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간인가."
방금 전, 마지막 손님이었던 스펙터를 배웅한 박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로도스의 유일한 바는 정확히 2시간만 영업한다. 밤 10시부터 12시. 가끔 너무 조금 문을 연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내심으로는 납득하고 있었다. 그 이상으로 박사가 만드는 술이 맛있어서 투정부렸을 뿐.
간단히 이야기해서, 그 이상의 시간은 박사의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아침 8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일하는 만큼, 2시간 이상의 바텐더 업무는 진짜 박사를 기절시킬지도 몰랐다.
박사 본인은 자신의 유일하다시피한 취미인 바텐더 업무를 매우 즐기고 있고, 원한다면 몇 시간이고 영업하고 싶지만 첫날에 새벽 3시까지 문을 열었다가 그의 컨디션이 무너져 며칠을 끙끙 앓은 후로 아미야가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켈시는 어떻냐고? 박사가 3시까지 영업하게 한 장본인이 켈시라 그녀는 아미야에게 혼난 후 벽에 무릎을 꿇은 채 양 팔을 드는 벌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웃긴데? 박사는 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현재 시각은 11시 56분. 이제는 바의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다.
우선 청소부터 할까. 오늘은 손님도 많았으니 바닥이 꽤 더럽겠네.
그렇게 생각하던 박사가 쓰레받기를 들려는 찰나,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똑.
".....?"
똑.
"....."
똑.
모두 세 번.
남모를 사정인가....
박사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11시 56분. 째깍거리는 소리가 정확히 시간을 지키라는 아미야의 잔소리를 복기시키며 바 내부에 울려퍼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박사로써의 나는 이제 업무를 멈춰야 한다. 내일은 용문과의 회의도 있으며, 여러 작전 지휘도 해야 한다.
하지만.
"들어와."
지금의 그는 박사이면서 동시에 바텐더다. 모름지기 바텐더라면 찾아오는 손님을 거절하지 않는 법. 만약 4번의 두드림이라면 양해를 구했겠지만, 남모를 사정이 있어 바에 찾는 이를 돌려보낼만큼 박사는 매몰차지 않았다.
끼익. 오크 나무 문이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마토이마루?"
"안녕, 박사."
*
박사는 혹시 내가 잘못 보고 있는건가 생각하며 눈을 한 번 비볐다.
은은한 조명.
깔끔한 카운터석.
줄지어 서있는 술들.
잔잔한 음악.
기모노를 입은 채 다소곳하게 앉아 예의바르게 물을 마시는 마토이마루.
응, 그대로네.
"박사? 왜 그래?"
"아, 아니야. 그냥, 좀 의외라서."
"의외....그러네, 하긴 그렇지."
자조하듯 쓴웃음을 짓는 마토이마루를 보며 박사는 아차 싶었지만, 상황을 타개할 만한 말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세상에, 그 마토이마루가 이렇게나 조신하다니! 당장 어제 리유니온과의 전투에서 몇 명을 문자 그대로 찢어발기던 그녀와 정말 동일인물인가?
하지만 피를 흩뿌리며 광기에 취하던 마토이마루도, 지금 여기서 고귀한 아가씨처럼 앉아 있는 마토이마루도 모두 그녀다. 바텐더가 손님에게 편견을 가지다니. 퍽 잘하는 일이구나.
그런 그의 상념을 끊은 건, 체념한 것 같은 마토이마루의 목소리였다.
".....박사. 난 왜 이럴까?"
"마토이마루."
"난 나의 문제가 뭔지 알아. 난 호시구마 씨처럼 내 힘을 제어하지 못해. 그리고 전투에서 피에 취해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고 말이야. 당장 어제도 나 때문에 작전이 실패할 뻔 했잖아."
"....."
"나도 잘 알아. 언제나 후회해. 아,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자중하고 참아야지....항상 그렇게 반성하는데, 전장에서 피만 보면 그 모든 생각이 날아가. 정말 미쳐버리는 것 같아."
그리 길지는 않은 말이었지만, 그녀가 가지는 사정을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마토이마루는 오니다. 극동에서만 사는 종족이며, 머리에 뿔이 달렸고 매우 호전적이다. 신체능력이 타 종족에 비해 매우 뛰어나며, 피에 강하게 반응하여 다 죽어가는 몸으로도 피만 보면 크게 날뛴다. 그 때문에 약한 마취로는 수술 도중에 깨어나거나 피에 취해 후퇴하지 않고 그대로 돌격하는 등, 그 강대한 능력만큼이나 고질적인 문제점도 많은 종족이다.
그녀도 종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마토이마루는 그것이 다른 동족보다 훨씬 심했다. 비교할 만한 대상으로는 호시구마가 좋은 예일 것이다. 피를 보고서도 자신을 억제할 줄 알며, 필요할 때만 광전사와 같은 성질을 해방시키며 스스로를 죽이는 데 능통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언제나 피에 취하고, 전투에 취하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광기에 취했다. 로도스 내에서 극소수가 그녀를 '미친 오니'라는 멸칭으로 부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박사."
"드라이 쉐리 60ml, 드라이 베르무트 30ml."
"...박사?"
"지금부터 너에게 줄 칵테일의 재료야. 잠자코 지켜봐."
그렇게 말하는 박사의 표정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띄고 있어서, 마토이마루도 무심코 옅은 미소를 짙게 할 정도였다.
박사는 술 찬장을 열어 젖햤다. 정교한 유리병에 담긴 형형색색의 술들이 조명을 받아 화려하게 빛났다.
"와..."
"쉐리는 올로로소(Oloroso). 숙성 과정에서 산소와 오랫동안 접촉시킨 놈이지. 짙은 마호가니색을 띄고 맛이 풍부해. 보통은 피노(Fino)를 사용하는데...지금은 올로로소야."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올로로소를 꺼내 들고, 수려한 자세로 마개를 딴다. 일련의 동작이 춤사위와 같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베르무트는 쓴 맛이 강한 드라이 베르무트. 그 중에서도 '마티니 엑스트라 드라이 베르무트'가 좋지. 드라이 베르무트 중에서도 쓴 맛이 더욱 두드러지는 물건이야."
다시금 마개를 따고, 쉐리와 베르무트를 동시에 들어 유리잔에 따른다. 보석과도 같이 빛나는 짙은 암갈색의 쉐리와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베르무트가 차가운 유리잔 안에서 춤추듯 호응한다.
두 액체가 미려하게 섞이고, 박사는 긴 막대 하나를 꺼내 스터한다. 그걸로 끝이다.
"뱀부(Bamboo)야. 한 번 마셔봐."
"뱀부.....대나무?"
"맞아. 정작 재료는 대나무랑 전혀 상관도 없지만서도."
마토이마루가 뱀부를 받아 들었다. 약간 불투명한 액체가 잔에서 은은한 파문을 일으키며 그녀를 자극했다. 보통 오니는 술을 즐긴다. 마토이마루도 물론 그렇지만, 그녀가 마시는 술은 일본주에만 한정되어 있어 이런 양주를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과연 맛은 어떨까. 꼴깍. 그녀가 뱀부를 한 모금 마셨다.
"어? 어라?"
그리고 당황한 듯 뱀부를 요리조리 둘러보더니 다시금 한 모금 머금었다.
"이거, 맛이 일본주랑 비슷한데?"
"맞아. 애초에 극동에서 만들어진 칵테일이니까. 아마 양주로 일본주의 맛을 내기 위해 시험하다가 만들어진 물건이 아닐까? 향도 섬세하고 깔끔한 맛을 자랑하는 칵테일이지."
"맛있어! 정말로!"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고민을 전부 잊은 듯 한 잔의 술에 해맑게 웃으며 반 정도 남은 뱀부를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맛있다아! 하고 크게 외치는 마토이마루를 바라보던 박사는 빈 잔을 가져가더니 똑같은 뱀부를 만들어 그녀의 앞에 놓았다.
"어? 한 잔 더 주는 거야?"
"마토이마루, 이 술은 얼마나 독해?"
"응?"
의외의 질문에 그녀는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생각에 빠지더니 새로 만들어진 뱀부를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한 모금 마신 뒤에야 그녀는 답을 내놓았다.
"별로 안 독해. 일본주랑 비슷한데? 쉽게 마실 수 있어."
"맞아. 일본주는 보통 15도 정도의 도수를 가지지. 그와 비슷하게 네가 마신 뱀부도 15도 정도야. 도수가 비슷하니 간단히 마실 수 있는 거지."
"그렇구나!"
"하지만, 이 칵테일에 들어간 재료는 달라."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토이마루에게 박사는 베르무트와 쉐리 병을 들어올려 보여주었다.
"사용한 쉐리, 올로로소는 20도 가량의 도수를 가지고, 마티니 엑스트라 드라이 베르무트도 18도의 도수를 가져, 강한 도수 둘이 만나 약한 도수가 된 샘이지."
"그게...가능해?"
"물론. 얼마나 섞느냐, 어느 잔에 섞느냐, 얼음을 얼마나 넣느냐, 얼마나 스터하느냐에 따라 바텐더는 칵테일의 도수를 조절할 수 있어. 강한 성질과 강한 성질이 부딪혀도, 부드러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야."
"....! 박사, 너...내 이야기를 듣고...?"
"글쎄? 난 그냥 바텐더야. 누군가에게 조언해줄 위인은 못 되. 난 오니도 아니고, 흡혈귀도 아니고, 사카즈도 아니니까."
난, 그저.
너에게 맛있는 칵테일을 주는 거지.
"풋! 그렇네. 그래. 직업정신이 투철하네!"
마토이마루는 뱀부 잔을 들어올렸다. 정말 부드럽고 섬세한 칵테일이다. 박사는 넌지시 말했지만, 그녀도 이 칵테일처럼 부드럽게 될 수 있을까.
"....박사, 모임을 하나 만들어도 괜찮을까?"
"모임? 어떤 모임 말야?"
"꽃꽃이."
반드시 될 수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사람의 성정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푸념을 들어줄 바는 언제나 문을 연다.
"그거, 멋지네."
"그렇지?"
그러니까, 난 너를 아주 좋아해 박사.
나를 이끌어주고, 곁에서 생각해주며, 함께 나아가는 너를.
정말로,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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