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 나는 그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후회는 항상 뒤늦게 찾아온다.










먼저 권한 건 레나였다.

“독타군, 오늘따라 피곤해보이네”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혹시 아로마 테라피 받아볼래?”

너무 자연스러워서 거절할 수 없었고

“이따가 방으로 찾아갈게”

무심결에 조금 설렌 것 같았다.


처음에는 모든게 어색했다. 그저 목석마냥 굳어서 분주하게 준비하는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으니까.

그녀의 테라피는 편안하게 누워서 향기를 맡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게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향기롭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아침에 몸을 뒤척이면서 그날 밤의 흔적을 맡았다.

그리운 향기가 났다.


그날 이후로도 이따금씩 레나가 먼저 찾아왔다.

“독타군, 오늘도 피곤해보이네”

“이번에 새로운 향을 만들어봤는데”

“저번에 독타군이 좋아했던 향, 다시 만들어봤어”

그때마다 가슴 한 켠에서 작은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녀의 태도가 너무 다정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사실은 좋았다.

그 향기가 좋아서, 분위기가 좋아서, 그녀의 사려깊은 목소리가 좋아서, 그녀가 찾아온다는 게 좋았다.

그녀가 다녀가면 항상 베개맡에서 그리운 향기가 났다.

베갯머리에 남은 잔향이 흐려질 수록 그녀가 다시 찾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먼저 그녀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건 나였다.

나를 위해서 그녀가 먼저 약속을 잡아야 하는 것도,

내 방까지 짐을 들고 왔다가 늦은 시간에 쓸쓸히 혼자 되돌아가야 하는 것도,

나 혼자 가만히 누워서 모든 편의를 누리고 있는 것도

모두 부당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독타군이 먼저 부탁한 건 처음이네.”

“내 방에서? 알았어. 미리 준비해둘게. 씻고 와.”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처음엔 평소와 똑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날 쓴 아로마는 차분하고, 우아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독타군처럼 솔직하다면 좋을텐데.”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있지. 독타군.”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기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여기 한 번 누워볼래?”

그녀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 사실 고민하고 있었어. 그런데 독타군이 먼저 부탁해줘서...”

“조금...좋았어.”

우리는 친하다고, 서로 잘 안다고 생각했다.

“...”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독타군...”

그날, 처음으로 그녀의 무릎을 베고

“나, 있지...”

처음으로

“조금 힘들었나봐”

그녀의 슬픈 표정을 보았다.



그날 이후로는 내가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

머리맡에는 작은 디퓨저를 얻어서 갖다두었다.

베갯잇에 잔향이 남지 않는 건 아쉬웠지만, 다른 걸로 만족할 수 있으니 개의치 않았다.



“이거 독타군이 좋아했던 거지?”

“응, 나는 이 아로마가 좋아. 뭐랄까, 편안하기도 하고, 조금 아련하게 느껴져.”

“아련한 향기가 나는구나.”

“응. 잘 모르겠지만 그리운 향기야.”

레나의 품에서는 항상 그 향기가 났다.



무릎베개를 하고 돌아오면 손, 머리카락, 목덜미, 그날 입었던 옷의 이곳저곳 그 향기가 배어들었다.

그 향기가 좋아서 시도때도 없이 나의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지냈다.

향이 너무 옅어진 것 같으면 다시 레나를 찾아갔다.

언제까지고 영원히 곁에 남아있길 바랬다.

레나도, 그 향기도.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면 안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좋았다.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어느 날, 레나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있지. 독타군, 혹시 오늘 아로마 테라피 받지 않을래?”

“어? 좋아. 이따가...”

“아니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두 걸음, 곧 닿을 것처럼 걸어왔다.

“독타.”

서서히 다가오는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녀는 내 오른손에 깍지를 끼고, 자기 얼굴을 어깨 위로 살포시 기대며 말했다.

“아로마...해줘.”

“나, 치유가 필요해.”

조금, 어쩌면 많이, 설렜다.

“내가 독타군 방으로 갈게.”

그녀의 머리칼에서는 여전히 그 향기가 났다.



부탁받은 아로마는 그녀의 방에 처음 갔을 때처럼 차분하고 우아한 향기를 뿜었다.

아니, 조금 더 먹먹하고 야릇한 향기가 났다.

잠시 남는 시간동안 피어오르는 보라빛 향기 앞에서 서있었다.

보라빛 향기.

외로움.

외로움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이 아로마를 만들면서 그녀는 얼마나 아파했을까.

그녀 곁에 있었다면 꼭 하고 안아줬을텐데.

내 머리칼을 쓸어줬던 것처럼.

흔들리는 불빛 앞에서, 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준비를 마치고 왔을 땐,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레나를 반겼다.

그리고 그녀가 해줬던 것처럼

다리 위에 그녀를 뉘이고, 머리칼을 쓰다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로마가 조금 슬프게 느껴졌을 뿐, 여느 일상과 똑같은 밤.

그 상태 그대로 끝냈어야만 했다.



“오늘은 아로마가 조금 차분하네.”

“응.”

“레나.”

“...”

“혼자서 참지 않아도 괜찮아.”

“...”

뒤척이는 그녀의 몸짓.

잠시간의 정적. 나는 그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독타군.”

흔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나, 있지.”

어쩌면 조금은 기대했을 지도 모르는 그 말.

그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헤어졌어.”

그녀는 눈물로 젖고 있었다.



레나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불만, 그녀의 노력, 갈등, 서로 주고 받은 마음의 상처, 이별 통보까지.

그녀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닦아도 마르지 않던 그녀의 눈물이 내 옷깃 너머로 스며올 때마다,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와중에도 그녀의 뜨거운 뺨이 손끝에 스칠 때마다,

실연의 아로마가 우리 주변을 감싸오는게 느껴질 때마다,

그녀가 너무 애처로워서 참을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슬픔에 젖어 퉁퉁 부어있던 그녀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웠다.

다정하게 가녀린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애처롭게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내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에 살며시 포개어놓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앞섶을 꼬옥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수줍은 듯 지그시 밀어내면서 고개를 피했다.

“아니야, 독타군...아니...”

한 손으로 그녀의 뒷통수를 지그시 누르며 다시 입을 맞췄다.

그녀의 향기에, 달아오른 두 뺨에, 뜨거운 열기에, 심장이 더욱 고동치는 게 느껴졌다.




“읏, 독타군...”

키스하고 싶어. 안아주고 싶어. 레나를 뜨거운 사랑으로 위로해주고 싶어.

“읏, 독타군, 이건 아니야...”

그런 일념 하나로 그녀의 웃옷을 젖혀올리고, 땀으로 흥건한 육체를 탐닉했다.

내 앞섶을 꼬옥 붙든 손아귀는 도저히 떨어질 줄 모르는 듯 했다.

“흑, 싫엇, 독타군...”

“아, 레나...!”

“읏, 안돼, 제발...”

그녀의 저항은 점점 사그라들고

“훌쩍, 우리 아직, 으읏, 독타군...부탁이야.”

애달픈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레나, 사랑해, 사랑해, 레나”

“독타군...제발...제발 부탁이니까...”

“싫엇, 안돼...흐읏”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 억세게 시도한 탓인지, 그녀의 꽃잎 사이에서 피가 흘렀다.

“독타군...너무...”

그런데도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너무해...읏”

멈출 수가 없었다.




“흑...으읏, 그만...읏!”

그저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제발...제발...”

그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읏...아아..레나...사랑해...”

그저 그녀를 너무 좋아했을, 사랑했을 뿐이었는데






“흑...너무해...너무해...흑...흐윽...”

무언가 잘못되었다.

“너무해...독타군...”

그걸 깨닫는 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독타군이랑...잘...지내고 싶었을...뿐인데...”

후회는 항상 뒤늦게 찾아온다.





다음 날, 복도에서 레나를 마주쳤다.

“독타군...아앗!”

내가 다가가려고 하자, 그녀는 겁먹으며 뒷걸음질 쳤다.

“미안해, 독타군, 정말 미안해.”

이후로도 레나는 나를 피해다녔다.

나도 레나를 굳이 쫓아가지 않았다.




며칠 후, 켈시가 서류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레나는 로도스를 떠났다.




레나가 나를 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와 관련된 물건은 전부 정리했다.

단 하나, 그녀를 울린 날 입었던 잠옷만큼은 제외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던 그날의 향기가 남아있는 마지막 물건이었다.

레나는 이미 떠나버렸다.

옷섶을 쥐고있는 손이 떨려온다.

마지막이니까.

옷깃에 코를 처박고 잔향을 몸속 깊이 들이마신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녀의 체취.

그녀의 다정한 미소, 사려깊은 태도, 사랑스러웠던 말투,

그녀의 무릎베개와 머리칼을 쓸어내려주던 손짓까지 모두 이렇게 생생한데.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더럽혀진 그 잠옷을 빨래더미 사이로 던져버린다.






맺음말

강간은 범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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