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따사롭다.
이상하게도, 더위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숨을 들이쉬니, 맑은 공기가 내 폐를 채운다.
공기가 맑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던가?
분명 시내처럼 보이는데, 건물의 생김새가 낯설다.
분명 돌아다니는 건 사람들인데, 하나같이 동물의 귀와 꼬리를 지니고 있다.
여긴 대체 어디지? 나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원래 난 뭘 하고 있었지?

마지막 질문을 떠올리는 순간,
두통이 찾아온다. 헛구역질이 몰려온다.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옆의 벽을 짚어보려고 팔을 뻗어보지만, 너무 늦었다.
바닥에 처박히지만, 바닥에 부딛힌 몸에서 오는 통증보다 두통이 배는 심하다.

근처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사람이 쓰러졌다며 외쳐대는 소리도 들려온다.
누군가 다가와 괜찮냐며 묻는다.
신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세상이 암전된다.



낯선 천장이다.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고, 뭔가 차가운 게 느껴진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1인실 입원이라고?
병원비를 생각하자 숨이 막힌다.
그나저나, 방금 본 그 광경은 꿈이었던 걸까?
그러면 병원엔 누가 데려온 거지?
지금 상황에 대해 고민하면 할 수록 혼란스러워져만 간다.

문이 열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온다.
머리에는...말의 귀?
원래 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보자, 제대로 된 귀도 보인다.

"얘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남자가 묻는다.
"카시미어 상업연합회의 파벨이라고 합니다. 카우투스 소년, 당신은 누구고 어디에서 온 거죠?

카시미어? 카우투스?
처음 듣는 고유명사들에 당황하는 사이, 자신을 파벨이라 말한 남자가 말을 이어나간다.

"정신을 잃은 사이 소지품을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없더군요. 감염자는 아닌 걸로 보여 치료를 해놨습니다만, 당신이 누군지 알아야 앞으로도 도와드릴 수 있어요."

감염자는 또 뭐지?
그것보다,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일단 말이 통하는 건 정말 다행이지만, 대답을 하고 싶어도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게 문제다.
잘못 대답했다가는 정신병원이나 감옥에 처박히겠지.
일단 이름을...

다시 두통이 밀려온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난 누구지?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야?

또 정신을 잃을 수는 없다.
숨을 쉬는 데 집중하자.
과거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생각을 멈추자 호흡이 안정된다.
일단 대답을 해보자.

"제 이름은 하늘입니다. 평소에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고, 오늘은 평소에 다니던 병원에 가려 했는데 하필이면 길 한복판에서 발작이 왔네요. 일단은 돌아가서 쉬어야겠어요."

이 정도면 괜찮은 답변이겠지?

"알겠습니다 하늘 씨. 병원비 청구서는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청구서는 지금 주시면, 내일 와서 병원비를 낼게요."

제발 이대로 넘어가줘.

"다시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주소가 어떻게 되시나요?"

망했다.



이곳에서 지내며 몇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다.

먼저, 나한텐 귀가 두 쌍이나 달려있고, 그 중 한 쌍은 쫑긋 솟아오른 토끼의 귀다.
꼬리뼈 부근에는 토끼 꼬리 처럼 생긴 꼬리가 달려 있다.
머리카락은 갈색이고, 귀와 꼬리 역시 갈색의 털로 덮여 있다.
키는 엄청 작아졌다. 160? 165?
몸집도 작아지고, 여려졌다. 그런데 힘은 꽤 강해졌다.
내가 내 얼굴을 보고 하는 말로는 부적절할지 모르지만, 꽤나 귀엽게 생겼다. 남성적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불만이긴 하다.
그나마 남자가 맞긴 하다.

이곳에서 정신차리기 전의 일을 생각하려 들면 두통, 현기증, 두려움, 기타 등등이 떠오른다.
'옛날의 나'를 떠올리려 해도 마찬가지다.

여기는 카시미어라는 나라이다.
여권도 없고, 신분을 증명할 방법도 없고, 돈도 없는 나는 이곳에 감금되어 보살핌을 받고 있다.
카시미어는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다.

어떤 소설을 인용하자면,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다.
나는 좆됐다.

그나마 다행인 거라면 밥은 꼬박꼬박 주어진다는 것 정도? 10%쯤은 토끼라고 풀떼기만 준다거나 뭐 그런 일이 없다는 건 정말 다행이다.

상업연합회의 안경을 쓴 중년의 대변인이 와서는 몇 가지를 설명해줬다.
상업연합회가 직접 노예를 처리하는 건 굉장히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기사 경연이 이뤄지고 있다.
우승에 따르는 상품으로 현금 대신 현물을 지급하는 일은 종종 일어나고는 한다.
내 덕에 상품에 쓰일 예산을 많이 절감했으니, 우승자가 결정되기 전까지 숙식 정도는 상업연합회에서 아낌없이 제공해줄 것이다.
우승 후보는 촛불의 기사라는 사람이라고 한다.

사흘 뒤, 촛불의 기사가 우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품으로 전달되기 위해 몸을 구석구석 '세척'당하고, 대충 몸단장된 뒤, 눈이 가려진 채 어디론가 옮겨진다.
이 여린 몸뚱아리를 한 채로, 여자들한테 씻겨지는 경험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눈가리개가 풀어지자, 꽤나 반짝거리는 방 안에 들어가있음을 깨닫게 된다.
촛불의 기사라더니, 방에는 샹들리에와 각양각색의 양초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제발 착한 사람이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이 열린다.

아름답다.
숫사슴에게 달려있어야 할 커다란 한 쌍의 뿔이 보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게 아니라 완성시키는 듯하다.
흑과 백의 옷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부각시키지만, 천박함이 아닌 우아함만을 가져다준다.
약간 보라색을 띄는 그녀의 흰 눈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내 영혼을 집어삼키는 것 같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금발은 그 어떤 황금 공예품보다도 기품있다.

그저, 신성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가 걸어들어올 뿐인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을 것 같은 찰나의 침묵이, 미성에 의해 깨어진다.

"맥키 씨가 말한 상품이...당신인가요?"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질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 아름다운 울림을 만끽하는 데 모든 신경이 집중한다.

"이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곤란하네요. 카우투스 소년, 이름이 뭔가요?"

그녀가 내 이름을 묻는다.
그녀가 내게 관심을 가진다.
이 사실이 가져다주는 지나칠 정도의 황홀감이, 오히려 나를 정신차리게 만든다.

"하늘...입니다."
"하늘 씨, 만나서 반가워요. 전 노바 기사단의 수장을 맡고 있는, '촛불의 기사' 비비안나 드로스테입니다."
"일단은 옷부터 챙겨드려야 하겠네요...잠시만 기다려 줘요. 에밀리아! 이쪽으로 와주렴!"

잠시 뒤 문이 열리고...고양이 귀의 메이드 소녀가 들어온다. 등에 꼬리도 달려 있다.

"저 아이가 입을 옷을 가져다 주겠니?"

에밀리아라 불린 고양이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간다.
잠시 뒤, 옷을 들고 다시 돌아오는데...메이드복?

"미안해요. 남자 고용인을 들이게 될 줄은 몰라서 마땅한 옷이 없네요. 당분간은 이거라도 입고 다녀주시겠어요?"
"죄송하지만, 그냥 이대로 입고 다니면 안 될까요?"
"그건 안 돼요. 그런 거적떼기를 입고 저택 안을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답니다."

여자 옷을 입고 다니라고? 평상복도 아닌 메이드복을? 주인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지만, 여장을 하는 건 정말 꺼려진다.

"지금 드린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저도 어쩔 수가 없답니다. 옷을 벗고 다니고 싶은 건가요?"

아무래도 주인님이 착한 것 같지는 않다.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단 뭐라도 입는 게 나을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보며, 쓸데없이 하늘하늘하고 예쁜 메이드복을 집어든다.

"그 거적떼기는 벗고 입으세요. 새 옷을 입을 땐 그에 걸맞는 예의도 필요하답니다."
"네? 그럼...탈의실은 어디로 가면 되나요?"
"여기서 갈아입으면 된답니다. 무슨 문제 있나요?"




뒷내용은 언젠가 꼴리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