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에 박사가 고개를 들었다. 박사의 손을 주무르던 그녀의 손이 조금씩 그의 팔을 타고 올라와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박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저희도 가게를 새로 칠하고 간판도 다시 세우고 싶어요. 복수도 해주고 싶고요. 아니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할 거에요.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희생도 많이 따르겠죠. 만약 우릴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일이 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저희를 도와주세요. 아니 저희와 함께 해주세요.”


그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지만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꿈속에서 말을 거는 것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귓가에 요동치는 심장소리와 그녀의 목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거기에는 마치 최면을 거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러겠노라고 대답하려던 그의 시야에 검은 뿔이 얼핏 들어왔다.


되겠습니다. 저는…….”


박사는 공업용 풀이 붙은 것처럼 딱 달라붙은 입을 힘들게 뗐다. 머리에 추가 든 것처럼 묵직해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려 해보았지만 폐 속이 솜으로 가득 찬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고 머리를 흔들자 몸 전체가 흔들리며 휘청거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찢고 나올 것처럼 고통스럽게 뛰기 시작하자 박사는 신음을 흘렸다.

점원이 깜짝 놀란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놀란 눈으로 박사를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무언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박사의 어깨를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 올 때 안내를 받고 오셨었다고 했었죠? 근데 그거 아세요? 슬럼가는 낮의 길과 밤의 길이 다르다는 거. 올 때는 안전했던 길이 갈 때는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어요. 둘이 지날 만큼 넓었던 길이 갈 때는 혼자서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을 수 있죠.”


가게 안에 소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가게 밖에 어느 새 사내들이 돌아왔는지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하는 생각에 점원을 바라보자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박사가 그녀를 잡으려했지만 헛손질을 하며 휘청거릴 뿐이었다. 점원이 그의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고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돌려세웠다. 박사의 시야가, 머리가 온통 점원의 미소로 가득 찼다.


말해 봐요. 당신의 가이드는 당신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요?”

……어억?!”

사장님! 뭐하나?”


정신이 나간 그를 제정신으로 반쯤 돌려세운 건 검은 색 뿔 한 쌍이었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크루아상이 어느 새 박사에게 다가와 그를 뿔로 들이박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행동은 박사로부터 점원을 떼어내려는 것처럼 혹은 점원을 박사로부터 떼어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화장실 간다던 사람이 왜 옆구리에 여자를 끼고 있는데? 화장실 갈 거 아니면 민폐끼치지 말고 빨리 돌아오래이. 그리고 언니야, 이 색마는 신경 안써도 된데이! 여자만 보면 눈이 뒤집어져가 괜히 관심도 없는 사람 꼬시고 엉덩이 만질라칸다 안카나.”


관심도 없다는 말에 여점원의 눈이 무척 가늘어졌지만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머,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지금 무척 중요한 대화, 아니 면접을 하던 중이라……. 이 분의 대답에 따라 저희 관계가 결정될지도 모르거든요.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자리에 앉아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내도 엄청 중요한 일 때문에 찾아왔다 안 카요! 그러니까그러니까.”


소녀가 발끈하며 박사의 팔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몰캉거리는 소녀의 가슴이 느껴지자 도리어 심장이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민망해진 박사가 손을 빼려고 하자 소녀가 그의 발을 세게 밟았다. 덕분에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이성이 돌아왔다.


그냥 먹어도 이래 맛있으면 술하고 같이 먹으면 더 맛있지 않겠나?”


소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척 뜬금없지만 맛있을 것 같긴 하다.

여점원은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하고 웃고는 눈높이를 맞추려 몸을 숙였다. 하지만 크루아상의 눈높이보다 한 뼘 높았다. 마치 소녀의 키가 너무 작아서 이 이상은 맞춰줄 수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가겐 법을 준수해서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없는 '꼬마'아가씨한테는 술을 팔수가 없답니다.”

내는 다 커서 직업도 있고 책임도 질 수 있는 성인이니까 걱정 마이소. ‘이모’.”


이모라는 말에 지금껏 한번도 떨어진 적 없었던 점원의 미소가 사라졌다. 크루아상이 발뒤꿈치를 들며 점원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모와 꼬마 사이에 보이지 않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이상한 몸 때문인지 둘 사이에 끼어있어서 그런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폭풍에 고립된 난파선처럼 서있던 박사를 구조한건 밖에 서있던 사내들이었다.


, 돼지야. 빨리 나와 봐야 할.”


여점원의 눈을 본 사내들이 말을 하다말고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박사는 그녀의 눈이 바로 앞에서 본다면 돌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요리사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그는 점원이 박사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에 눈썹을 찌푸리자 눈썹 사이에 호두를 끼워놓은 것처럼 주름이 졌다.


저 다 컸거든요?”


점원이 박사에게서 떨어져 팔짱을 끼며 침묵에 대답했다. 요리사도 팔짱을 끼고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런 그들 사이로 흉터 난 사내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저기아까 짐 실어서 보냈던 차가 전복됐나도 모르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우리도 지금 막 연락받았어. 무슨 일 인진 몰라도 가 봐야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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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가 험악한 눈으로 박사를 돌아보았다. 이 골칫덩이를 토막 내야할지 솥에 넣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다고 박사는 생각했다. 침을 삼키며 죽음을 각오하는 그의 앞에 점원이 끼어들었다.


가게는 제가 보고 있을게요. 걱정 마세요. 남은 요리는 제가 할 수 있으니까.”


요리사와 사내가 서로를 마주봤다. 점원을 못미더워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푸주칼을 앞치마에 닦으며 걸어가는 요리사 곁에 야구배트나 못 박힌 각목 같은 걸 든 이들이 한 명, 두 명 씩 모이며 한 무리가 되어 골목을 떠났다.


그래서 코스 요리는 언제쯤 나옵니까. ‘’.”


크루아상이 침묵을 깨고 선공을 날리려는 걸 박사가 황급히 소녀의 입을 막았다. 점원은 더 이상 신경전을 벌이기 싫어졌는지 피곤한 표정으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크루아상은 범인을 연행하듯 박사를 질질 끌고 테이블로 돌아갔다. 박사는 그제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거 놔줘. 나 화장실 가야 돼.”

싫데이. 거짓말쟁이.”


크루아상이 볼을 부풀리며 그의 팔을 더 꽉 끌어안았다. 박사가 픽 웃으며 엉덩이를 만지자 소녀가 잉어처럼 튀어오르고 그를 걷어찼다.


글이 자꾸 이상하게 올라가지던데 왜 이러는지 아는 사람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