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이야기하자면, 로도스에는 오락거리가 적다. 보통 세상이 흉흉할 수록 그런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여러 오락이 발달되는 편이지만, 그 중 대부분은 성적인 놀이이거나 약물, 혹은 폭력이 필수로 들어가는 것들 뿐이다.
그리고 당연히 로도스가 그러한 '오락'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단순히 오퍼레이터들 내의 사기를 위해서도,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켈시와 아미야는 그러한 것들을 철저히 금지했다.
그렇기에 로도스에는 오락거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책이나 보드게임, 우르수스의 선전 방송 밖에 나오지 않는 TV 뿐이겠지. 이러한 문제는 스트레스가 쌓이기 쉬운 오퍼레이터들한테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나마 전투에 나서는 이들은 폭력에서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다지만,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에서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도 있다. 또한 서류 일이 주업무인 행정 오퍼레이터들은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시선을 돌릴 오락거리와 유흥은 매우 큰 문제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로도스가 반쯤 붕괴될 뻔 했지만--- 리유니온에게는 아쉽게도 오락, 정확히는 스트레스 풀이의 문제는 전혀 의외의 인물이 해결했다.
"기본 베이스는 보드카야. 아무래도 특정한 맛이 없고 알코올이란 느낌이 강한 보드카는 칵테일에 사용되기 쉽지. 도수가 높은 게 문제이긴 하지만 희석하거나 여러 재료랑 섞으면 별 문제도 아니지."
"개인적으로 독한 건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배려해준다면 고맙군."
"배려라기보다는 칵테일의 기본이지. 아무튼, 준비해둔 보드카에 레몬 주스와 토마토 주스를 넣지. 한 잔 기준이라면 보드카 30ml, 레몬 주스는 15ml. 토마토 주스는 대충 비슷하게 넣어. 개인 취향이 있어서 더 넣는 사람도 있지만서도."
"토마토 주스라? 매우 신기하군. 넣어도 레몬이나 오렌지 주스라 생각했는데."
"사실 보드카를 토마토 주스 맛으로 먹기 위한 거니까. 자, 이제 거의 마무리야. 레몬과 토마토 주스를 넣은 보드카에 우스터 소스, 타바스코 소스를 살짝 넣어줘. 이 둘은 약간 맛을 내는 정도니까 많이 넣지 말고. 전부 넣었으면 스틱으로 저어주고.....후추와 소금을 조금만 뿌린 뒤에, 샐러리를 꽂는 것으로 마무리."
"이건....꽤..."
"블러디 메리(Bloody Merry)입니다. 와파린."
"....고마워, 박사."
*
역시 스트레스 해소에는 술이지!
박사가 미소를 띈 채 말했던 것을 시작으로, 박사의 방 옆에는 조그만 문이 하나 생겨났다.
보통 철제로 된 로도스의 여타 문과는 달리, 오크 나무로 만들어진 그것은 향긋한 와인향을 풍겼다. 소문으로는 박사가 애지중지하던 와인 통을 잘라 만들었다고 하는데, 실버애쉬도 꽤나 감탄할 물건이었다고 한다.
오크 나무 문에는 아름다운 무늬의 떡갈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박사가 직접 새긴 말이 음각되어 있었다.
'말 못할 고민이 있으신 분들, 스트레스가 과도하여 미쳐버릴 것 같은 분들, 남모를 사정이 있으신 분들, 혹은 맛있는 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들만 두드려주세요.'
매일 밤 10시부터 12시.
로도스 내부에 조그만 칵테일 바가 생긴 날이었다.
*
"그렇다곤 해도, 와파린 네가 올 줄은 몰랐어. 세상걱정 없이 살 것만 같은데."
"새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나라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니야. 뭐, 단순히 맛있는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인 것도 있지만."
"하지만 문을 한 번 두드렸잖아?"
"...그렇지."
뽀득. 뽀득. 뽀득.
평소의 두꺼운 후드 차림이 아닌, 말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박사가 미소지었다. 한 손에는 유리컵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손수건을 든 채 유리컵의 얼룩을 닦아냈다.
바의 내부는 좋게 말하면 아늑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협소했다. 애초에 급하게 만든 방이다. 기존에 있던 더러운 청소용구방을 어떻게든 가게로 만들어낸 것이니 로도스의 기술자들에게 불평할 거리는 없다.
벽에는 갈색 계통의 벽지를 발랐다. 나무 물결 형태의 무늬가 있는 것이었는데, 천장의 은은한 조명과 어울려 꽤나 분위기를 냈다. 바닥은 진짜 떡갈나무를 깔았으며, 딱 하나 있는 4인 탁자와 4개의 의자는 실버애쉬가 공수해준 것이다.
하지만 바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카운터다. 은은한 조명 바로 아래, 펭귄 로지스틱스가 엄선해준 카운터는 금빛 조각과 수려한 무늬, 매끄러운 감촉까지 정말 훌륭했다.
카운터의 뒤에 장식하는 여러 술들은 박사 자신이 가져온 것들이다. 도대체 어디서 구해온 건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귀한 술도 많았으며, 맥주나 양주 종류부터 여러 칵테일 재료, 보드카, 진, 소주, 청주, 일본주, 막걸리, 증류주 등등....각국의 여러 술들이 보기 좋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바텐더. 이건 박사가 스스로 도맡아 하였다. 본래 불신의 눈빛을 보내던 켈시와 아미야였지만,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칵테일을 만들던 박사에게 할 말을 잃고, 기막힌 칵테일 솜씨에 또 다시 말을 잃었다.
지금와서는 바에 가장 많이 오는 단골이 켈시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몇 번 두드렸냐에 따라서 용건이 다르잖아? 맛있는 술을 즐기러 온 거라면 다른 손님도 받지만, 고민을 이야기하러 왔다면 잠시 바의 문을 닫는 게 가장 좋지."
"....그러네. 정말로 그래."
"모든 것을 털어놔. 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어. 하지만 여기는 바야. 난 입이 무거운 바텐더고. 손님이 술에 취해 스스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무 문제 없겠지."
"후훗, 그렇겠지."
블러디 메리, 라.
흡혈귀에게 무엇보다 어울리는 칵테일이겠군.
와파린은 정갈한 붉은 색을 띄는 블러디 메리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둥글게 깎인 얼음과 붉은 빛 액채가 아름답게 찰랑거렸다. 잔에 꽂힌 샐러리가 윤기있게 빛났고, 마치 토마토 수프와도 같은 향기는 침샘을 자극했다.
가볍게 한 입 머금었다.
"....하, 정말 토마토 주스 그 자체로군."
처음에는 보드카의 강한 알콜 맛이 나는 듯 하더니, 이내 그것은 새콤함과 달콤함을 겸비한 토마토의 맛으로 뒤덮였다. 후추와 타바스코가 살짝 알싸하고, 우스터와 소금이 짭잘하게 존재감을 과시한다.
술이라기 보다는, 음료다. 몇 잔이고 마실 수 있는 맛에 와파린은 감탄했다.
"하지만 많이 마시는 건 금물이야. 결국은 술이니까. 그걸 마시기 쉽게 만들었을 뿐이니 금방 취할 걸."
"맛만 보면 믿기질 않지만 말이지."
"칵테일은 어떤 바텐더도 맛있게 만들 수 있어. 하지만 그 어떤 바텐더도 취하지 않게 만들어주진 않거든. 술을 결국 취하고 싶어서 마시는 물건이니까."
"꽤 재밌군. 역시 누구에게나 신용받는 남자일만 해."
와파린이 조소하며 속삭였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기에 그 웃음또한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납득하지 못한 웃음이었다.
".....박사. 왜 다른 이들은 이해해 주지 못할까?"
"...."
"난 의사지만, 그 본질은 흡혈귀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날 본단 말이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난 흡혈귀지만, 결국은 의사야. 타인을 살리는 의사."
그녀가 한 번 더 블러디 메리를 머금었다.
그리고 가볍게 삼킨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는....그만큼 그 누군가를 잘 알 필요가 있지."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블러디 메리처럼, 흘러내리는 선혈과 같은 색으로.
"수많은 종족이 있고, 수많은 특징이 있으며, 수많은 병이 있어. 두린족은 다른 종족보다 과다출혈이 빨리 일어나. 라테라노는 머리 위의 링과 날개도 신체의 일부이며, 등과 머리의 신경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마취하면 안되지. 그뿐이야? 오니는 피에 강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약한 마취 후에 수술한다면 중간에 깨어나 날뛰는 것도 다반사지."
"난 잘 알 필요가 있어. 내가 가진 지식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누군가를 살릴 수 없단 말이야. 그렇기에 난 로도스의 모든 오퍼레이터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필요가 있어."
그렇기에 그녀는 오퍼레이터들을 마음대로 데려가 수술하고, 실험하며 지식을 쌓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금지된 지 오래다.
"어제, 난 죽어가던 오퍼레이터를 살릴 수 없었어. 그는 내가 거의 본 적 없는 종족이었고, 그 신체적 특징을 몰랐고, 어느 부위부터 고쳐야 하는 지 알 수 없었지."
"어떻게 해야 할까. 박사."
박사가 유리컵을 닦는 걸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와파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뻗었다.
"...한 잔 추가해 주지."
"....하?"
이미 거의 다 마신 블러디 메리를 가져간 박사는 다시금 블러디 메리를 만들어냈다. 와파린은 그저 말없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대체 뭘 하냐는 눈빛으로.
"와파린, 여기는 상담실도 아니고,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하거나 상담해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저 지금은 이 조그만 바의 바텐더일 뿐이지."
"....."
"난 너의 고통을 알지 못해. 그렇기에 멋모르게 조언해줄 수도 없지. 개개인은 각자 달라. 나에게는 별 거 아닌 고민이 타인에게는 심각한 일일수도 있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1초가,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시간일 수도 있고."
"....."
"그렇기에 이곳은 바(bar)야. 술집이야. 술을 마시고, 푸념하며, 취하는 곳. 네가 해결책을 찾아도, 정답을 찾아도, 내가 주는 것은 딱 하나."
"......"
네가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술."
".....하하."
와파린이 그녀 앞의 블러디 메리를 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 하하핫! 쿡, 그게 뭐야! 하학!"
"흠, 그냥 내 생각을 이야기한 것 뿐인데."
"풉, 중2병 같아! 하! 푸읍...."
시끄럽고도 크게, 실컷 웃는 그녀는 살짝 미소지으며 블러디 메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원샷. 기품이고 매너고 뭐고 없는 행동이었지만, 와파린은 그저 웃었다.
"하! 정말 맛있는데!"
"그럼 그만이지. 뭐."
그녀의 고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와파린은 흡혈귀이면서 의사로써, 누군가를 살리지 못했는다는 좌절과 절망을 겪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어쩌면 평생 해결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래, 술이 맛있으면 그만이지. 뭐."
고민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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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방갤에 올린 문학인데 여기에도 올리는 게 좋겠다고 해서 올림
지금까지 샤이닝과 마시는 블랙 벨벳, 나이팅게일과 마시는 화이트 레이디, 마토이마루와 마시는 뱀부, 라플란드와 마시는 파우스트, 실버애쉬와 마시는 보드카티니까지 썼음.
별 거 없는 글인데도 명방갤에서는 좋아해줘서 계속 연재할 예정
혹시 여기서도 념글가고 좋아해주면 계속 올릴 예정임
알파고 등판
헬라그도 써줘 위스키랑 잘 맞을 것 같음
헬라그 저쪽에서 요청 받았음. 근데 요청이 워낙 많아서 며칠 뒤에야 쓸 수 있을 듯
그 정글고 국어선생님 느낌난다
ㅗㅜㅑ 시발 다써와
안셀쿤 핑크레이디로 써주셈
어제 여기 링크올라와서 세 편 다봤슴미다
캐릭중에 미드나이트가 호스트바 한적이 있었는데 참고하시면 재미있을거같음
https://m.dcinside.com/board/hypergryph/57003?recommend=1#comment_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