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갈색 토끼와 분홍 토끼
· 갈색 토끼와 분홍 토끼 - 1

사실 성숙한 테라인들은 1년의 어느 시기에건 임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테라인들의 발정기는 종족의 구분 없이 1년 내내 지속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이런 엄밀한 정의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발정기라고 하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폭발적인 성욕과 한껏 민감해지는 몸, 그리고 머릿속을 채우는 온갖 음란한 상상들에 시달리는 시기를 의미한다.

종족에 따라 그 시기와 빈도, 길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일주일을 넘기지 않고, 그 빈도도 1년에 1번~4번 정도로 많지 않은 편이다.
또한 발정기의 영향 역시 개인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발정기를 꽤나 힘겨워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평소와 별다른 것 없이 지내기도 한다.

그리고 안셀은, 지금 갑자기 심해진 발정기에 힘겨워하는 중이다.

첫날에는 별다른 자각이 없었다.
별 일 없는 진찰을 하던 도중 드러난 여성 오퍼레이터들의 새하얀 목덜미를 보며 숨을 들이키게 된다거나,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으며 귓가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에이프릴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게 되는 등의 변화는 있었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넘겼다.

둘째 날이 되자 안셀은 이변을 눈치챘다.
갑자기 등뒤에서 나타나 눈을 가리고는 귀에 '누구게~?'라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서, 안셀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그날따라 귓가에 속삭여지는 달콤한 목소리와 숨결은 안셀의 등줄기와 엉덩이께에 이상한 간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눈가에 닿은 손길, 귓가에 스치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 그리고 등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은 안셀을 엄청나게 당황시켰다.
히엑-!하는 귀여운 비명을 내지르며 안셀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고, 그런 안셀을 보며 에이프릴은 깔깔 웃고는 떠나갔다.

안셀은 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주저앉아 다리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를 숨겨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 자고 일어나보니 속옷을 더럽힌 걸 보고 만 안셀의 마음은 정말이지 착잡했다.
간밤에 꾼 꿈은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날아간지 오래고, 한 카우투스 소녀의 단편적인 화상만이 남아있었다.
마음속으로 에이프릴에게 사과한 그는, 한숨을 폭 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추잡한 화상들을 고개를 휘저으며 털어낸 다음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은 몸을 씻기 위해 안셀은 옷을 벗어둔 채 샤워 부스에 들어간 뒤, 물의 온도를 조절하고 물을 틀었다.
샤워기를 틀자 맨가슴에 물줄기가 닿았고, 안셀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는 달리 샤워기의 물줄기는 너무나 자극적이었고, 그 웃기지도 않은 자극으로 인해 안셀의 하물은 단단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샤워기의 물줄기만으로 달아오르는 몸을 진정시키고, 몸을 씻다가 다시 달아오르고...
그날의 샤워는 평소보다 길었고, 힘겨웠다.
생전 처음으로 안셀은 꾀병을 부려서 그날의 일을 쉬고 침실에 처박혀있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점심시간이 찾아왔고, 안셀은 꾀병을 부리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다.
곁에 있는 메딕 오퍼레이터들은 대부분이 여자였고, 평소에는 신경쓰지 않았던 이 성비가 오늘따라 굉장히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별다른 일 없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이 허접한 몸뚱아리는 달아올랐고, 얼굴이 빨개졌다며 걱정스럽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는 그녀들의 손길은 정말이지 너무나 달콤하고 고통스러웠다.

이대로 오후를 보낼 자신이 없던 안셀은 와파린에게 오후 반차를 써도 되냐고 물었고, 와파린은 별 말 없이 허락해주었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오후와 주말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던 안셀의 맞은편에 한 소녀가 찾아왔다.

"안셀, 같이 먹어도 될까?"
낯익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자, 갈색의 긴 생머리, 흰 색과 주황색의 옷차림, 머리 위에 쫑긋 솟아오른 두 개의 귀가 보인다.
어제 오후에, 그리고 간밤에 안셀을 괴롭힌 카우투스 소녀의 얼굴이 눈앞에 보인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대답한다.
"물론이죠, 에이프릴 씨."

그녀도 새빨갛게 물든 내 얼굴을 보았겠지.
"고마워, 안셀. 그럼 실례할게?"
평소라면 내 맞은편에 앉았을 그녀가, 이번엔 내 옆자리에 앉는다.

옆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묵묵히 눈앞의 식판에 시선을 고정한다.
밥을 먹고는 있지만 그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미묘하게 느껴지는 에이프릴의 체온이, 향기가, 나를 간지럽히는 것만 같다.
그게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가 아닐텐데?

의문을 가지고 옆을 보자, 그녀가 내게 달라붙어있다.
깜짝 놀라 소리를 빽 지를 뻔 했지만, 그녀의 손이 내 입을 막는다.
귓가에 그녀의 입이 다가오고, 그녀가 내게 말한다.
"안셀, 많이 힘들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나는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한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한 번 말한다.
"그러면...내가 도와줄까?"

무언가에 홀린 듯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다음에 나눈 대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식판을 비우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갔다.
여자 숙소쪽 복도를 걷자니 불안감이 들지만, 이 얘기를 했더니 "우리 둘 다 성인인데 뭐 어때~"라는 태평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조금 더 걸어가다가 그녀가 멈춰선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낯선 문이 눈앞에 보인다.
마른침을 삼키자, 에이프릴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말한다.
그녀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