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 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복도의 정적. 그와 동시에 문 너머로 들리는, 사물들이 급하게 치워지는 것 같은 소리. 그렇게 10초가량 지나 고 나서 잠금장치가 해제되고 문이 옆으로 움직였다. 난방을 켜둔 건지 열기가 날 맞이했다.
“바, 박사...?”
그리고 바로 내 눈앞에,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산발이 되어있는 은색 머리칼. 그 아래로 보이는 땀투성이의 홍조 섞인 얼굴과 풀린 눈. 급하게 입은 건지 흐트러져 있는 헐렁한 흰색 민소매 러닝,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짧은 검은색 돌핀 팬츠.
선정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모습에 더하여, 그녀에게서 본능을 자극하는 것 같은 묘한 향기가 느껴졌다.
“밤중에 미안. 운동 중이었어?”
“응? 아... 응, 뭐... 그렇지.”
새비지는 당황한 듯 내 시선을 피하며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잠시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들어가도 괜찮을까?”
“지금...? 그, 방 정리를 안 해서 난잡할 텐데...”
“중요한 거라 그래.”
내 대답을 들은 새비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살짝 옆으로 비켜서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것에 응해 들어오자, 방금까지 누워있던 걸로 추정되는 이불을 빼고는 제법 깨끗하게 정돈된 방이 시야에 비쳤다.
옷장에 걸쳐진 일상복 몇 벌과 테이블에 있는 소량의 화장품들과 노트북 한 대. 설거지가 막 끝났는지 가스레인지 옆에서 몸을 천천히 말리고 있는 식기들. 방 안에서의 그녀가 어떤 모습인지를 얼추 유사할 수 있었다.
잠시 앉아도 되겠냐는 내 질문에 대한 허가를 받고, 침대에 살포시 몸을 앉혔다. 새비지는 옆에 앉으면서 시선을 내게로 맞추었다.
역시, 결심을 했다고는 해도, 긴장되는 이 마음이 가라앉지는 않는 것 같다. 해야 할 말이 기껏 목 끝까지 도착했는데, 둑을 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그 이상을 가지를 못 하고 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어정쩡하게 물러날 수는 없다. 천천히. 주제를 좀 우회해서 가더라도 반드시 끝을 보고 마리라.
“일단, 그... 사과하러 왔어. 좀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좀 전... 아, 응...”
“켈시한테 들었어. 너희에겐 매우 민감한 부분이라고 하더라. 그런 부분을 맘대로 만지려고 해서, 정말 미안해.”
“아, 아냐! 괜찮아.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 되는걸.”
“네가? 뭐를?”
“그... 그 이후에, 내가 널... 으... 위로 올라가서 그...”
붉어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 새비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점점 뒤로 갈수록 모기 울음소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리가 작아졌다.
“미안해, 이상한 기분이 들더니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어서... 나 때문에 켈시한테 많이 혼났지...?”
“혼나기야 했다만, 딱히 사과할 건 아니잖아. 애초에 내가 시작한 거였고.”
낯간지러운 이 상황 때문에 무심코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제대로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해 조바심이 날 거 같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싫지 않았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그러면서 새비지의 손끝이 내 손에 닿았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약간의 짜릿함이 팔을 감싸는 것 같았다.
“켈시에게 그 말을 듣고 나서 제일 처음으로 느낀 게 있어. 부끄러운 걸 참고서 내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려 했다는 게, 진짜로 기뻤어. 이런 걸 들어줄 정도로, 너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증거인 거니까.”
등을 살짝 숙인 채 깍지를 낀 채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말을 꺼낼 수가 없을 것 같은, 겁 많은 나의 소소한 저항이었다.
“그리고 네가, 그래. 속된 말로 덮쳐왔을 때도, 솔직히 두근거렸어. 평소와 다른 너의 모습을 본 것 같아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보일 리가 없는 얼굴을 내게 보여준 것 같아서. 아마 켈시가 제지하지 않았으면 넋빠진 채로 있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네가 예뻐 보였거든.”
갑자기 방에 정적이 덮쳐왔다. 그로 인해 당황함과 초조함,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물결이 내 심장을 채우는 것만 같았다. 뭐지? 내가 뭘 잘못 말해서 새비지가 실망한 건가? 지금 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보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약 10초쯤 지났을까? 불안을 침과 함께 식도 너머로 꿀꺽 삼킨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시야에는 멍한 듯 날 바라보는 새비지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말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해, 지레짐작해 철렁해진 가슴을 쓸어내렸다.
호시구마가 내게 해준 말들을 다시 새기며, 용기를 발판 삼아 새비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있지, 새비지. 우리, 지금 이상의 관계가 되는 건 어떻다고 생각해?”
“바, 박사?! 무슨 소리를...?”
진정되어 가던 새비지의 뺨이 고열로 제련 중인 강철처럼 붉어졌다. 그와 동시에, 푹 숙여져 있던 토끼 귀가 철사를 박은 점토 인형처럼 뻣뻣해지면서 앞뒤로 격하게 흔들거렸다.
“박사, 번지수 잘못 찾은 거 아냐? 아무리 봐도 이건...”
“잘못 찾을 리가 없잖아. 진지하게 생각하고 온 건데.”
북받치는 감정을 감추려는 것인지, 새비지는 하관을 양손을 가리며 나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새의 날개처럼 파닥이는 저 귀가 그런 그녀의 노력을 의미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
“혹시, 싫은 거야?”
“아냐, 그럴 리가...”
“그러면?”
“왜 많은 아이들 중에 하필이면 나야? 로도스에 박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고. 더 예쁘고 매력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무엇보다 당신에겐 아미야랑 켈시가...!”
“새비지.”
머리에서 증기가 나는 연출이 어울릴 거 같은 저 모습을 더 보고 싶긴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거리를 더 밀착시켜, 용문의 꼬마 소방관님이랑 견줄 정도의 속도로 횡설수설 말하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새비지, 예전에 네가 말했지. 우린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어...? 응, 그렇지...?”
당황한 듯 잠시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는 새비지를 보며, 난 계속 할 말을 이어나갔다.
당당하게 고백하기 이전에, 그녀를 향해 전달하고 싶었던 내 진심을, 지금 여기서 건넨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듯이, 과거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랑은 어쩌면 별개의 사람일지도 몰라.”
눈을 떠보니 보이는 건 기억에 없는 사람들. 그리고 불꽃과 쇠붙이가 폭풍과 함께 춤추는 전장. 간신히 살아남아 이동하니 주어진 건 한 단체의 최고 책임자의 지위와 의무.
“솔직히 무서웠어. 기억을 잃기 전의 사람들에게 내가 민폐를 끼칠 거 같아서. 그들이 그리워하는 사람의 몸과 추억을 내가 짓밟고 빼앗아가는 거 같아서. 이런 나는,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하고 매번 생각해왔어.”
그런 상태에서 달려오는 ‘현재의 나’에게 무의식적으로 전해져 오는 ‘과거의 나’의 잔재. 의도치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잔재를 그리워하는 ‘과거의 나’의 주변인들이 주는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압박. 마치 전신을 옭아매는 달궈진 쇠사슬이 몸을 저 멀리 있는 지하로 떨구는 것만 같았다.
또 어느 한편으로 느껴지는 건, ‘과거의 나’에 대한 들끓는 증오.
원치도 않는 상황에 처하고, 그걸 처리하도록 강요당하고, 기억에도 없는 행적을 이어나가야 되는 이 사명을 떠넘긴 빌어먹을 남성이 죽도록 밉다는, 이기심과 회피 심리에 기반한, 추악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이 감정은 피폐해진 내 몸을 천천히 좀먹어갔다.
“그러던 도중에, 너를 만나게 됐지.”
[나는 림 빌리튼에서 온 새비지. 잘 부탁해. 박사랑 아미야가 여기 있다고 듣고 곧장 달려왔어! 어, 박사,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고? 에에?!]
새비지를 처음 만난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기억을 잃은 날 보고 당황했던 표정을. 아쉽다는 듯이 쓴웃음을 짓는 그 얼굴을.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과거의 나’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거라 생각해, 안 그래도 쌓여가던 죄책감의 추를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 같았다.
기억을 잃고 이 일 년에 가까운 이 시간동안 만들어낸 추억들과 돌파해온 역경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지금 쥐고 있는 새비지의 손에 악력을 가했다.
“예전에 너랑, 아미야랑 같이 용문에 장보러 가고 로도스로 돌아가는 길에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해?”
[이렇게 박사랑 아미야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해. 기억은 과거의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미래의 가능성은 무한하니까. 나도 아미야도 앞으로 박사와 함께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 갈거야.]
자고 있는 아미야를 자신의 옷으로 덮어주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는 새비지의 모습은, 그때 한 말과 더불어 내게 있어 결코 잊지 않을, 설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잃고 싶지 않은 한 장면이 되었다.
“그 말은 들었을 때, 어떠한 영광이나 찬사보다도 기뻤어. 과거의 나만이 아닌,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는 뜻이었으니까.”
‘현재를 소중히 하며, 미래를 같이 걸어 나가자.’
과거라는 기나긴 터널 속에서, 계속 존재 의의에 대해 방황하는 나 자신이,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 제일 말하고 싶었고, 또한 그들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
그때 새비지가 쏘아 올린 작은 불씨는, 방황하는 어린 양을 이끄는 빛과도 같이, 내 마음속을 채우는 햇빛이 되었다.
아마도 내가 눈앞의 여성에게 반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이때부터였겠지.
“설령 그게 별생각 없이 말한 것이라 해도 상관없어. 감정과 업보의 수렁에 매몰되어가는 내게 있어서, 그 말은 어떤 것보다도 빛나는 구원이었으니까.”
회상에 잠겨 감겨있던 눈꺼풀을 열었다. 잡고 있던 새비지의 손을 놓고, 양손으로 새비지의 어깨를 잡았다. 내 행동을 예상 못 했다는 것 같이, 새비지의 어깨가 압력이 사라진 용수철처럼 움찔거렸다.
“거절해도 괜찮아. 이미 각오하고 온 거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 한심한 남자의 고백을 들어주지 않을래?”
떨리고 있는 그녀의 회색 눈은, 각오를 다진 나의 얼굴이 비쳤다.
밑바닥은 전부 깔렸다. 이제 남은 건, 계속 망설여 왔던 골라인을 향한 단 한 걸음.
“계속 말하고 싶었어. 정말로 고마워. 그리고, 널 진짜로 좋아해. 새비지.”
저질렀다. 그 네 글자가 내 시야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최후의 지점을 드디어 뛰어넘었다. 골라인에 다다랐으니, 이제는 그 결과를 듣는 것일 뿐.
두근. 두근. 심장소리가 포탄의 발사음과도 같이 귓가에서 울려 퍼진다. 그와 같이 들리는, 벽에 달려 있는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1초마다 내 몸에서 산소와 수분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오싹함이, 식은땀을 등 뒤로 흐르게 만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매우 낯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한 것 같아서, 지금 당장이라도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 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안 된다. 그녀의 답을 듣기 전까진, 설령 그것이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할지라도.
“거절할 리가 없잖아.”
그 말과 함께, 느려진 것 같은 시간이 아예 멈춘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속눈썹 한 가닥 한 가닥 세밀하게 보일 정도로 가깝게, 눈 감고 있는 새비지의 모습이 바로 앞에 보이고 있다.
민소매 너머로 보이는 풍만한 계곡이 내 가슴팍에 밀착하면서, 마치 이성을 끊어버릴 것 같은 쾌감이 척추를 관통했다.
그리고 지금 내 입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의 짠맛이 느껴지는 감촉.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뺨을 잡아당겨보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추고 밟고 있는 바닥이 스펀지처럼 부드러워지는 것만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째깍. 째깍. 시계의 초침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우린 입술이 겹쳐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숨이 막히는 듯, 새비지는 몸을 살짝 나에게서 떨어트렸다. 꽤나 오래 참아서 그런지,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계속, 계속 마음속에 품어왔는데, 싫어할 리가 없잖아.”
새비지는 내 뺨을 양손으로 잡은 채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을 겹치며 무게를 실은 그녀의 몸에 떠밀려 자연스레 침대에 누워진 형상이 되었다.
몇 분은 지난 것 같은 수 초가 지나자, 이물질이 내 입술을 파고드는 것만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이런 건 분명 처음일 텐데. 어째선지 자연스레 입을 열며 새비지가 내민 혀를 받아들였다. 마치 경험했다는 듯, 혀와 혀가 원래 자리를 찾았다는 듯 얽히기 시작했다.
선정적인 소리가 우리 주변을 한동안 감쌌고, 이윽고 투명한 흰색의 가느다란 실이 혀와 혀를 잇다가 눈꽃송이처럼 흩어졌다.
“좋아해, 정말로 좋아해. 이 세상 그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너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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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갤마다 금지 단어가 다름?? 고치느라 애먹었네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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