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들이 차곡차곡 식탁 위에 쌓여갔지만 식사의 기쁨 대신 냉랭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방금 전 몸의 이상의 여파로 박사는 무언갈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소녀는 음식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조용히 창밖만 보고 있었다. 박사는 소녀의 시선을 따라 창문 밖을 내다보았지만 거기에는 오직 소녀의 부루퉁한 표정만이 비췄다.

박사는 소녀가 의식적으로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한다는 걸 눈치 챘다.


주문하신 코스 요리 나왔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더 말씀해주세요.”


여점원이 마지막 그릇을 놔두며 말했다. 그녀가 박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무언가 말하려 하자 크루아상이 점원을 흘겨보고 테이블에 앉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술은 안주시나요. ''.”


박사가 황급히 볼을 잡아당겨 크루아상의 말을 끊었다. 소녀는 성가신 파리를 쳐내듯 그의 팔을 쳐내고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여점원이 크루아상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더니 박사 앞에 고량주와 술잔을 올려놓고 계산대로 돌아갔다. 잔은 하나뿐이었다.

소녀가 점원을 보며 으르렁거리더니 자기가 가지고 온 물잔을 비우고 자기 앞에 놔뒀다.

박사는 소녀의 행동을 나무라는 대신 한숨을 쉬며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싸우기에는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입에 술을 머금자 그윽한 소나무향이 입 안에 퍼지며 머리가 맑아지고 숨쉬기도 더 편해졌다.

크루아상은 아마 말도 하지 않고 박사를 곁눈질했다.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박사는 소녀가 원하는 게 뭔지 알 도리가 없었다.


……?”


박사가 질문을 던지자 소녀는 대답 대신 격분한 표정으로 술병을 빼앗더니 자신의 컵에 술을 넘칠 정도로 따랐다. 그리곤 술을 한 번에 마셔버리더니 씨뻘개진 얼굴로 박사를 노려보았다.


너 왜 그래?”


소녀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혹시 아까 했던 얘기 들었나 싶어 박사는 크루아상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그 때 소녀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고 그의 시선도 땀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마는 소녀가 성난 표정을 하고 있음에도 주름 하나 없었고 연못처럼 반짝이던 녹색 눈은 초점이 풀리며 비취처럼 변했다. 양 볼은 술기운 때문인지 복숭아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땀은 가녀린 목을 넘어 몸을 타고 막힘없이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서 흘러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 그녀의 모습도 정말로…….
박사는 자기도 모르게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목이 말라 술을 마시려고 손을 뻗었지만 소녀가 한 발 빨랐다.

소녀가 다시 술을 가득 따르려는걸 박사가 손을 잡고 말렸다.


술 그렇게 막 마시는 거 아니야. 너 나중에 괜찮겠어?”

뭐고! 내 어린애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크루아상이 역정을 내며 박사의 팔을 쳐냈다. 그리고는 분해죽겠다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거리며 밥상을 내리쳤다. 상상 이상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는 소녀가 밥상을 무너트리기 전에 박사는 말을 돌렸다.


아니, 내 말은 네 지갑에 괜찮겠느냐는 거지. 돈 많이 썼다 그랬잖아.”

남의 지갑사정을 사장님이 와 신경 쓰는데.”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을 이해해줬는지 소녀가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여전히 볼을 부풀린 채 그를 마주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단단히 삐진 모양이다. 하지만 박사는 섣불리 화해를 청할 수도 없었다. 잘못된 손을 내밀었다간 며칠 동안이나 뿔에 들이박힐 지도 모른다. 그는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대신 우회적인 방법을 택했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이번엔 내가 살게. 그게 맞는 것 같아. 근데 여기서만 내줘. 내가 지금 당장은 돈이 없으니까 로도스에 돌아가서 돌려줄게.”


그제야 소녀가 박사를 돌아봤다. 그런데 소녀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아까부터 뭔 소리고? 내 돈 없는데.”


서로 상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까지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돈이 왜 없어.”

내는 요번에 가챠로 다 날려버려가, 그러는 사장님이야 말로 왜 돈이 없다는 긴데!”

……나도 실은 거기에 월급을 모두 꼬라박았어.”


술기운이 모두 날아간 시퍼런 눈빛을 피하며 박사가 말끝을 흐렸다.

처음 소녀를 따라 게임을 시작했을 땐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하는 시간 때우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오랜 기억상실과 그 동안 쌓여왔던 두둑한 통장 잔고로 인해 그의 경제관념은 마비되어있었고 별로 귀하지도 않은 캐릭터 하나가 계속 눈에 걸린 것이 문제였다.
어차피 이것 외에는 쓸 일도, 시간도 없다는 생각에 돈을 쓰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하는 것이 게임이 아니라 돈을 끝없이 빨아들이는 늪이라는 걸 깨달은 건 이미 머리 끝까지 잠겨버린 뒤였다.

결국 박사는 켈시 몰래 아미야에게 사정사정해서 월급을 가불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로도스의 이미지 문제,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쪽팔려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하던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이 확성기 같은 소녀에게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내한테는 어린애 같다 뭐다 큰소리친 기가! 돈도 없는 주제에 밥은 왜 먹으로 왔는데!”


크루아상이 말한 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박사는 말도 안되는 반박을 던졌다.


밥 먹자고 한 건 너였고, 날 여기로 데려온 것도 너였잖아! 그러니까 너한텐 당연히 돈이 있어야지!”

사장님이 여자 만나는 거 비밀로 해주는 대신 여로 온 거 아니가! 그럼 당연히 사장님이 사야제!”

아니, 보통은 밥 먹으러 가자는 사람이 사는 법이잖아! 그런데 돈도 없이 가자는 놈이 어딨어!”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가 아쉬워서 사장님한테 밥을 사주는데! 망상증 있나!”

? 밥 사줄 테니 나랑 같이 먹자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나한테 사라고 할 거면서 맘대로 소스를 부은 거냐!”

"사장님이 부어도 괜찮다 캤잖나! 마지막 조각도 지가 먹어놓고!”

시끄러! 이 꼬맹이!”

사장님이 더 시끄럽다! 땅거지! 벽창호! 변태!”

이 나무토막 같은 녀석이!”

변태! 변태! 변태!”

월급 깎는다!”

변태! 변태!”

그만해!”


싸움이 무척 유치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박사는 소녀의 수준에 맞춰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소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이꿀밤을 먹이고 볼을 사정없이 비틀어 대고 나서야 소녀는 근거 없는 모욕을 멈췄다. 입이 막힌 크루아상은 팔을 꼬집고 뿔로 들이박으려는 듯 머리를 내밀었다. 박사가 소녀의 머리를 막기 위해 뿔을 손으로 잡자 소녀는 으르렁거리며 박사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깨물어댔다. 손가락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고통에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 진흙탕 싸움을 끝낸 건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어느 새 다가온 점원이 그들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박사는 그녀를 보며 미소에도 참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웃음이 터지는 것을 간신히 참는 저 미소처럼.

박사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소녀도 튀어 오르듯 자리로 되돌아가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하지만 창문에 비치는 창피한 표정은 전혀 숨기질 못했다.


하하, 아뇨. 별 건 아니고 잠시 혼을 내고 있었습니다. 넌 이 아가씨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났을 줄 알아.”


제발 점원이 아무것도 못들었기를 바라며 변명하는 박사를 소녀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흘겨보았다.

박사가 손가락을 살펴보니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꼬집힌 자리에는 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정말 인정사정 없는 괴력이었다. 크루아상은 볼이 약간 벌개진 것이 전부였지만 박사는 애써 무승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싸움도 다른 수많은 싸움처럼 누구도 이긴 사람 없이 서로에게 상처만 남겨놓았다. 특히나 이 상처는 몸에 난 상처보다도 더 오래 갈 것 같았다.


혹시 돈을 못내시는건 아니죠? 자기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어른이 돈이 없으시다니. 저희 가게에서 무전취식은 안 되는데.”


점원의 승리감에 젖은 목소리는 분명 크루아상을 향해 있었지만 박사도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절박한데가 있었다. 점원이 우리 안에 갇힌 동물을 약 올리듯 박사의 팔을 어루만졌다.


한 푼도 없으시다면 저희 관계에 관해 나눈 대화가 더 의미 있어지겠네요? 뭣하면 저희 가게에서 일하게 해드릴 수도 있는데.”


그녀가 속삭이자 크루아상이 고개를 홱 돌려 점원을 째려보았지만 소녀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소녀의 녹색 눈망울엔 어느 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돈이 없다는 건 어디까지나 제 돈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회사 카드가 있으니 돈 떼먹힐 걱정은 안하셔도 되요. 그리고 돈이 없다고 해도 당신들과 일할 생각은 없으니 놀리는 건 그만둬주세요.”


박사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떼어내며 말했다. 점원의 얼굴에 상처받은 표정이 스쳤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부엌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말이 너무 심했나 싶어 걱정하던 박사는 크루아상의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사가 소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헝클어트리자 입을 삐죽이며 입을 열었다. 쏘아붙이는 말투이긴 했지만 독기는 팍 가라앉아 풀죽은 목소리였다.


……내처럼 뻔뻔하고 고집불통에다 돈도 막 쓰는 얘한테 와 신경 써주는데.”


, 이 녀석 역시 들었군. 그것도 안 좋은 말만. 박사는 변명을 해봐야 오해만 더 늘어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소녀를 끌어안았다. 소녀도 가만히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녀는 그의 품에 파묻힌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끔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박사가 자기 옷이 약간 축축해지는 걸 느낄 때 쯤 소녀가 떨어져 나와 한층 개운해진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사장님 회사 카드는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것 아니가.”

맞아. 그러니까 우리 몰래 나가야 돼

……엗?”

내가 신호하면 몰래 나가는 거다.”

, 잠깐 지금 무전취식을 하겠다는 기가?”

! 나중에 갚을거야! 너도 알잖아. 회사 카드 쓰면 켈시랑 아미야한테 다 들통난다고. 너도 내가 걔네한테 혼나는 거 본 적 있으면 알 거 아니야. 아마 이번엔 너도 같이 혼날 걸?”


박사의 말에 크루아상이 침을 꿀꺽 삼켰다.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고를 치고 도망가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소녀도 박사가 혼나는 걸 몇 번이나 본 만큼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돌아온 거 같은데 이제 어쩌나.”


소녀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박사도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머릿속으로 연습모드를 돌리고 있었다. 켈시와 아미야에게 그랜절을 올리는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고 있을 때 이상한 점을 느꼈다.

밖에서 다가오는 소리는 지나치게 요란스러웠다. 마치 복어가 자기 몸을 부풀리는 것처럼. 그 소리에 담겨있는 것은 슬럼가 사람들이 보여준 분노와는 다른, 숨길 생각도 통제할 생각도 전혀 없는 증오였다.

박사는 황급히 크루아상의 손을 잡아끌었다.


크루아상. 이 쪽으로. 빨리!”

, 거기는 부엌 아니가! 도망갈라면 거기가 아니라.”


소녀가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약간 빨개진 눈을 비비며 부엌에서 나오는 점원을 다시 부엌으로 끌고 들어왔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점원에게 박사가 질문했다.


여기 죄송한데 뒷문 같은 건 없나요?”

아뇨. 그런 건 없어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박사는 퇴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크루아상. 너 장비 가져왔어?”

, 무기는 가져왔는데 방패는 안 갖고 왔다아니 도망가는데 장비가 와 필요한데! 사장님설마 인질극이라도 하려는 기가!”

그런 거 아니야.”

인질극이라니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방패라고 하긴 그렇지만 저 웍이라면 꽤 쓸 만할 거에요.”


점원이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듣고 눈치 챘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박사와 장단을 맞추었다. 크루아상만은 아직 이해를 못했는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언니는 이 사람이 지금 누굴 인질로 잡자고 하는지 알고 하는 소리가!”

크루아상. 크루아상!”


박사는 크루아상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지한 표정으로 소녀의 양볼을 잡고 그의 얼굴을 마주보게 했다. 소녀의 얼굴이 빨개지며 녹색 눈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뭐고. 그런 얼굴한데도 안 도와줄끼다.”

크루아상. 지금 놀란 건 알지만 진정하고 잘 들어봐. 지금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 가게 사람들이 아니야.”

그게 무슨.”


그 때 밖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와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크루아상의 귀에도 박사가 듣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건물이 불타는 소리, 성난 외침과 겁에 질린 울음소리가.

깨진 식당 문 안으로 들어온 마스크를 쓴 남자가 너덜너덜한 몸을 끌고 들어왔다. 그는 다리를 절고 있었고 어깨에는 감염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할 완장이 붙어있었다.


리유니온.”


박사가 소녀의 질문에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