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읽은 시라쿠사의 한 서사시 중엔, 지옥으로 떨어진 죄인들을 가두는 ‘코퀴토스(Cocytus)’라는 얼음 호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방이 그 코퀴토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신경을 마비시킬 것만 같은 냉혹한 정적이 나를 옭아맸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체르노보그에서의 리유니온과의 격전. 프로스트노바의 냉기를 활용한 전투는 아직도 오한이 들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한다.
허나 내 눈앞에 있는 그녀의 존재는 그 오한마저 얘들 장난 수준이라 생각할 정도로 폭력적인 위압감을 내뿜었다.
형광등에 반사되는 옅은 녹색의 머리칼이 반짝인다. 칵테일 중 하나인 미도리 사워에 녹아든 얼음과도 같은 영롱한 빛을 자아냈지만, 지금에 내겐 죄인을 심판하는 천사의 손에 쥐어진 섬광으로 보였다.
탁, 하고 켈시가 마시고 잇던 컵이 테이블에 놓여졌다. 거인의 발자국 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내 귀를 관통했다.
“뭐라 말 좀 해보지?”
켈시의 방에 들어와서 10분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 듣는 한 마디가 무심코 내 등에 철사를 박은 것처럼 뻣뻣하게 피게 만든다.
“어... 그... 오늘 날씨 참 좋다. 그치?”
“실없는 농담은 그만두고. 왜 그랬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린다.
깍지 낀 손으로 하관을 가린 채 날 응시하는 켈시의 시선을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지만, 이번엔 그녀를 지키는 괴수인 Mon3ter가 날 바라보고 있다. 어디를 봐도 불편한 이 상황. 땀으로 인해 와이셔츠가 젖어간다.
“네가 뭘 잘못한지는 알고 있는 거야?”
질문을 회피하려는 나의 태도에 켈시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타는 속마음을 식히려는 듯, 그녀는 컵에 남아 있는 음료를 쭉 들이켰다.
“너. 카우투스 종족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알고 말하는 거야?”
“특징...? 토끼 귀 말하는 거야?”
“그래. 귀 말이야. 귀.”
켈시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다가왔다. 이윽고 그녀는 손을 뻗더니, 얇은 손가락으로 내 귓불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이상한 신음소리를 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우리 같이 동물 귀를 달고 있는 종족들은 너희들보다 귀에 신경조직의 밀도가 높거든? 그만큼 귀쪽이 훨씬 민감해.”
문질 문질. 켈시의 엄지와 검지가 내 귀를 가지고 노는 것이 느껴진다. 왜인지 모를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청각이 민감한 동물의 귀일 수록 그 민감한 정도가 더 높아지거든? 그런데 토끼 귀인 그 카우투스 얘의 귀를 거칠게 문질렀다고?”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하는 켈시의 어조가 점점 높아져가는 게 느껴졌다. 마치 넘실거리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감정의 물결이 날 덮쳐왔다.
“너 이거 부하 직원 성추행이거든? 성감대를 그렇게 문지르면 어떡할 건데! 누구 하나 잘못 건드리다간 발생하는 여파는 안중에도 없어?!”
“아파. 아프다고! 알았으니까!!”
고무줄처럼 귀가 잡아당겨지는 게 느껴졌고, 이윽고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날 엄습했다.
“게다가 대원을 덮쳐? 제정신이야? 내가 카메라로 보고 있는 걸 아는데도 하려고 해? 네가 무슨 발정이 난 짐승새끼야?”
“아니 덮친 건 새비지 쪽이... 아파! 항복! 항복!! 잘못했으니까!!”
손으로 급히 내 귀를 잡고 있는 켈시의 팔을 두세 번 약하게 쳐서 반항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렸다. 켈시는 그것에 손가락의 힘을 뺐지만, 분이 안 풀린 듯 혀를 차면서 나로부터 떨어졌다.
“그런 민감한 곳을 만지도록 허락해 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잠깐, 뭐라고?”
얼얼해진 귀를 쓰다듬다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켈시의 말에 의문이 들어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처리할 서류를 추가로 줄 테니 빨리 가서 처리나 해.”
테이블에 쌓인 서류뭉치 중 일부를 받은 Mon3ter가 방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겨우 처리했는데 또 일을 쥐여주는 저 녹색 악마에게 뭐라 말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것보단 신경 쓰이는 걸 해결하는 게 먼저다.
“저기, 켈시, 방금 말한 게 무슨 뜻...”
“입 다물고 가서 일해. 야근하고 싶지 않으면.”
켈시는 단호한 어조로 고개를 돌렸다. 내게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 혹은 질문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더 이상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겠다 싶어, 할 수 없이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상담을 하러 왔어.”
“...음.”
저녁 9시. 아무도 없는 선내 식당을 채우는 두 명의 목소리. 내 앞에 있는 대원이 눈을 감은 채 작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오른쪽 이마의 뿔을 기준으로 갈라지는, 왼쪽 눈까지 가리는 긴 녹색 생머리. 앉은키가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큰 듬직한 풍채. 검은색 민소매 상의가 강조시키는 단련된 팔 근육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인지 짐작하게 만든다.
용문근위국 특수부대원이자 현재 로도스에 협력하고 있는 디펜더 오퍼레이터, 호시구마다.
사적으로 만날 때 제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털털한 녀석인 만큼, 언제나 고민이 있을 때 1순위로 찾는 대원이다. 공과 사가 확실한 친구니 말이 새어나갈 일도 없는 것도 소소한 장점. 이러한 이유로 그녀를 불러서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을 하고 상담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잠시 고민하듯, 이리저리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호시구마의 눈이 떠졌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박사가 부하 직원을 성추행해서 켈시 선생한테 끌려갔는데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거지?”
“앞부분은 빼줘...”
“틀린 건 아니잖아?”
“완전히 부정은 못 하겠다만...”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초조한 내 마음을 반영하듯, 손발이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는다.
호시구마는 내가 자판기에서 사준 탄산음료를 입에 대면서 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걸 허락해 준다는 의미를 모른다.’라...”
호시구마의 회색 눈은 허공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투 중에서만 볼 수 있는, 먹이를 노리는 짐승과도 같은 예리함. 여러 경험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베테랑의 눈이었다. 허나 솔루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곧바로 그녀는 눈썹을 찡그린 채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하나밖에 안 날 거 같은데.”
“답이 나온 게 어디야, 어떤 의미인데?”
“아니, 이건 뭐... 초등학생도 알 거 같은 답인데? 박사는 진짜로 모르는 거야?”
초등학생도 알 답이라는 말 한마디가 비수를 꽂았다. 이게 뭔 망신이냐고 나 자신을 질책하면서도, 그 정도로 간단한 거였냐는 허탈감과 절망감이 박사 학위라는 유치한 자존심을 종이 구기듯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 내 모습이 웃기다는 듯 잠시 쿡쿡 웃더니, 캔에 남은 음료를 들이킨 호시구마는 상쾌하다는 듯 청량한 한숨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 새비지라는 아이가 널 좋아한다는 뜻 아냐?”
저 한 마디 덕에, 뇌가 2초 동안 활동을 정지한 것 같았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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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의 '시라쿠사의 한 서사시'는 단테의 '신곡'이야. 시라쿠사가 이탈리아 모티브라길래 넣어봤어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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