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아래서 설산을 오를 때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새하얀 세상은 따스한 차 한잔과 얇지만 부드러운 모포가 있던 우리의 어린 시절 방을 떠올리게 하진 않니?.
너의 뜨거운 피는 쉐라그의 만년설마저도 식히지 못하지만 너를 걱정하는 나의 마음도 그에 못지 않는구나.
내가 이런 기분일 때면 언제나 네가 나타나 날 끌어안고는 다 괜찮을거라고 속삭여 주었었지.
난 제자리에 멈춰서 주저 않고 싶을 때마다 너의 미소를 떠올리곤 해.
너와 내 몸에서 흐르는 피에 같은 예라군드의 축복이 깃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언제나 용기가 북돋아.
처음 만주원에서 도망쳐 아무렇게나 눈보라 속으로 파고들었을 때 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었단다.
이미 집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너와 내가 자매이고,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한번 빠져나가는 법을 배운 이후로, 습관처럼 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설산 속을 마치 앞마당처럼 헤매고는 했지.
날 찾는 목소리와 날 짓누르는 갖가지 책무, 그리고 감정들도 눈보라의 냉기는 버티지 못하더구나.
나는 그날 설산에서 시련을 극복한 이후 눈보라를 나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단다.
아니면, 우리 가문이나 쉐라그 사람들은 모두 그런 천성을 타고난 걸지도 모르겠어.
사람을 집어삼키는 산들도 기어이 정복하는 너나, 그런 악산이 자리잡은 쉐라그를 지배하려는 우리의 오라버니처럼 말이야.
하지만 엔시아, 나는 너나 오라버니와는 다르게 눈이 녹은 땅은 전혀 익숙치가 않구나.
밟을 때마다 소리없이 짓눌리는 폭신한 흙도 낯설고, 눈보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쇠로 된 이동도시도 다른 세계에 있어야 할 것만 같아.
결코 나약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란다. 그저 이런 생소한 감정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널 처음 떠올렸던 경험이 떠오르게 할 뿐이야.
이제 나에게 이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단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이제부터 알아갈 뿐이지.
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까지 느껴져. 이곳에서 나는 성녀일 필요가 없으니까.
이 얼음처럼 차갑고 설산보다 거대한 방주에서 나는 오퍼레이터로서 인정받았으니, 그 책임을 다할 생각이란다.
물론 너나 다른 사람과는 조금 자유롭지 못하겠지만, 그게 나에게 큰 문제가 되진 않아.
가끔씩은 일상에서 빠져나와 숨을 돌릴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문제니까. 그렇지 않니?
쉐라그에선 널 마음대로 만날 수조차 없었지만, '프라마닉스'를 만나는 건 그렇지 않을거란다. 이제 이런 편지를 쓰는 일도 줄어들거야.
조금 아쉽기도 하구나, 꽉 막힌 장로 앞에서 편지에 쓸 시적인 표현을 생각하면서 답답해하는 얼굴을 감상하는 것도 나름 쏠쏠한 낙이었는데.
앞으로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엔야?"
앞으로는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종이 위로 옮기려다 팬을 내려놓았다.
"예라,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네요."
"로도스 아일랜드의 설비는 무척이나 정비가 잘 되어있어서, 삐걱거리는 문지방도 없고 창에는 닦을 먼지도 보이질 않으니 아무리 문을 재촉한들 볼멘소리를 내뱉질 않더라구요."
곧장 오른쪽의 창문에 손가락을 가져가 소리가 나도록 한 획을 그었고, 새카맣게 변한 손가락을 보란 듯이 들었다.
"후후후, 이 방의 전 주인께서 상당히 피곤하셨나 봐요."
"···"
"아이,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도 이런 곳은 처음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 이해해 주세요."
"다음부터는 노크 정도는 해 주시지요. 야에르 시녀장님."
예라는 전통식 쉐라그 문양이 수놓인 치마자락을 들어 보였다.
"어찌 그러지 않겠습니까, 쉐라그의 성녀, 엔야 실버애쉬 님."
"여기는 로도스 아일랜드이고, 우릴 지켜보는 장로도 귀족도 없으니 그냥 프라마닉스라고 부르세요."
"그렇다고 엔야가 엔야가 아니게 되나요?"
"···마음대로 하시던가요."
"제가 엔야를 엔야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아무도 프라마닉스의 본명을 불러주지 않을거에요. 너무 슬프게도."
"하나하나 열받는 엉터리 시녀장은 쉐라그로 돌려보내고 베테랑 오퍼레이터인 엔시아랑 같이 지낼까요?"
"어머, 엔시아가 세상에서 하나뿐인 언니의 실체를 목도하고 현실에 절망하는 대사건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 엔야 곁에 있어야겠네요."
"···뭐라고요?"
"아이, 말이 그렇다는 거죠. 쉐라그의 고귀한 성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수발을 들게 허락해주시지요. 아니면 시에스타에서 직접 공수해온 해변가 맛 크리스탈 캔디라도 드실래요?"
"그런 건 또 어디서 난 거에요?"
"아주 친절하신 로도스 인사과 직원분께서 하나 주셨어요. 절 너무 상냥하게 응대해 주시길래 성녀 브로치를 하나 달아드렸더니 한사코 거절해도 제 손에 쥐어주시더라구요."
"···여기에 가져온 성녀 상품 있으면 지금 다 내놓으세요."
"엄밀히 말하면 만수원에서 직접 제작한 시제품이라 돈 주고도 못 사는 건데요."
"제가 직접 주머니를 다 까뒤집는 꼴을 보고 싶은거면 말만 해 주시죠, 시녀장님!"
"어어, 일어나지 마세요. 그거 딱 하나만 가져온 거에요. 정말이라니까요! 예라군드에 맹세해요."
나는 도로 자리에 걸터앉아 이마를 짚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이런 곳에서 불안하지도 않나요? 평소의 몇 배는 신난 것처럼 보이네요."
"음, 처음엔 저도 조금 그랬는데, 로도스 아일랜드의 사람들은 모두 미남미녀에 친절하시고, 개성넘치는 분들 뿐이라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해도 너무 재미있던걸요!"
"전 잘 모르겠네요."
"그야··· 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엔야 님도 금방 적응하셔서 모두랑 잘 지내실 수 있을 거에요."
어설프게 말을 돌린 예라를 대충 흘겨보고 늘상 들려주던 걱정과 당부의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엔시아 씨에게 드릴 편지인가요? 제가 전해드릴까요?"
편지를 예라에게 건네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연스럽게 편지를 받아든 예라는 사탕의 포장지를 까서 내게 내밀었다.
"벌써 저녁식사 시간이 지났는데, 배고프진 않으세요?"
예라의 가는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유리처럼 맑은 사탕이 반짝였다.
"뭐··· 좀 허기지긴 하네요."
잠깐동안 그 보석같은 사탕를 감상하다 공복감을 느껴 그대로 받아먹었다.
"···해변가 맛이라더니 그냥 소금 맛이잖아요."
"모래사장의 부드럽고 짜릿함과 바닷물의 소금기있는 맛을 재현했다고 하던데, 별로 신묘한 맛은 아닌가 봐요?"
"그래도 쉐라그에선 볼 수 없는 맛이네요··· 하긴, 모래 맛 사탕은 아무도 안 사려고 하겠죠."
"모래 맛 사탕도 받긴 했는데, 이건 제가 먹어보려고요."
"그런게 있다구요?"
"뭐, 세상 어딘가에는 흙이나 지렁이맛 사탕도 있다는데 모래 정도면 맛있는 편이죠."
예라는 모래알을 뭉친 것처럼 생긴 사탕을 꺼내 머금고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주방에서 절 기다리는 분이 계셔서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요깃거리 정도는 만들어 드릴게요."
식사 시간이 지난 것이 신경쓰이는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예라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진짜 모래맛인지는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예라가 떠나고, 방 안에는 한걸음 물러섰던 적막과 쌉싸름한 느낌이 제자리를 찾아왔다.
등을 쭉 피고 의자를 띄워 까딱이다, 등받이에 침대가 부딪혔다.
평소 사용하던 침구에 비하면, 객관적인 시선으로 판단했을 때도, 로도스의 침구는 그리 좋은 품질은 아니었지만, 오퍼레이터 테스트를 치르느라 쌓인 피로감이 예라의 귀띔을 떠올리게 했다.
[엔야 님, 로도스의 규모와 인원, 그리고 경제 수준을 비롯한 여러 사항들을 고려하였을 때 로도스 아일랜드는 시설의 유지관리에 있어서 상당히 비용을 투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침대에 드러눕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에, 머리속을 비우고 눈처럼 새하얀 이불이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 속으로 쓰러졌다.
"하아···."
상대적으로 가볍고 얇은 의복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춥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버티기 힘들었던 신체에 베어든 땀이 알맞게 차가운 모포 덕에 기분좋게 식어갔다.
이런 육체적인 피로감은 꽤나 오랜만이었데다, 평소에도 타인의 시선을 피해 낮잠을 자곤 했던 탓에 수면 주기도 그다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렬한 수면 욕구가 은은한 쾌감 속에 숨어들었다.
망막이 순식간에 말라붙었고, 눈꺼풀이 습기를 보충하기 위해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조금 이상한 위화감이 방 안을 가득 메웠고, 그것이 날짜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
"···야에르?"
항상 돌아오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쪽지와 정갈하게 포장된 샌드위치 한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쓰러지듯이 잠에 빠져서 저녁 식사는 거르게 되었지만, 덕분인지 단잠의 여운이 맴도는 아늑한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은 평소보다 쉬웠다.
쪽지엔 익숙한 글씨체로 아침으로 준비한 샌드위치를 꼭 먹으라는 당부와, 식사를 걸러서는 안된다는 잔소리, 엔시아가 잠든 나를 보고 갔었으며 편지의 답장을 남겼으니 깨어나면 전해주겠다는 말, 오늘 실전 테스트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과 작전기록이라는 일종의 문서를 박사로부터 직접 받았으니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 선반에서 꺼내 보라는 조언, 장로단에서 내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빠르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엔시아를 비롯한 오퍼레이터들을 도우러 피치못하게 아침부터 자리를 비우게 되었으며 머리를 빗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과, 그리고 모래 사탕은 그냥 씁쓸한 버터맛이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적어도 짠 사탕은 아니었네···."
쪽지라기엔 꽤 길었던 내용을 모두 읽고, 고개를 들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차게 식은 공기가 폐로 스며들자 만주원에서 고개를 깊게 조아린 장로들의 목소리로 머리가 울리는 듯 했다.
가볍게 고개를 젓고 빗을 집어들어 거울 앞으로 향하니, 잔뜩 어그러진 표정이 거슬려 한껏 엉킨 머리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엔시아··· 만나러 온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니···"
정신없이 자는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킥킥대는 엔시아와 그 광경을 자애가 가득한 미소로 지켜보는 예라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느정도 시간을 들여 머리를 정돈하니, 예라의 그것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럭저럭 부끄럽지 않은 모습은 갖추게 되었다.
실전 훈련까지는 어느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 로도스를 조금 돌아볼까 고민하였지만 이내 방문을 나서는 게 귀찮아져 샌드위치를 물고 선반에 놓인 작전기록을 꺼내어 열람하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예라?"
"음, 오퍼레이터 프라마닉스의 방, 아닌가?"
아무래도 로도스 쪽 대원인 것 같았다.
문을 열자,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검은 결정이 돋아난 미노스 방문객이 날 맞이했다.
"당신은···?"
"벌컨이라고 불러. 오늘 실전 테스트, 맞지?"
"아··· 그럼 당신이···?"
"뭐, 그래. 오늘 테스트는 내가 거들어줄거야."
"그럼 벌컨 씨와 제가 겨루는··· 건가요?"
"그런 방식일 때도 있는데, 오늘은 아니야. 너의 그··· "종"이 좀 특이하다고 들어서 말이지."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난 디펜더 오퍼레이터라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 버티는 편이거든. 니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나한테 해봐."
"그럼 당신이 상처입을 텐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자신이 넘치는 건지, 아니면 안전불감증인건지, 아니면 그저 무관심한 건지 헷갈리는 태도였다.
"이 테스트에서 얻은 데이터로 박사가 널 어떤 전투에 배치할지 결정할거야."
"예라도 같은 테스트를 받았나요?"
"···글쎄, 내 관할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벌컨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세를 고쳤다. 한쪽 다리에서 들리는 기계음이 평범한 다리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그보다, 점심은 아직이지? 괜찮다면 내가 대접할께."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작전기록이라는 것이 만주원에서 신물나게 보았던 서류더미와 비슷하여 지나치게 늘어지며 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조금 염치없는 행동인 것 같네요."
"그런가? ···음, 그래도 곤란한데. 너의 그 성스러운 종을 조금 살펴보고 싶은데, 난 요리나 쇳덩이랑 씨름하는 것 정도밖엔 재주가 없거든."
"당신은 쉐라그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데, 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내 친구···가 자기네 주인님이랑 아가씨들 자랑을 자주 하거든."
"뭐라고 하셨는지 조금 궁금하네요."
"별 건 아니야. 쉐라그의 성스러운 종소리엔 엄청난 힘이 담겨있는데 그걸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시련을 훌륭하게 극복한 아가씨 뿐이라고 그러던데.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라면 한번쯤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싶다고 생각했거든."
"···그렇다면야, 보는 것 뿐이라면 빌려 드리죠."
"고마워, 오늘은 가능한 한 성신성의껏 대접할게."
벌컨은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로도스 아일랜드의 구조는 잘 모르지? 궁금한 거 있으면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해줄 수 있어."
벌컨은 그 약속 덕분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장로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만주원이 발칵 뒤집어질 일이기에 모처럼 얻은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좋은 곳은 어디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
"엔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로도스의 한적하면서도 아늑한 곳을 모두 안내받느라 예상보다 늦게 돌아오자 예라가 날 반겨주었다.
"예라, 꽤 바빠 보이네요."
"그런가요? 나름대로 열심히 움직이는데 쉐라그에 있을 때와는 달리 걷는 거리가 길어져서 말이죠."
"그리고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네요."
"생각보다 금방 로도스 사람들과 친해져서 말이죠."
실제로 예라는 로도스에 도착한 이후로 누군가에게 줄 작은 선물 꾸러미와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 보따리를 항상 지니고 있었다.
"아주 인기가 많으시네요."
"아이, 걱정하지 마세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아가씨는 딱 한 사람 뿐인걸요."
"가장 소중한 작은 아가씨를 위해 저 한 사람은 그리도 간단히 버려두었으니 신뢰가 가는 말이네요."
"엔시아 씨가 언니를 보고 있자니 임무를 위해 떠나는 발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질 것 같다고, 잠든 사이에 얼른 떠나야겠다고 어찌나 절절하고 간곡하게 말씀하시던지―"
"눈물이 다 맺혀서 저를 깨울 엄두조차 낼 수 없었겠군요?"
"어머나, 드디어 우리도 마음이 통하는 경지에 도달했나 봐요."
"모처럼 만날 수 있었던 동생을 독차지하셨으니, 그냥 당신이 엔시아 실버애쉬가 되어서 성녀의 역할도 다해주시지 그러세요?"
"정말 죄송해요, 저도 배웅만 하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져서 꼭 한번 가봐야하는 문제가 있었거든요."
"엔시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 그런 건 아니에요. 제 개인적인 문제였어요. 엔시아 씨는 정말로 훌륭한 실력을 가졌고 로도스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걸 제가 직접 확인했으니 너무 괘념치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쉐라그도 아닌 이곳에서 당신에게 그렇게 급한 일이 있었다니 별일이네요."
"저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요··· 어쩌면 로도스 아일랜드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무언가일지도 모르겠네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었는지 궁금했지만, 예라가 더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몇몇 의문점은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런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그도록 훌륭하게 성장하신 엔시아 씨가 정말로 대견하답니다. 첫 등산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노파심에 눈물이 다 맺히네요."
예라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로 눈가를 닦는 시늉을 했다.
"참, 그런 표정을 예라군드의 축복이 다 달아난다구요. 엔야도 등반 장비를 자기 몸처럼 휘두르는 엔시아 씨를 직접 봤으면 감정이 복받쳤을걸요?"
"제가 전장에서 아츠를 사용하기라도 했다간 감정에 못이겨 아주 혼절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전 그 성스러운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번 감격한답니다. 하지만 감정을 자제하는 것도 시녀장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능력이죠."
"하아··· 대장로님께도 그 훌륭한 능력을 나누어 주시면 좋겠네요."
"대장로님이 엔야 아가씨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아시잖아요. 대장로님이 마음 상해하시겠어요."
"그러니 당신과 대장로님 사이에서 시달리는 제 처지를 좀 알아주시죠, 아예르 시녀장님?"
"보필에 부족함이 없다니 모두 예라군드의 축복 덕이지요."
"아, 방금 예라군드께서 상으로 당신의 머리에 신성한···"
물리적인 축복을 선사하기 위해 예라에게 다가가려다, 머리속에서 익숙한 감각이 울렸다.
"···엔야?"
"음··· 아무래도 쉐라그로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아, 정말 아쉽네요. 아직 친해지고 싶은 분들이 잔뜩 계셨는데."
중단되었던 행위를 끝내기 위해 종을 들어올렸지만, 예라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럼, 저는 하선하기 위한 준비 하러 가야겠네요. 서둘러 준비하면 내일 오전 중에 출발할 수 있을 거에요."
"···"
"아이참, 금방 끝내고 돌아와서 짐 싸드릴테니까 표정 푸시고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예라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후··· 로도스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는 거지?"
물론, 예라처럼 상냥하고 자상한 성격은 쉐라그의 가장 대쪽같은 귀족과의 면담에서도 크게 도움이 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예라와 자신이 한통속으로 작당했을 경우엔 그다지 큰 도움을 바라기 힘들었다.
"윽··· 돌아가면 또 한소리 듣겠네."
고개를 바닥에 푹 숙인 채로 말하면서도 경전을 외우는 것보다 고리타분한 소리를 읊는 장로진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귀를 찔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자, 로도스의 갑판 위는 경치가 상당히 좋지만 바람이 매서워 쉐라그처럼 추운 곳 주변에 정착했을 때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벌컨의 말이 떠올랐다.
예라는 한적한 곳보단 떠들썩한 곳을 선호하니, 새로 사귄 친구가 많아도 갑판을 찾아보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예라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곧바로 생각을 실행에 옮겼고, 방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문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손잡이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예, 예라?"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예라와는 전혀 다른 붉은 색조의 여성이 한 치의 스스럼없이 내게 인사했다.
"여, 니가 그 엔야라는 애구나?"
예라가 아니라는 것에 내심 안도한 나는 긴장으로 굳어진 몸에서 조금 힘을 뺐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제가 지금은 좀 바빠서,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다음에 하고 싶네요."
"아― 내가 또 사람 귀찮게는 안 하는 성격이니깐 걱정 붙들어 매셔. 그냥 예라가 주로 이 방에 머무른다고 하길래 혹시 있나 하고 와본거야."
"예라라면 방금 인사부 쪽으로 갔을 거에요. 아마 조금 바쁠 것 같으니 나중에 찾아가는게 좋을걸요?"
"어, 그래? 같이 마작이나 쳐볼라고 했는데··· 뭐, 그래도 이 나의 제안이면 어지간한 일은 팽개치고 올거니까 가보긴 해야겠다."
"알려줘서 고마우이―" 하고 돌아서는 그 사람의 새빨간 팔을 붙잡아 세웠다.
"잠깐, 당신이 누구길래 예라가 그렇게까지 당신을 위한다는거죠?"
"아? 아아, 뭐, 말하자면 긴데, 오래된 친구라고나 할까, 먼 친척? 뭐 그런거지."
"예라에게 친척이 있다고는 들은 적이 없는데요."
"친척의 친척이었나? 아무튼, 예라 족보 어딘가에 내가 있는건 맞으니까 그렇게 무서운 표정 안 지어도 되걸랑."
새빨간 팔과 손의 이음부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녀' 팔찌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이것도, 예라에게 받은 건가요?"
"아유, 그렇다니깐, 그녀석이 나 반갑다고 준거야. 아님 나랑 같이 이런거 받은 녀석들 많으니까 걔네들한테 물어보든가."
···나는 팔을 놓았다.
"귀엽게 생긴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한성깔 하는구만. 그녀석이 좋아할만 하네!"
그 하얀 여성은 껄껄 웃어넘기곤 예라를 찾아 자리를 떠났다.
나 역시 자리를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로도스 아일랜드의 갑판 위에 오르니, 이 거대한 함선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거대한 쇳덩이가 움직이는지 궁금한 마음도 조금 들었지만, 어짜피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뻔했기에 눈앞의 전경에 집중하기로 했다.
쉐라그의 모든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장엄하게 늘어선 설산의 행렬과 그 끝자락을 보지 못하게 막아선 눈구름이 흩뿌리는 하얀 결정들이 진정하는 데에 조금 도움이 되었다.
숨을 내뱉으면 하얗게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였으나, 쉐라그인들은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입김이 더 낯설게 느낀다.
"후우···"
그때, 누군가 내 등 뒤를 콕 찔렀다.
"읏, 누구···!"
로도스에서도 몇 안되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얼굴'이라기엔 눈, 입, 조금의 피부도 드러나지 않게 꽁꽁 싸맨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그 가면이 얼굴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큭, 그 다리를 두번다시 사용하지 못하게 얼려드리죠!"
품에서 종을 꺼내 아츠를 사용하려는 찰나, 박사는 품에서··· 컵 한 잔을 꺼내 내밀었다.
"응? 이건··· 커피인가요?"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쉐라그인들이 추위에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쉐라그는 따뜻한 차나 음료를 선호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절 쉐라그로 잡아넘기기 위해 오신 건 아닌 것 같네요."
박사는 멀뚱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조금 우스울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커피, 잘 마실게요. 고맙습니다. ···당신도 항상 바빠 보이던데, 여기서 좀 쉬다 가실래요?"
박사는 잠시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하더니, 이내 몸서리를 치며 난간에 기대었다.
"후후, 농땡이는 혼날 각오를 할 가치가 있으니까 하는 거에요. ···여기 경치가 참 좋죠?"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작게 재채기를 했다.
여기까지 찾아오면서 커피는 내게 줄 한 잔밖에 준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있을 줄 모르고 자신이 마실 생각이었던 커피를 양보해 준걸까?
유일하게 따뜻한 물건인 커피를 다시 내어줄까 고민해봤지만, 그마저도 순식간에 식어버렸기 때문에 관두었다.
미지근해진 커피가 차가워지기 전에 한모금 머금었다.
"···윽, 좀 쓰네요···"
박사는 의아한듯이 날 바라봤다.
"후후,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가 있는데, 전 그 친구에게 가족이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걸 방금 알았거든요. 바보같죠?"
박사는 자기도 소중한 사람들을 잘 모른다고 답했다.
"그것 참 이상하네요···. 그 사람은 저에 대한 거의 모든걸 알고 있는데, 저만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건 좀 불공평하지 않나요?"
박사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제게 말해주지 않은 이유도 있을거고··· 함부로 말해주지 않은 일을 캐묻다가 그 사람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아아― 그냥 다 짜증나니까 평생 이러고 있고 싶네요."
"저는 아직도 그 친구가 없으면 안될것 같은데, 그 사람은 저 말고도 친구가 너무 많고, 그냥··· 그 친구가 지금 제 생각을 알면 또, 여전히, 철없이 군다고 생각할까봐 겁이 나네요."
박사는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박사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꽤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박사는 또 멀뚱거리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크흠, 그러니까,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을 위한 조언은 없나요?"
박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런 거 없다고 했다. 뭐라구요??
박사는 도로 종을 꺼내려는 날 보고 크게 당황하고는, 어쩔 수 없는 일에 너무 고민해봐야 손해만 보게 될 거라고 말했다.
박사도 많은 복잡한 상황을 직면해보았지만, 막상 지나쳐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되었다고 말했다.
"꽤나 쉽게 말하시네요."
물론, 자신을 지지해주는 이들의 무수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도 말했다.
"···후후, 저랑 박사님은 비슷한 처지일지도 모르겠네요."
문득, 엔시아가 떠올랐다.
그리고 예라, 실버애쉬 가문의 사람들과 대장로님의 근심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하아··· 엔시아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텐데, 저만 이러고 있을 순 없죠."
"박사님도 여기서 오들거리지 마시고 저랑 같이 들어가시죠?"
박사는 그제서야 차게 식은 팔과 손을 문지르며 서둘러 로도스 본함의 안쪽으로 돌아갔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사람이네요."
한박자 늦게 그를 뒤따르자, 박사는 몇걸음 가지도 못하고 예라에게 붙들려 질문 세례에 당하는 모습이었다.
"···아, 엔야! 다행이다, 또 없어져서 찾고 있었다구요!"
"걱정마세요, 아예르. 전 쉐라그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예라는 눈에 띄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라. 당신은 로도스 아일랜드에 남으세요."
"네? 그렇지만···"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전 혼자서 쉐라그로 돌아갈 테니 당신은 오퍼레이터 예라로써 여기 있는 이 사람을 위해 조금 더 힘내주세요."
"하지만 엔야, 전 당신이 무척이나 걱정된답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전 성산의 계시를 받드는 성녀이니, 저보다는 당신이 좀 더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죠."
"전 예라의 발목을 잡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아예르도 절 믿어주세요."
"엔야···."
예라는 날 바라보았고, 나도 예라를 바라보았다.
"쉐라그로 가는 척하면서 또 도망가지 마세요?"
"아야, 아, 죄송해요! 아잇, 성물을 그렇게 막 휘두르지 마세요!"
"흥, 예라군드의 축복이 깃들던가 마시던가 하세요."
예라는, 잔뜩 짜증이 묻어나는 나의 말에, 한없이 인자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당신에게 예라군드의 축복이 깃들기를, 나의 엔야."
예라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아···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엔시아 씨가 부끄럽다고 가급적이면 늦게 전해달라고 하셨거든요. 지금이 적기인 것 같네요."
"고마워요."
나는 편지를 뜯으려다, 생각을 고쳤다.
"···? 제가 읽어드릴까요?"
"아뇨, 장로진들의 쓴소리를 버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이건 나중에 읽어야겠어요."
"후후,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럼···"
"···"
"박사님?"
박사는 크게 움찔거리더니,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에게 예라군드의 축복을. 머지않아 다시 만나뵙죠."
옛날에 올린건데 쉐라그 핫산 다 올라온 기념으로 내용 약간 수정하고 재업함
원래 쉐라그 얘기 좀 더 쓰려고 했는데 쉐라그 스토리도 모르고 쓰기 좀 그랬음
핫산도 다 봤으니 이제 써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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