 내게 건넸던 권유다. 분위기에 취해 있어서인지 난 아무런 뇌내 필터링도 없이 그걸 받아들였고, 그것에 그녀는 멀리 갈 것이니 새벽 4시까지 부유선의 후미쪽 출구로 나와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의 수행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수행원이 누구며 대체 어디를 가자고 하는걸까,라고 의문을 품으며 짐을 전부 확인한 난, 큰 배낭을 등에 지고 조용히 방을 나와, 아무도 없는 고요한 복도 속에 내 발자국 소리만이 울리는 걸 들으며 출구로 발을 옮겼다.

출구에 다다르자 밝은 빛이 나의 시야를 방해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서서히 시야가 빛에 적응해 가자,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와일드한 느낌의 남성이 차에 기대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날 보자 똑바로 선 채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난 그것에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실버애쉬의 수행원이자 집사이기도 한 마터호른이었다. 프라마닉스가 말한 수행원이 그였구나.

“어쩌다 보니 새벽 일찍 깨워버리게 했네. 미안.”
“아닙니다. 엔야 아가씨의 부탁인걸요.”
“그나저나 프라마닉스는 어디 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시야가 가려졌다. 깜짝 놀란 나머지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내 눈을 가리는 무언가에 손을 옮겼다. 가죽의 질감이 나는 사람의 손이라 뭔가 의문을 가졌지만, 곧바로 장갑을 낀 누군가의 손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굴까요?”

무덤덤해 보이는 톤의 목소리를 듣자 하니 곧바로 난 이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처음엔 누군지 모르겠다는 농담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곧바로 손가락이 눈알을 찌를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프라마닉스. 갑자기 웬 장난이에요?”
“가끔은 이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에요.”

그 말과 함께 프라마닉스의 손이 멀어져 갔고, 다시 내 시야를 되찾았다. 어두워졌다 밝아졌다를 반복해 피곤해져서인지 잠시 눈을 찡그렸다가, 프라마닉스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앞에 있는 광경에 잠시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평소의 전통복이 아닌, 검정색 모피 외투를 걸친 허벅지 정도까지 내려가는 푸른색의 상의와 허리를 감싸면서 신체의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시키는 검은색 코르셋. 그리고 상의 아래로 파도와 같이 넓게 퍼지는 흰색과 금색 자수가 새겨진,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의 드레스. 옷에 깔 맞춤한 것처럼 보이는 푸른색과 검은색의 조화가 이뤄진 털모자. 마지막으로 가죽 장갑 너머로 보이는 금색 체인이 매달린 값비싸 보이는 검정색 핸드백.
그 모습은 마치 동화에서 볼 법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과도 같아서, 지고의 진리를 깨달아버린 고대의 연구자처럼 넋을 잃고 봐버렸다.

“프라마닉스, 그건 대체...”
“사빌로우의 의류 장인에게 주문 제작 받은 옷이에요. 가끔씩은 여행 가는 기분으로 다른 옷도 입어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 말과 함께 매우 빠르게 살랑거리는 꼬리며 쫑긋거리는 둥근 귀. 평소와는 달리 생기가 들어온 회색 눈. 딱 봐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다.

“그래서, 어떤가요?”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부드러워 보이는 저 드레스가 나풀거린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게 시선을 보냈다. 의상의 평가를 해달라는 건가? 당연히 즉답으로 넋을 놓을 만큼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모처럼의 색다른 그녀를 본 것에 감사함을 담고 싶었다. 좀 더 세심하고 아름다우며 감동시킬 만한 미사여구를 붙여주어야 한다고 내 가슴이 속삭였다.

“어울리네요. 진짜로 예뻐요.”

허나 내 절망적인 표현력은 그런 내 의도를 충족시켜 주지 못 했다. 프라마닉스의 새로운 옷단장에 이성이 마비해버린 나머지, 대답조차 기름이 다 떨어진 란셋처럼 한 글자 한 글자 띄어서 답해버렸고, 그 표현마저도 너무 단답이었다. 이래선 듣는 사람 입장에선 당혹스럽고 불쾌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속으로 왜 학교 다닐 때 전공을 문예과로 하지 않았냐며, 했으면 더 좋은 표현을 자연스레 할 수 있지 않았냐고, 괜히 애꿎은 기억을 잃기 전의 나에게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고마워요.”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프라마닉스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고, 출발하자고 말하면서 차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째선지 우리를 향해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터호른은 덤이다. 설마 괜찮았던 건가?



깜빡 졸기 시작하고 2시간쯤 지났을까. 덜컹거리는 진동소리가 내 소소한 수면시간을 방해했다. 눈을 비비고 잠시 하품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자, 새까만 하늘에 주황색 물감이 더해지기 시작하는 걸 목격했다. 약간 경사가 진 비포장도로를 질주하는 차 바깥으로 눈으로 뒤덮인 숲들이 내 뒤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로도스 아일랜드 소속 부유선은 저 멀리서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방향을 보아 추측하는 건데, 아무래도 우리는 평소에 난간 너머로 바라봤던 쉐라그의 산맥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깨고 나서 5분쯤 지났을까. 차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더니, 앞에서 도착했다는 마터호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찰칵하며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리고, 난 문을 열어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시야 저 너머로 펼쳐져 있는 해돋이로 인해 연한 주황색으로 물든 광활한 설원. 멀리 있어 잘 안 보이지만 순록으로 추정되는 동물들이 활주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뒤돌아서자 그곳에 있는 건 거대한 나무가 양옆을 지키며 인사하듯 수그리고 있는, 목재로 만들어진 진한 갈색의 멋들어진 1층 주택. 꽤 오래된 것 같아 보이면서도 계속 관리되어 있는지 우릴 맞이하는 정문의 벽돌 길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는...?”
“예전에 가족끼리 살던 별장 중 하나에요.”

별장 중 하나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점에서 그녀의 가문이 가지는 재력의 편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가족끼리 살던 별장이라는 건 안 쓰인지 꽤나 오래됐다는 뜻인데, 이렇게 외견이 정돈이 잘 되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실버애쉬의 수행원들이 간간이 정돈해 주고 있다는 뜻이겠지.
정문을 열쇠로 열고, 트렁크에서 내려진 캐리어를 끌며 가는 프라마닉스를 따라가기 위해 나도 배낭을 등에 매고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뒤에서 운전석에 타 있는 마터호른이 날 불렀다.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박사님.”

뭔가 기대를 잔뜩 품은 것 같은 저 부담스러운 눈빛에, 저 잘 부탁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 몰라 당황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내 대답을 들은 마터호른은 웃으면서 곧바로 운전대를 잡았고, 우리가 왔던 방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차가 저 너머로 사라져가는 걸 본 나는, 다시 발걸음을 별장으로 옮겼다.

정문과 벽돌 길을 지나서 보이는 계단 위로 다섯 걸음. 그다음 왼쪽으로 꺾어서 현관으로 들어왔다. 실례한다고 작은 소리로 말하며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복도를 조금 걸어 오른쪽으로 꺾으니, 거실로 추정되는 넓은 방이 나를 맞이했다. 목재 바닥이랑 달리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벽난로와 부드러워 보이는 동물 털로 만든 카펫 주위로 감싸고 있는 3명 정도가 앉을 것 같은 긴 소파와 2개의 흔들의자. 그 뒤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아래의 식탁 용도로 추정되는 직사각형 형태의 테이블과 5개의 의자. 이 별장의 주인 되는 자들의 인원 수, 그리고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 가게 만든다.
그리고 더욱 뒤에 보이는, 여러 사진과 서적으로 쌓여 있는 선반을 응시하고 있는, 모자를 벗어 양손으로 잡고 있는 프라마닉스가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오랜만이에요. 엔야가 왔어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향해 말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자, 그곳엔 커다란 액자가 선반에 세워져 있었다.
실버애쉬를 닮았으면서도 좀 더 중후하고 댄디한 느낌이 드는 미남과 프라마닉스랑 판박이라고 느낄 정도로 닮은 미녀가 밝게 웃으며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고, 그 주위에 세 명의 짧은 머리를 가진 어린아이들이 그들에게 달라붙은 채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사진인 줄 알았는데 중간중간 물감의 흔적이 보이는 걸로 보아하니, 전문 화가를 고용해 그리도록 한 거겠지. 각각 시크해 보이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거나, 무덤덤해 보이면서도 입꼬리는 올라가 있으며, 개구쟁이같이 해맑게 웃고 있는 것이 각자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과거의 실버애쉬 가문의 행복한 추억을 담은 모습.
어째선지, 입안이 서서히 말라가고, 등을 자연스레 곧게 피며, 고개를 살짝 숙여지게 한다.

“어머니랑 정말 닮으셨네요.”
“어렸을 때 자주 들었죠.”

그런 숙연해지는 분위기를 나름대로 타파하려고 말을 꺼내봤지만, 상황이 마땅히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그나저나 더 멀리 농땡이를 부리러 온다는 게 이곳이었군요.”

난 액자 주변을 돌아보길 시작했다. 어린 남자아이가 여동생을 업어주고 있는 사진. 아버지가 딸 두 명을 양손으로 들고 있는 사진. 어머니를 따라 하려는 듯 작은 손으로 직물을 짜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찍힌 사진. 산 정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당당히 웃고 있는 남매의 모습이 찍힌 사진 등. 이 가족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 나열되는 것이 보였으며, 그 사진들 사이사이로 ‘엔시오디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여러 가지 상장과 문패가 보였다. 현 쉐라그의 젊은 통치자님이 어릴 때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다는 걸 알게 해주는 증빙인 셈이다.

“여길 온 것도 성녀가 된 이후로 처음이네요.”

이리저리 신기하듯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날 살며시 본 프라마닉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하루 동안만 여기서 묵고 가는 걸로 해요. 괜찮죠?”
“네?”

갑작스러운 그녀의 파격적인 제안에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런 내 반응이 예상외라는 듯, 프라마닉스의 멍한 눈이 두세 번 깜빡였다.

“혹시 맘에 안 드시는 건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그... 외간 남자를 이렇게 집에 들여도 되나 싶어서...”

설령, 진짜로 나의 망상일 확률이 90퍼센트지만, 만약에 우리 둘이 그러고 그런 관계라 해도, 상대를 자신의 집에 묵고 가게 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담력을 요구하는 행위라고 난 생각한다. 이렇게 간단히 요구를 해 오면 나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다.
당황하는 나의 모습을 즐기려는 것일까. 프라마닉스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액자에 있는 부모의 초상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소개할게요. 옆에 있는 사람은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의료 단체의 수장인 사람이에요. 그냥 편하게 박사라고 부르셔도 돼요.”

존재하지도 않는, 초상화를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마치 실제로 앞에 그녀의 부모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분명히 기분 탓일 텐데 왜인지 초상화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위험에 언제나 달려드는 무모한 성격을 가진 주제에, 언제나 졸린 듯이 비틀거리고, 자기관리도 제대로 안 하고, 잠시 한 눈 팔면 복도에 쓰러져 있는 걸 볼 수 있을 거 같은 사람이에요. 거기에 가끔씩은 섬세함이 부족한 발언을 날리기도 하는 정말 곤란한 사람이죠.”

갑자기 시작된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디스질 덕분에 심장에 형태 없는 화살이 박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전부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을 할 여지도 없다.

“하지만 이건 결국 타인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는 상냥한 사람이란 뜻이겠죠. 섬세함이 부족한 것도 어떤 면에서 달리 말하자면 담력 있는 모습이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특이한 성격을 가진 게 이 사람뿐만이 아닌 곳에서 살다 보니 하루하루가 신기할 수밖에 없네요.”

디스질이 갑자기 나에 대한 칭찬으로 급선회했다. 기습과도 같은 그녀의 나에 대한 평가에 뭔가 볼이 간지러워졌다.

“칼란의 성녀가 되면 더 이상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따분한 인생을 살게 될거라 생각했는데, 로도스에 가면서, 이 사람을 만나면서, 과거에 묻어두었던 것들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어요.”

프라마닉스는 옆에 있던 내 손을 꽉 잡았다. 전장에서 자신의 무기를 쥐는 전사처럼. 어쩌면 절벽에서 자신의 무게를 지탱해 주는 밧줄을 꽉 쥐는 등산가처럼, 혹은 애지중지하는 인형을 놓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가녀린 손은 절박한 듯 나의 손을 탐했다.

“그러니, 안심해 주세요. 엔야는 잘 살아가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잘 살아갈게요.”

더듬기 시작하는 목소리와 손에서 미세한 떨림에 위화감을 느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애써 눈물을 참으려 하는, 촉촉이 젖어가는 회색 눈. 붉게 상기되어 가는 그녀의 뺨. 곧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이라는 이름의 댐을 억지로 막으려는 듯 꾹 잠겨져 있는 입술.
평소의 무덤덤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칼란의 성녀는 여기에 없다. 그저 빨리 떠나버린 부모를 그리워하는, 몸은 커졌지만 마음은 그대로인 소녀의 작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저택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떨고 있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나의 욕망이 모든 신경을 지배하려 들었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기엔 너무나도 겁쟁이었던 난, 그저 그녀의 감정이 정리될 때까지 손을 꽉 잡은 채 기다려주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