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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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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의도지?”

“뭘 말인가? 켈시 선생.”
“시치미 떼지 마 실버애쉬. 아무런 통보도 없이 박사랑 프라마닉스가 사라져서 비상 상황이 발생했는데, 갑자기 네가 와서 ‘1박2일로 휴가를 나갔으니 문제없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봐도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이네만.”
“무슨 속셈이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각 진영의 지도자급인 두 사람을 어디로 가게 한 거야?”
“그건 당사자인 둘만이 알고 있겠지.”
“네 비서인 마터호른까지 갑자기 사라졌는데 모른 척할 거야? 사라진 세 명 다 새벽 4시쯤에 부유선 후미 쪽으로 가는 것이 감시카메라로 찍혀 있다고. 네 입김이 불지 않은 이상 이런 우연이 발생할 리가 없잖아!”
“소중한 사람이 사라져서 마음이 심란한 건가? 평소와 달리 격정적이군.”
“...농담은 그쯤 하는 게 좋을 거야.”
“긴급 상황인데 장난을 칠 여유가 있을 리가.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하지.”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관련되지 않았다. 지금의 난, 잠시 동안은 쉐라그의 통치자가 아닌, 여동생의 행복을 응원하는 평범한 오라비일 뿐이니 말이야.”
“...너...! 쓸데없는 짓을...!”
“보고해야 될 건 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 보지. 힘내게.”
“...빌어먹을...”



“안아달라니, 무슨...”

쭈뼛쭈뼛. 지금 내 상태를 표현하기에 제일 어울리는 효과음일 거다. 등뼈를 터널 삼아 전신으로 전기가 흐르면서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해지는 이 감각. 혀가 매우 신 레몬을 삼킨 것처럼 얼얼하면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내 앞에 있는 처자가 말한 걸 어떻게든 다른 방향으로 해석을 해보려 했으나, 어떤 방식으로 해도 이건 남자와 여자 사이의 ‘그 행위’가 답일 수밖에 없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구나,라며 소리 없는 환호성이 내 안에서 들려왔지만, 그 기쁨은 내 머릿속의 이성이라는 괴물에 의해 무력으로 제압당해 버렸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곧바로 프라마닉스의 질문에 YES라고 즉답을 했을 것이다. 허나 방금 그녀가 말한 성녀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을 듣고 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일 중요시 되는 게 순결한 처녀로 있어야 되는 것이라 했는데, 갑자기 나보고 안아달라고 말한다?
이건 곡해해서 들으면 ‘성녀를 그만두도록 도와달라’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
아니, 그것은 미뤄두더라도, 성녀의 힘을 잃어버리는 행위가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지나가는 유치원생도 알 것이다. 이건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육욕에 몸을 맡겨도 될 가벼운 행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니 심장에 직접 끓는 물을 부은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지는 불쾌감과 함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대량발생하려 해서 무심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째서, 저에게 그런 요청을...”

분을 삭이며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한 글자씩 말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 두근 하며 한 박자씩 뛰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 숨기려 했지만 그녀랑 잡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그녀에게 내 감정을 들켰을 것이다. 아마 얼굴도 이미 눈살을 찌푸리고 있지 않을까.
들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무덤덤한 것인지, 프라마닉스는 나의 손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뭔가 생각하는 것인지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그녀는 준비가 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박사. 예전에 전투 중에 실수로 당신의 몸을 얼려버린 걸 기억하나요?”
“네?”

뜬금없는 질문에 내 뇌도 맥이 빠져버린 건지, 방금 전까지 이리저리 번지고 있던 내 부정적인 감정들이라는 이름의 용암을 깡그리 식혀버렸다.

“그때 하마터면 당신은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릴 뻔했던 위급 사항이었죠.”
“아, 분명 그랬죠.”

분명, 그녀와 만나고 난 지 얼마 후에 있던 리유니온의 잔당을 소탕하는 전투에서 발생했던 일이었다. 리유니온 병사 1명을 놓쳐버려 나에게 칼을 들이대는 순간 프라마닉스가 날 지키기 위해 급히 주문을 외워 얼렸지만, 위력이 컸던 탓에 그 병사와 더불어 내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얼어버렸고, 치료하느라 의료 오퍼레이터랑 불꽃에 관련된 오리지늄 아츠를 쓰는 오퍼레이터들이 자는 것을 마다하고 12시간 가까이 수술을 하게 되어버렸던 사건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건데, 그걸 갑자기 왜...

“사고를 저지른 것에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을 각오했습니다. 한 단체의 수장의 목숨을 끊을 뻔했던 일이니까요..”
“그야 뭐...”

위대하신 ‘왕의 지팡이’의 필라인 소녀님 덕에 몸이 자연 발화해버릴 뻔했다던가, 염국의 공무원씨에게 고전압 찜질을 당하다던가, A6의 그 꼬맹이의 전기톱으로 인해 스너프 필름을 찍을 뻔했다던가. 언제나 목숨을 담보로 가시밭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일상이니까. 프라마닉스가 한 것도 그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나를 지키려다가 그런 것인데 나무랄 이유가 있겠는가. 몸이 절단된 것도 아닌데 이런 걸로 화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당신은 웃으면서 절 용서해 주셨죠. 좋게 끝났으니 된 거라면서. 그걸 들었을 때부터 당신을 다시 보게 되었답니다.”

꽈악, 하고, 프라마닉스가 내 손을 좀 더 세게 쥐었다.

“로도스에 슬슬 적응해가면서, 제가 비서일 때 농땡이를 자주 피우러 갔는데도, 당신은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었죠. 가끔씩 나무라는 경우는 있었지만요.”

대원 파일에서 쉐라그의 성녀 시스템을 열람해보니 나무랄 수가 있어야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기괴한 시험과 업무를 행해야 되는데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진작에 우울증으로 자살하고도 남았다. 인간으로서의 존경심, 그리고 그런 중책을 맡은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합해지면서, 로도스에 있는 동안만은 자유롭게 있어줬으면 한다는 내 사심이 만들어낸 결과인 셈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토끼씨한테서 들었답니다. 박사 당신이 저의 편의를 봐주려 하고 있었다는 걸요. 그걸 듣고 당신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미야 녀석. 쓸데없는 소리를...

“두 달 전부터 저희 둘만이 가지게 된 비밀. 기억하시나요?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몰래 박사 뒤를 따라다니며 대화하는 것을 들었답니다. 과연 비밀을 제대로 지켜주고 있는지 의심했으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이 어리석었다는 듯, 당신은 진짜로 저와의 약속을 지켜주었죠.”

약속이니 당연하죠,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절반 정도는 아니다.
그때, 달빛 아래에서 그녀와의 약속했던 그 순간부터. 난 내 지금 눈앞에 있는 처자에게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의 순수한 호감이 아닌, 남성 대 여성으로서의 호감. 달리 말해서 애정이라 표현해도 무방하겠지.
그때부터 그녀의 말 하나하나를 신경 쓰게 되고, 그녀를 더욱 알고 싶어졌고, 그녀의 호감을 사기를 원했다. 앞서 말했던 그녀의 편의를 봐준 것도 반쯤은 이 이유에서였다. 연애라는 걸 태어나서 처음 해본 나에게 있어선,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는 방법은 이런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것들밖에 못 했으니까.

“그렇게 몇 달간 당신을 봐오면서, 전 오랜만에 느끼게 되었습니다. 온정(溫情)을. 감사(感謝)를, 그리고 신뢰(信賴)를. 성녀가 되면서 어느새 설산의 바람에 마모되어간 그 감정들을. 당신이 제게 다시 알려주었어요.”

프라마닉스는 내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붉어진 뺨에 닿도록 두었다. 겨울바람에 노출되어서 그런지 손끝에서 살짝 차가운 느낌이 났다.

“그런 당신이기에, 제 모든 걸 기대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설령 성녀의 자리를 잃더라도, 당신은 아무 상관없이 평소처럼 절 대해줄 거라 믿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게 됐어요.”

두근, 두근, 하며 다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방금 전까지의 부정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닌, 기쁨에 대한 내 몸의 순수한 반응이었다.

“다시 물어볼게요 박사. 절, 안아주실 건가요?”

프라마닉스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조금만 앞으로 다가가면 입술이 겹쳐질 정도로 가깝게. 그녀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눈을 살며시 감으며, 윤기나는 분홍색 입술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긴 꼬리가 은근슬쩍 내 등을 감싸기 시작한다. 마치 먹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각지대로 몰아세우려는 육식 동물처럼.
희미하게 그녀가 뿌린 향수로 추정되는 향기가 미풍을 타고 내 콧속을 유린한다. 바로 눈앞의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면서 이성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한다. 앞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한 발자국이면 완전히 선을 넘을 수 있다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꿀과 설탕과도 같은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와 함께 눈이 자연스레 프라마닉스의 신체로 이동한다. 지금도 살짝살짝 닿고 있는, 두꺼운 옷 너머로도 확연히 알 수 있는데 코르셋으로 조여져 더 부각되는 상체의 곡선. 잘록한 허리. 언제나 슬릿 너머로 보였던 부드러워 보이는 허벅지. 그걸 보며 온갖 추잡한 욕망들이 내 목을 옥죄여 오기 시작했다.
허나, 성녀의 요구 사항을 들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 빛 한 줄기가 비치며 보이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의 파도가, 실낯같은 마지막 이성의 끈이 되어, 정신 차리라며 육욕의 늪에 매몰되어 가는 나를 끄집어냈다.

“미안해요, 프라마닉스. 그럴 수는 없어요.”

물에 빠진 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 했던가. 난 눈을 질끈 감으며 내 마지막 이성을 쥐어짜며, 내 인생 최대의 저항을 외쳤다.
프라마닉스는 흠칫하면서 눈을 떴다. 뭔가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러길 몇 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내 손을 자신의 뺨에서 살며서 떨어트리면서 입을 열었다.

“어째서죠?”
“그건...”

섣불리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위눌린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목에 구슬이 박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왜 이제 와서? 뭐가 문제길래 말하는 걸 망설이는 거지?

“저로서는 불만인 건가요?”
“그게 아니에요.”
“그럼 어째서인가요?”

방금 전까진 뜨거워져 갔던 주변의 온도가, 액화 가스를 들이붓기라도 한 것처럼 급격하게 낮아져 갔다. 추위가 입고 있는 옷을 뚫고 등뼈를 꽉 쥐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 탓이 아니다. 분명 프라마닉스의 감정 기복에 의해 주변의 온도가 서서히 낮아지는 것일 터이다.
프라마닉스의 표정이 점차 굳어간다. 찡그리고 있는 미간. 축 늘어지기 시작하는 동물 귀, 서서히 내게서 멀어져 가는 꼬리.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우물쭈물할 필요 없어. 당당하게, 정직하게 말하면 돼.라고. 내 머릿속에서 채찍질해 온다.
빨리. 지금 당장 한 마디라도. 말해야 한다. 내가 가진 생각을. 내가 한 답에 대한 이유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한 마디. 단 한 마디로 축약하면 된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으면서, 거절당할까봐 계속 감춰왔던 한 겁쟁이의 순수한 감정을, 지금 전달한다.

“좋아합니다. 프라마닉스.”

놓을 뻔했던 그녀의 손을 다시 세게 붙잡는다.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상대가 아프건 말건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그때. 당신과의 둘만의 약속을 할 때부터, 계속 당신을 좋아해 왔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넘기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굳어갔던 프라마닉스의 얼굴이 다시 풀어지기 시작한다. 낯부끄러운, 나쁘게 말하자면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나의 고백에 어색한 듯, 평소와는 달리 그녀의 뺨이 잘 익은 과일처럼 붉어져갔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 당신을 안을 수가 없어요.”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몸을 살짝 돌려, 이미 석양이 사라진 보라색의 하늘을 바라봤다.
주사위는 굴러졌다. 이젠 말해야 할 걸 말하는 것일 뿐.

“전 로도스의 지도자. 당신은 칼란의 성녀. 각 진영의 지도자층이에요. 이런 관계에서 저로 인해 당신이 성녀의 자리를 잃어버리면, 설령 기적이 일어나 잃지 않더라도, 그 이후에 발생하는 여러 논란에 휩싸이게 될 거예요. 비밀로 한다 하더라도 소문은 순식간이니까요. 저희 로도스건, 당신의 쉐라그건, 분명히 양쪽이 정치적 분쟁에 휘말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상처투성이가 되겠죠.”

산들바람이 나의 뺨을 긁고 지나간다. 허나 말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미세한 풍압조차 예리한 칼날이 내 마음속 양심의 살점을 도려내는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100퍼센트 잃는다고 가정하면, 프라마닉스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로도스에게 큰 전력이자, 본인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 수단이에요. 당신이 그 힘을 잃어버리면 로도스 자체의 병력 손실로 이어지고, 당신을 보호하도록 오퍼레이터를 배치해야 되니 병력 분산으로 그 손실은 심해질 수밖에 없어요.”

이가 부서질 정도로 꽉 물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소리인 건 알고 있다. 전신에 두드러기가 난 것 같이 간지러워지고, 시멘트가 폐를 채운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지금도 나불거리고 있는 내 혀를 뽑아버리고 싶은 자기혐오에 기반한 충동이 덩굴처럼 날 옭아매기 시작했다.

아아. 알겠다. 왜 거절이라는 선택지를 고른 것인지.

“그리고 그 힘을 잃던 간에, 잃지 않던 간에. 우리 관계가 진척되어 당신이 제 연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리유니온을 비롯한 로도스의 모든 적들의 타겟이 되겠죠. 전 그런 게 일어나길 원치 않아요.”

난 두려웠던 거다. 내가 저 고백을 받아들이게 되면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이.
아니, 어찌 보면 저것들도 전부 구차한 변명이겠지.
관계를 가지면 성녀의 지위를 잃는다는 게 결정적인 문제가 되어준 게 아니다. 어쩌면 그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던 난, 이미 그녀에게 반한 그 순간부터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받기 싫다. 로도스의 모두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실버애쉬를 비롯한 쉐라그의 모두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그녀가, 다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복수의 소망들이 겹쳐지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날 옭아매어 왔기에.
순간의 기쁨을 택하기엔, 사랑을 하려는 남자이기엔, 수십, 수백 명의 대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야 하는 지도자로 있어야 한다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쇠사슬이 내 발목을 억세게 움켜져 있었기에.
그녀를 웃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는 용기가, 그녀를 안을 수 있는 자격이, 나에겐 일절 없다고 채찍질해 오면서, 꼴사납게도 지금까지 이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신의 손을 잡고 싶어요. 당장 당신을 끌어안고 싶어요. 당신의 온도를 느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에겐 저런 이유들 때문에 안 돼요. 아뇨, 저것도 변명이겠죠. 그래요. 전 두려워요. 저 같은 게 당신을 좋아해도 되는지. 제가 당신을 좋아할 자격이 있는 건지. 연인이 된다고 해서 계속 행복하게 있을 수 있는 건지.”

하지만, 역시 안 된다.
내 지위. 정치적 관계. 전체의 안보. 거기에 관계가 진척되면 생길 위험. 이 사랑이 불길 위를 걷는 위험일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걸 무시하고 계속 걸어왔던 것이다. 나라는 멍청이는.
그걸 깨닫게 되자, 가슴이 미어짐과 동시에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러면서 눈 주변이 아파 오면서 시야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기쁘면서도, 이걸 거절해야만 하는 나의 처지가 너무나도 처절해서, 쌓여왔던 감정의 둑이 허물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이기적인 인간이라, 죄송합니다.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볼품없는 인간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겁쟁이인 인간이라,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무심코 고개를 떨궜다. 안 그래도 추한데 눈물 흘리는 것까지 보이면 이보다 더한 수치는 없으리라.
뚝. 뚝. 이미 비어버린 지 오래인 술잔 안으로, 눈물이 쌓여간다. 할 말을 다했으면 본디 후련해져야 할 가슴이 오히려 손으로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이걸로 된 거다,라며 머릿속에서 외쳐왔지만, 그게 간단하게 되지 않는 게 사람 심리인 법이다. 몇 달간 품어왔던 감정을 하루아침에 내버릴 수 없잖은가?
참 추하게도 사는구나, 나란 놈은.

“박사, 일어나세요.”

자질구레하게 한창 울먹이고 있던 와중에, 뺨에 프라마닉스의 손결이 느껴졌다.
그녀는 양손으로 내 뺨을 잡고 지탱하듯 내 머리를 올렸다.
아무 말 없이, 언제나처럼 멍한 회색 눈으로 울고 있던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에서 손바닥으로 면적을 넓히면서, 그녀는 천천히 내 뺨을 어루만졌다.

“프라마닉스...?”
“가끔씩은 섬세하지 못한 당신. 피곤해하는 당신. 다 드러내고 있으면서 철저히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 언제나 다른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당신.”

안심하라는 듯, 따뜻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난 울음을 그친 아이처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 모든 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당신.”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아니, 정확히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주변의 모든 게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프라마닉스의 머릿결. 저 하늘에 보이기 시작하는 달빛. 옥상의 난간 너머에 앉으려 하는 작은 새, 무엇보다 내 눈앞에 보이는 눈감고 있는 그녀의 길고 매력적인 속눈썹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내 시야에 비쳤다.
느려진 시간은, 입술에서 멀어져 가는 어느 감촉과 함께, 정상으로 돌아갔다.
방금 내가 무엇을 당했는지 인지하지 못하기를 2초. 그 직후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하며, 틀어막혀 있던 기도가 확보되어 호흡을 다시 시작했다.
난, 방금, 그녀랑...

“당신은 저보다 좀 더 앞에 있는 상황까지 생각하고 있었군요.”

방금 전 일 때문에 끓고 있는 내 마음을 알기나 하는 건지, 프라마닉스는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날 지긋이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다듬으면서, 지금 1초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신 말대로에요. 지금 선을 넘어버린다면 그 이후에 발생하는 악영향들이 우리를 괴롭히겠죠. 서로 힘내서 이겨내자는 이상주의로도 해결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전 그런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어요.”
“프라마닉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과의 관계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요.”

내 어깨의 머리를 기댄 채, 그녀의 손이 내 손 위로 겹쳐지는 것이 느껴진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모순적인 감각이 느껴져 왔다. 안 된다며. 떨어져야 한다며 내 이성이 아우성쳤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저도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당신을 느끼고 싶어요. 당신과, 사랑을 하고 싶어요.”
“그래도...”
“그럼, 성녀의 힘을 잃지 않는 선에서 관계를 가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요컨대 살을 섞는 행위만 아니면 된다는 거니까. 말했다시피 신님은 그렇게 깐깐하지 않으니까요.”

과연 성녀가 저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허나 기껏 만들어진 이성의 울타리가 부서져 간다.
심장에 위험한 공세를 퍼붓는 그녀에게, 안간힘을 쓰며 저항해 본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일임을 아는 데도.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언제나 농땡이를 부려온 것처럼, 이번에도 느긋하게 시작해 가죠. 우리 둘이서.”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올라가려 한다. 방금 전까지 궁상떨면서 질질 짜고 있었는데 이번엔 또 웃으려 하다니, 참으로 지조 없는 육체라는 걸 새삼 한탄하게 된다. 울다가 웃으면 신체 어딘가에 털 난다는 어디선가 들은 소문이 갑자기 떠오르게 만든다.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아요. 별것 아닌 것이라도 그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요. 그것이 조금씩 모이면 더욱더 소중한 추억들로 바뀌어 가겠죠.”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이성을 지키려 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개소리라는 걸 지금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감정이 브레이크 없이 폭주할 것만 같은데 뭐가 빌어먹을 이성의 동물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추억들과 함께 언젠간 먼 미래에 있을 ‘진짜 행복’을 이룰 때까지, 같이 기다리는 거에요. 성녀가 되는 시련도 통과했는데 이걸 못할까요? 당신도 분명 할 수 있어요. 몇 달 간 봐온 제가 알 수 있으니까요.”

정말, 곤란한 사람이다. 있는 힘껏 밀쳐내려 하는 사람을 오히려 잡아당기다니.
그래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 자체에 어이없으면서도 기쁨이라는 이름의 꽃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워갔다.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기분 좋게 울컥해지면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 관계를 새로 하는 시작점이라는 의미에서, 박사, 방금 전 한 말을 조금 바꿀게요.”

그래, 그녀는 내가 거절한다고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지. 그 험난한 시험을 통과하고, 그 괴상한 요구 조건을 어떻게든 버텨 현재까지 살아온, 굳센 칼란의 성녀님이자 농땡이의 대가.
이런 감정적인 소모전 따윈 처음부터 무의미했던 것이다. 어떤 벽이더라도, 그녀는 담장을 지나가는 구렁이처럼 피해 갈 방법을 찾았을 테니까.

“절 안아주시겠어요? 성적인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의 의미로.”

생각할 틈도 없이, 난 행동을 옮겼다. 정확히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겠지. 코르셋으로 감싸인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손을 올리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잡았다. 프라마닉스 역시 양손으로 나의 등과 어깨를 감쌌다. 완전히 몸이 밀착하면서, 느껴지는 온기와 서로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머리 뒤로 날 감싸고 있는 그녀의 푹신한 꼬리가 방금 전까지 난잡했던 내 머릿속을 안정시켜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괜찮으니까, 부디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엔야.”

이젠 더 이상 망설임이 없어졌다. 프라마닉스라는 코드네임대로, 그녀는 앞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던 나에게 길을 인도하는 등대가 되어주었다. 쇠사슬이 내 발을 묶어 움직이지 못 하더라도 어떠한가. 그녀가 나의 손목을 잡고 이끌어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한 번 더 불러주실래요?”
“엔야.”
“한 번만 더.”
“엔야.”

그저 평범하게 손을 잡고. 꼭 끌어안고 있기만 한 건데, 몸이 붕 뜬 것처럼 가벼워지면서 마치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에 취할 것만 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락이 내 몸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계속, 계속 불러주세요. 당신이 저를 부를 때만은, 칼란의 성녀가 아닌 평범한 소녀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뒤에서 그녀가 날 놓지 않으려는 듯 악력이 세지는 것이 느껴진다. 나도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숨 막히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녀를 세게 안았다.
엔야. 엔야. 엔야.
몇 번이고, 그녀가 지겹다고 생각하게 만들 생각으로 끊임없이 외쳤다. 계속 부르고 싶었던, 내 마지막 자제심을 유지하기 위해 최후의 발악으로 프라마닉스라고 부르는 걸 유지해 왔던 그녀의 본명을. 내 앞에 있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이름을.
지금 이 순간부터는, 마음껏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를 축복하는 듯, 저 멀리 있는 별들의 바다에서 이슬 두 방울이, 긴 궤적을 그리면서 저 지평선 너머로 떨어져 가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