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이 전혀 나지를 않는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몸은 이미 1톤짜리 추가 되어버렸다. 양팔을 들 힘도 남아있지 않은 채, 테이블을 배게 삼아 이마를 파묻었다. 철제로 된 표면이 열날 거 같은 내 머릿속을 식혀주는 것 같았다.
“무진장 피곤해 보이네?”
앞에서 뭔가를 우적우적 씹고 있는 호시구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 용문 상가와의 협찬으로 로도스에 새로 들어온 패스트푸드점의 신상 햄버거랑 콜라를 양손에 들며 번갈아가며 먹고 마시고를 반복하고 있는 그녀를 보다가 잠시 고개를 떨궜다.
“배고파? 좀 나눠줘?”
“아니...”
“하긴, 박사는 여친씨가 매일 밥 만들어 주잖아?”
“그건 그렇지...”
여친이라는 말에 별 반응이 없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로부터 어언 3주쯤 됐을까. 새비지와 연인이 된 게. 현재 로도스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아서 아직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앞의 호시구마를 포함한 소수 인원뿐이지만, 발 없는 말 천리 간다고 했다. 아마도 다른 대원들도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일 뿐이겠지.
“왜 그리 침울해 있어? 둘이 싸우기라도 한 거야?”
“그것도 아니야...”
“뭐야, 그럼 일이 너무 많은 거야?”
“이미 다 했어...”
“그럼 대체 뭔데?”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5초쯤 고민해봤지만, 어차피 앞에 있는 건 용문의 그 무서운 공무원씨다. 심문 당해서 말하는 것보다 편하게 말하는 게 낫겠지.
“있는 기 없는 기 다 빨려서 그래...”
갑자기 사레들린 것처럼 호시구마의 기침소리가 들린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력을 모아 고개를 들었더니, 옷과 테이블이 콜라로 얼룩져 있고,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주머니에 상비하고 다니는 포켓 티슈를 꺼내서 그녀에게 건넸다. 감사하다는 말이랑 함께 콜라를 닦아낸 호시구마는, 재밌는 게 떠올랐다는 듯 쿡쿡 웃기 시작했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
“뭐가?”
“요 몇 주간 주기적으로 같은 날에 말이야. 넌 피골이 상접해 있고 네 여친은 피부가 윤기가 흐르는 게 보여서 뭔 일인가 싶더니, 양기가 주입돼서 그런 거였어?”
철판이 내 머리를 가격한 것 같은 효과음이 들리는 기분. 기력이 없는 내 몸이 긴급 전력을 주입당한 란셋이라도 된 것처럼, 척추와 관절의 단말마를 무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째선지 저 웃고 있는 표정에서 불길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눈이 띄었어?”
“너 설마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나저나, 누구도 아니고 네가 눈치챘을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죄다...”
“아마 그렇지 않을... 잠깐, 방금 그거 나 비하하는 발언 같은데?”
기분 탓이야,라며 능숙하게 호시구마가 묻는 것을 넘기며, 의자에 등을 맡겼다.
그렇구나. 이미 로도스의 대원들도 알아차렸구나.
어쩐지 요 며칠간 오퍼레이터들의 시선이, 특히 남성 오퍼레이터들이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안광을 발사하고 있어서 내가 뭔 실수라도 했나 지레짐작을 했었는데. 나랑 새비지의 관계를 알아차려서 그랬구나.
“박사, 표정 관리 좀 해. 헤벌쭉해가지곤.”
급히 하관을 손으로 가렸다. 손가락 너머로 광대가 승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로도스의 수뇌부라는 녀석이 이렇게 감정을 못 숨기다니, 참 한심하기 그지없는 남자다.
“암튼 간에 보기 좋네. 너희 둘 사이가 좋다는 거 아니겠어?”
“그 덕에 말라죽게 생겼지만 말이야.”
“운동해서 근육이라도 키워. 단백질 보충제도 좀 먹고. 뭣하면 내가 지도해줄까?”
“운동은 이미 침대 위 운동만으로도 벅찬데.”
수위 높은 농담에 피식해버린 나와 그녀의 웃음소리가 식당을 감쌌다. 그로 인해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거에 관심 없다는 듯, 내 연애사에 대한 호시구마와의 잡담은, 한동안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
새비지와 연인이 되고 나서 내 생활 패턴엔 약간의 변동 사항이 생겼다.
첫 번째로, 아침에 먼저 일어난 쪽이 모닝콜을 해주는 것. 알람시계의 비명소리와 함께 비몽사몽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나긋나긋하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일과가 시작된다. 매일 아침이 기대되어지는 게 태어나서 처음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로는, 시간이 빌 때는 밖으로 나가서 같이 산책하는 것. 위치에 상관없이, 거리에 상관없이, 뭘 하던 상관없이. 둘만의 시간을 즐기자는 목적으로, 우리만의 추억을 만들어나갔다. 새비지와 내 방의 창가에 있는 페리윙클의 화분도 그 ‘추억’의 산물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일 최소 한 번은 그녀의 방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다. 하루의 시작을, 혹은 하루의 끝을 그녀의 수제 림 빌리턴 요리로 장식하는 이 시간은, 지금의 내겐 그 어떤 때보다도 제일 기대되는 시간이다.
그녀의 특기 요리인 버섯 파이나 양배추 샐러드도 최고지만, 림 빌리턴의 특산품인 감자로 만들어지는 여러 종류의 요리는 매일매일 나에게 기대를 품으며 그녀를 찾아가게 만든다. 그렇게 오늘도 두근두근한 마음을 품고 그녀의 방에 왔는데...
“저, 새비지...?”
“응?”
“그, 오늘따라 뭔가 화려하네?”
테이블 한가운데에 있는 촛불과 아로마 디퓨저도 그렇지만, 어째선지 평소랑 달리 내 옆의 의자에 앉아 날 지긋이 바라보는 새비지의 모습이 보인다. 민소매 옷과 핫팬츠를 입고 있는 상태로 폭이 넓은 앞치마를 입고 있으니, 마치 남성들이 흔히 망상하는 ‘알몸 에이프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거 같아 심장이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눈앞에 있는 큰 원형의 접시.
원형을 이룬 통마늘들의 한가운데에 있는 소스를 곁들인 장어구이.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 있는 해산물의 향이 나는 페이스트. 그리고 접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자주색 액체가 담긴 와인 잔.
딱 봐도 감이 온다. 죄다 정력에 증강 효과가 있는 음식들이다.
“오늘따라 박사가 너무 힘이 없어 보여서, 힘내라고 만들어 봤어!”
어제도 밤새도록 했는데, 오늘도 하는 건가. 매우 약간이지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연인이 된 이후로 어째선지 새비지도 뭔가 변하기 시작했다. 손을 잡거나 허그를 하는 등 스킨십이 늘어난 것도 그렇고, 나랑 대화할 때 목소리 톤이 묘하게 높아진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살을 섞는 것도 그렇고...
예전엔 그저 건강미가 넘치는 여성이라 생각했건만, 사귀고 난 후부턴 마치 중세 설화에 나오는 몽마(夢魔)와도 같이 적극적으로 육체관계를 갈구해오는 것에 마음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랑은 여자를 바꾼다는 게 설마 이런 의미였단 말인가.
혹시 나, 그녀의 잠겨 있던 리미터를 부수거나 한 건 아니겠지?
그런 내 걱정을 알고 있기나 할지, 새비지는 미리 조각 내둔 장어구이를 포크로 찍어서, 소스가 떨어지지 않게 다른 한 손으로 포크 아래를 감싸서 내게 입을 벌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장어구이가 내 식도로 넘어가는 걸 확인한 그녀는, 갑자기 내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해왔다.
“오늘도, 잘 부탁해, 리블링(Liebling)?”
림 빌리턴식 애칭으로 날 부르는 애교 섞인 목소리와 상반되는, 먹이를 보는 맹수와도 같이 입맛을 다시고 있는 그녀의 요염한 표정이 내 시야를 뒤덮었다. ‘토끼는 만년 발정기다’라는 어떤 서적에서 읽은 문장이 어째선지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째 이 단어를 요즘 따라 자주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한데, 아무래도 오늘 밤도 내 아랫도리는 좆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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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나오는 페리윙클의 꽃말은 '즐거운 추억'.
●'리블링'은 실제로 독일에서 연인들끼리 쓰는 애칭입니다. 림 빌리턴이 독일이 모티브라서 넣어봄.
●다음편은 스카디편. 시간 되는대로 올릴게!
https://m.dcinside.com/board/hypergryph/113604
링크 모음!
웨 성녀밖에 안보이냐
지금 업로드 끝냈어!
아 시발 개추 덕분에 ㅈㄴ재밌게 봤다 일러는 감자지만 성격은 개좋네 성녀님편보다 갠적으론 이게 더 현실성있어서 쉽게 받아들인듯 잘읽었다
아 글고 표현력 좋더라 ㅇㅇ 글이 쉽게 읽히고 분위기가 머릿속에 그려져서 좋았음
이제야 봤다... 읽어줘서 고마워!
그럼 다음꺼 써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