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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할 말은 그게 다야?”
눈앞에 있는 악마의 실루엣을 띄고 있는 녹색 머리 여성이 종이를 책상에 떨구며 묻는다. 그녀를 엄호하는 정체불명의 검은 괴수, Mon3ter가 내 몸을 꽁꽁 묶어 천장에 매달고 있는 채로, 난 최대한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피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와 함께 로도스를 만든 동업자이자, 현재의 나, 아미야랑 더불어 로도스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인 켈시다.
예상은 했다마는, 로도스에 돌아오자마자 요 모양 요 꼴이라니. 나의 가엾은 처지에 속으로나마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죽이는 것만은 봐주세요.”
“평소에 날 뭐라 생각하는 거야?”
켈시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걸음 소리가 한 발자국씩 울려 들어오는 게 마치 전장에서의 포탄 소리와도 같아서, 미녀의 형상을 가진 저승사자가 낫을 들고 나에게 접근하는 것만 같았다.
이프리트보다 더 괴팍하고 전투 모드의 마토이마루보다 냉혹한 주제에 속내를 알 수 없는 건 실버애쉬에 비견될 수준의 악마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진짜로 말하다가는 안 그래도 간당간당한 목숨이 먼지가 돼버릴 거 같으니 자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 리유니온과의 대치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인데 경호원도 없이 로도스를 나가? 그것도 업무가 밀린 상태로 땡땡이를 쳐?”
손에 쥐고 있는 종이뭉치로 손찌검을 날리듯 내 양쪽 뺨을 사정없이 두들긴다. 아프지는 않는데 기분이 점점 나빠진다.
“게다가 그 누구도 아니고 칼란의 성녀를 데려가? 실버애쉬에게 약점 잡히려고 아주 작정을 했나 봐? 미쳤어? 기억을 잃었더니 이성까지 같이 밥 말아먹기라도 한 거야? 이참에 도베르만에게 부탁해서 정신단련이라도 시켜줘?”
언어에 물리력이 있다면 아마 지금쯤 10번쯤 죽지 않았을까 싶다. 날붙이가 가슴을 꿰뚫고 총알이 머리를 난타하는 기분인데,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전부 다 맞는 말이야 반박할 수 있을 수가 없으니 원통할 노릇이다.
그런 반면에, 용문의 그 팀장님이랑 말싸움할 때도 조목조목 따지며 냉철하게 대응하던 그 켈시한테서 이렇게 사막의 모래폭풍을 연상시키는 매서운 언어의 파도가 나올 수 있다는 거에 신선함과 위화감을 동시에 느꼈다.
“저 켈시, 평소보다 신경이 곤두선 것 같은...”
“닥쳐.”
켈시의 폭언과 함께 Mon3ter의 구속이 풀렸다. 2m 가량의 높이에서 매달려 있다가 갑자기 풀려버리니 아무 대처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이랑 강렬한 키스를 해버렸다.
얼굴 전체를 굼의 프라이팬으로 맞은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면서, 양손으로 옷에 먼지를 턴 다음, 오래 압박되어 있었던 허리를 달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런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켈시는 분이 덜 풀린 건지 얼굴을 찡그린 채, 다시 의자에 앉아 산더미같은 서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쌓인 업무들 전부 네 방에다 가져다 놨으니까 빨리 처리해. 6시간 이내에 끝내오지 못하면 30분마다 업무 한 개씩 추가시킬 거야.”
“너무한 거 아냐?”
“무단결근한 벌칙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틀치를 6시간에 끝내라는 건...”
“6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어들고 싶어?”
지금 당장 달려가서 시작해야겠군.
◎
“켈시 선생에게 제법 곤란한 일을 당했나 보군.”
실버애쉬가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내게 물었다.
“놀리러 온 거라면 나가줄래?”
“설마, 나의 맹우가 곤란에 처했길래 도와주러 온 것일 뿐이다.”
“도와주러 왔다면서 지금 10분째 차만 마시고 있잖아.”
그에게 시선을 맞출 여를도 없이, 여러 개의 박스에 쌓인 서류들을 재빨리 정리하고 있다. 다행히도 아미야가 결재해야 할 서류랑 읽어야 하는 서류를 분류시켜 놔줘서 혼동하는 일은 없으니, 이대로면 6시간 이내에 아슬아슬하게 완료할 수 있을 거 같다.
오퍼레이터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보다 빨리 끝나겠지만, 설마 켈시 녀석, 날 아주 제대로 혼낼 생각이었는지 오늘 비서업무를 맡을 오퍼레이터에게 유급휴가를 줘버릴 줄은 몰랐다. 어떤 면에선 리유니온보다 더한 악질이다.
“그래서, 여행은 즐거웠나?”
“누구 덕에 아주 즐겁게 갔다 왔지.”
다 마신 찻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실버애쉬가 질문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손안에서 놀아난 꼴이 됐긴 했지만, 그 덕에 나에게도 여러 진전이 있었으니 나쁘게 생각할 수준은 아니다. 물론 고맙다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그럼 이제 슬슬 호칭을 매부라 부르면 되나?”
“무서운 형님을 가지고 싶진 않은데.”
엔야와 관련된 저 곤란한 질문들. 며칠 전까지는 식은땀을 흘리며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겠지만, 마음을 다잡은 지금으로선 평범한 유머로 느껴진다. 진작에 이랬으면 좋았을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었다.
실버애쉬는 그런 나의 반응에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자리를 옮겨 내 앞쪽의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선 내 오른쪽 상자에서 서류를 한 움큼 쥐어서 꺼내,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굳이 안 도와줘도 되는데. 오늘은 비번이잖아?”
“여동생들을 보살펴주고 있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 생각해둬라.”
또 이 녀석이 뭔 생각을 가지고 이러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은 이 종이뭉치의 산을 처리하는 게 급했던지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에게 업무 일부를 맡긴 채, 난 잠시 들었던 고개를 다시 내려 서류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사무실은 다시 침묵을 되찾았고,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
실버애쉬의 도움 덕에 비교적 빨리 업무 처리를 끝내서, 난 곧바로 방을 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업무 처리 도중에 엔야로부터 일이 끝나면 잠시 방으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아서다.
그녀의 방 앞에 도착하고 나서, 잠시 복장상태를 봤다. 면도도 확실히 했고, 옷도 깔끔한 걸 확인한 후, 문을 약하게 두 번 두드렸다. 노크 소리가 끝나자마자 자동문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방 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목재로 된 벽 쪽에 붙은 흰색 벽돌로 쌓여진 벽난로를 둘러싸고 있는 3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소파. 그 뒤로 보이는 갈색 식탁에 쿠션이 깔린 두 의자. 석양이 지고 있는 것이 보이는 큰 창문 옆에 있는 침대와 서재.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돌아서 미소를 짓는 채 날 반기는, 사랑스러운 그녀.
뒤에서 자동문이 닫히고 잠금장치가 켜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난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프라마닉스?”
“둘이만 있을 땐 뭐라고 했죠?”
“미안해요, 엔야. 아직 좀 익숙치 않아서.”
잠시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름을 불러주자 곧바로 미소를 되찾는 그녀의 모습에 무심코 귀엽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였다면 상상치도 못할 저 반응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앞에서만 보여주고 있다는 우월감이 섞인 기쁨이 내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프라마닉스가 습관처럼 불러왔던 그녀의 코드네임이기도 하고, 아직 공식적으로 우리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 본명을 공공장소에서 부를 수 없는 상태니, 코드네임과 본명을 자유롭게 바꿔 말하도록 적응하기엔 시간이 좀 걸릴 듯싶다.
엔야가 창가를 보고 있어서 나도 시야를 옮겼더니 유리로 된 플라스크가 보였고, 그 위엔 종 모양을 가지고 있는 앙증맞은 흰색 꽃들이 사이좋게 저 하늘의 주황색 물감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분명 예전에 퍼퓨머가 가르쳐줬던...
“은방울꽃이네요?”
“네. 이번에 새로운 취미로 한 번 키워볼까 해서요.”
차 한 잔 마시자는 엔야의 권유를 받아들인 채, 난 벽난로 앞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건네며 바로 내 옆에 딱 달라붙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벽난로의 온기를 같이 느꼈다.
“박사, 은방울꽃의 꽃말을 아나요?”
“아뇨, 뭔가요?”
“비밀이에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엔야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먼저 궁금하게 만들어놓곤 답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 약간 얄미웠지만, 그것조차 지금의 내게 있어선 그녀의 매력이라 느껴졌다.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는 옛말이 떠오르면서, 역시 옛말에 틀린 게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나도 살짝 머리를 기울여 엔야의 머리랑 맞대었다. 쫑긋거리는 그녀의 동물 귀가 날 간지럽히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비어있는 내 손을 감싸려 하고 있는 푹신푹신한 꼬리의 감촉. 이 순간 하나하나가, 나에게 있어서 지고의 낙원과도 같이 느껴졌다.
“박사.”
“왜요?”
“저에게 행복아라는 걸 다시 알려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만 같았다. 아니, 내 몸이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머리, 어깨, 팔,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 따뜻함이 날 떠나지 않게 붙잡고 싶어서. 언젠가는 떨어져야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 새로운 날이 뜨면 다시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훗날에, 이 온기가 식어버리거나, 어쩌면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시련이 닥쳐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더욱더 강한 열기를 퍼뜨리며 그 눈보라를 헤쳐 나갈 것이고, 그 너머에 있을 ‘행복’이라는 미래를 찾아갈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벽난로의 불씨는, 그치지 않고 활활 타올라간다.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둘만의 여행을 인도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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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방울꽃의 꽃말은 '순결', '다시 찾은 행복'
※ 다음편은 새비지편! 자고나서 올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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