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갤 번역이 없는 언펙터, 베나, 카제마루, 루멘, 실론, 위스퍼레인, 퓨어스트림, 오로라
'음반' 수집 상자 (스펙터 디 언체인드)
스펙터가 음반 상자에서 음반 한 장을 골라 축음기에 올려놓자, 은은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스펙터는 쉬는 날이다. 그녀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다음 임무, 다음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충분히 쉬는 것이다.
음반은 그녀가 이베리아에서 온 오퍼레이터로부터 산 것인데, 이베리아 황금시대의 걸작이라 한다.
눈을 감은 스펙터는 소파에 몸을 묻고 조용히 음악을 즐겼다.
그녀는 이베리아의 황금시대가 대체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음악 속에서 당시의 찬란함과 사람들이 성취에 대한 자부심은 느낄 수 있었다.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녀도 인정했다.
비록 그녀는 대륙 문명을 비웃는 일을 절대 숨기지 않지만, 이런 편견을 예술에까지 적용하고 싶진 않았다.
맞다, 편견.
심지어 그녀는 박사 앞에서도 이 점을 인정하면서 계속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렇다고 이게 의미 없는 고집은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이런 점이 대장과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대장의 거만함은 총전쟁설계사라는 시야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 온 건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지금의 일에 열중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따금씩 고향의 그 조각상은 어떻게 됐을까, 고향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그녀는 생각하곤 한다.
음악이 갑자기 멈췄다.
눈을 뜬 로렌티나에게 가장 먼저 들어오는 모습은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한 천장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 새로운 환경에 점차 익숙해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이런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려면 기존의 환경에서 벗어나기 싫다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그녀는 이미 에기르에서의 생활이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거의 잊어버렸다.
그녀는 음반 상자에서 톱날을 꺼내 천천히 닦는 한편, 새로운 음반을 꺼내 틀었다. 어쩌면 이베리아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황금시대를 기록했듯이, 그녀 역시 과거에 가장 사랑했던 일을 다시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조각 일 말이다.
다행인 점은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으니, 고향의 모습을 떠올릴 시간은 충분하다며 그녀는 약간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제프리 고금 동화집》 양장본 (베나)
옛날, 머나먼 숲속에 성 하나가 있었습니다.
성안에는 한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아이는 창고에서 빵을 꺼내고 우물에서 물을 떴습니다. 그게 아이의 하루 식량이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면 아이는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하루 또 하루, 그리고 한 해 또 한 해가 흘렀습니다.
성문 밖 숲은 깊고 어두운데다,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튼튼한 성이 아이를 지켜주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성도 언젠가는 무너질 것입니다.
아무리 구멍을 열심히 메워봤지만, 성의 균열은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아이는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녀가 성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아이는 지금까지 그 문을 열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문밖의 모든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마녀의 간청을 듣자, 착한 아이는 마녀를 성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성의 음식은 아이도 겨우 먹고살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이는 흔쾌히 마녀에게 음식의 반을 나눠줬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마녀가 아이를 찾아왔습니다.
마녀는 아이의 선택에 흡족해하며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하나의 소원이라, 아이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성을 수리하고 계속 예전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녀가 간 뒤에, 만약 성이 다시 망가지면 어떡하지?
이리저리 생각한 끝에 아이는 완벽한 소원을 생각해냈습니다.
“저는 이 성과 함께 숲을 떠나고 싶어요.”
그 후 아이는 여행길에 올랐고,
아이의 등 뒤에는 아이와 비슷한 모습의 영원히 아이를 지켜주는 작은 성이 남아있었습니다.
——《아이의 성》, 《제프리 고금 동화집》에서 발췌
오래된 물건 (카제마루)
카제마루는 머리에 흙이 묻은 채 부모님을 찾아갔다.
그녀는 다섯 살 때부터 닌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가족, 충성, 자유, 미래…… 그때의 카제마루는 이런 것들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이를 악물고 아이가 받기에는 다소 지나치게 잔혹한 특훈을 견디고 견뎠을 뿐이다. 커다란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가장 대단했던 선배들처럼 일등을 해서 가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싶었다.
하지만 '충성을 바친다'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것이 영광이고, 부모님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는 것만 알 뿐. 그렇기에 그녀는 그걸 해내야 했다.
머리 위의 흙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는 카제마루는 젊은 가주를 찾아갔다.
그녀는 가주의 닌자가 되었다. 머리는 모자에 올려 넣었고, 손톱은 단정하게 정리했다. 죽통에 끼워진 임무가 거듭해서 비밀리에 그녀의 손에 전해졌다. 카제마루는 안에 있는 두루마리를 꺼내곤 말없이 살펴봤다. 파울비스트가 놀라 움직이기 전에, 두루마리에 적힌 자기도 모르는 이름은 소리소문없이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잘했다.”
가주는 언제나 이렇게 칭찬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복하면서 한 엄마가 울고 있는 아이에게 “계속 울면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잡아간다!”라고 윽박지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젊은 가주는 자기 수하의 머리에 붙은 진흙을 보고 있었다.
새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 더는 두루마리가 끼워진 죽통을 받지 못했다. 가주가 세상을 떠난 후, 카제마루는 다른 옷을 받게 되었다.
회의실은 은폐된 곳에 있지 않았으나 좁고 폐쇄됐으며, 매번 오가는 계약은 공명정대했지만, 한편으론 너무 안정적이고 지루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카제마루는 사무용 책상 앞에서 굳은 목 관절을 움직였다. 관절이 마찰하며 '우두둑'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이 소리를 들었을 때가 그녀가 암기에 뼈가 다쳤을 때였다.
그녀는 앉아있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과거 한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윽박지를 때 말한 '검은 옷 입은 사람'이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녀가 해야 할 것도 아니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싶었고, 자기 재주를 썩히기도 싫었다. 그녀는 새로운 길을 바랐으나 아직 완전히 결심하진 못했다.
젊은 가주는 손을 뻗어 카제마루의 옅은 색 머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 주었다. 그리고 계약 해지서를 건네주며 로도스 아일랜드의 명함도 함께 건넸다.
어느 날 퇴근길에, 제대로 놓여있지 않았던 화분이 바람에 쓰러져 하늘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화분은 공중에서 흙과 나뭇잎을 흩뿌리며 그대로 카제마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머리에 흙과 화분의 파편을 얹은 채 카제마루는 갑자기 깨달았다. 떠나고 싶다, 떠나야 한다.
순동 단안망원경 (루멘)
조르디의 종아리에는 지금은 알아보기 힘든 흉터가 있는데, 그가 아홉 살 무렵 생긴 것이다.
어린 시절 조르디는 마을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벤치 위에 무릎을 감싸 안고 멍하니 앉아, 광장 중심에 있는 등대 조각상을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한 번 보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보곤 했다. 때문에 조르디는 심혈을 기울여 앉는 위치를 정했다. 그가 고른 각도에서 보면 매일 해가 떨어지는 어느 순간에, 서쪽을 지는 해가 조각상 꼭대기와 겹치면서 마치 작은 등대에도 불이 켜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건 이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이다. 고작 숨을 몇 번 쉴 시간이 지나면 등대 조각상은 다시 불이 꺼지고, 주변의 모든 것은 빠르게 그림자에 둘러싸이며 어둠에 삼켜진다. 조금 전의 모습은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다행히도 다음날에 태양은 다시 뜨고, 등대는 여전히 불이 켜질 것이다. 물론, 찰나의 한 순간뿐이겠지만.
아홉 살 생일날, 조르디는 큰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더 영원한 것을 잡고 싶었던 그는, 마을 어른들이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쉬쉬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부모가 실종됐던 그 거대한 건축물을, 진정한 '이베리아의 눈'을 보고 싶었다. 조르디는 광장의 조각상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각상 꼭대기 위라면 분명 짙은 안개를 뚫고 온 진짜 등대의 불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조금씩 조금씩, 광장의 행인들이 황급히 지르는 비명이 들렸지만, 조각상의 꼭대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약하기만 한다면……
그러나 조르디는 갑자기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본래 밟았어야 할 돌출부가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원인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조르디는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짧은 순간이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새뽀얀 안개는 마치 베일처럼 바다 위의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조르디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이미 자기 집에 있었다.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있었고 고기죽의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조르디의 움직이는 소리를 들은 티아고가 주방에서 몸을 내밀었다. 조르디는 욕 한 바가지를 먹을 거라 생각했으나, 티아고는 한동안 조르디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책상을 향해 가리켰다. 그곳에는 단원 망원경이 매혹적인 구릿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것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이제는 흉터마저 빛이 바랬다. 마을의 유일한 광장은 시간으로부터 잊힌 듯 늘 그대로다. 조르디는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위치에 앉았다. 이미 진정한 이베리아의 눈을 보았지만, 더는 삼촌과 함께 벤치에 앉아 가슴 설레는 이야기를 들으며 망원경 하나로 둘이 번갈아 가며 먼 곳을 볼 수 없었다.
이젠 망원경의 도움을 받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 만은 두 사람이 짜기라도 한 듯 서로에게 언급하지는 않았다.
야외 답사 세트 (실론)
병원 복도 벤치에 책을 읽고 있는 학생과 교사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 곁에는 수심에 찬 얼굴의 노동자가 초조한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피터 데이비스.” 의사가 진단 보고서를 들고 나타났다. 호명 당한 노동자는 긴장하며 고개를 들었고, 학생은 책을 덮었다.
“혈중 오리지늄 결정 밀도가 높으나 광석병 감염 증상은 없습니다.”
“실론 도이코스, 혈중 오리지늄 결정 밀도가 높으나 역시 광석병 감염 증상은 없습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고, 학생은 기쁜 듯이 그녀의 선생님에게 말했다. “보세요, 선생님! 우리 아무 일도 없잖아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야.”
선생님은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분명 주의를 줬을 텐데. 야외 조사를 할 때는 규정된 안전 활동 구역과 활동 시간 범위 안에서 진행해야 하고, 방호 조치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전문적인 방호복이 없는 상태에서 고도로 활성화된 오리지늄에 접촉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야. 게다가 우리에겐 광산 채굴 구역에 들어갈 권한도 없어. 너의 행동에 광산 측이 책임이라도 묻는다면 어떡할 건데. 실론, 너는 좋은 학생이잖아.”
“하지만 저는 책에서 본 이론을 검증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데이비드 씨와 동료들에게 작업을 중단하라고 알려 주지 않았다면, 분명 급성 감염 사건이 발생했을 거라고요. 저는……”
“만약 너의 판단이 틀렸었다면?”
실론은 멈칫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퇴학 조치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수업은 재수강해야 한다.” 선생님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건 너의 첫 번째 야외 조사일 뿐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안전에 주의하도록.”
선생님이 떠난 후에야 광산 노동자는 긴장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가 폐를 끼친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선생님께서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아니에요.” 실론은 미소로 답했다.
“선생님이 무슨 뜻으로 그러신 건지 알아요. 선생님께서는 이번 수업으로 제게 무서움을 알고, 최악의 결과를 대비하라는 걸 가르치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제가 책임질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하고요.”
“그 후에야 저는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고풍스러운 구급상자 (위스퍼레인)
비가 오던 날, 한 젊은 여행자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비를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마을 아이들이 하나둘씩 괴질을 앓았고, 우리 집 베이치도 이를 피하진 못했었다. 사람들은 어떤 마족의 주술이 남몰래 전파되고 있다면서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연약한 그 여인을 폭우 속으로 쫓아낼 수 없던 우리는 그녀를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녀는 베이치를 보자마자 단번에 이상을 알아챘다. 그녀는 우리에게 증상을 자세히 묻고는, 다시 마을의 전반적인 상황을 물어본 뒤에야 자신은 떠돌이 의사라고 밝혔다.
“이건 오리지늄 아츠가 아니라 질병입니다. 땅과 수원이 더럽혀진 거예요. 아이들이 먼저 병에 걸리고, 매일 독소가 쌓이면서 나중에 어른들도 증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여행 가방을 열고는 익숙한 솜씨로 약을 배합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제가 제공할 수 있는 건 응급처치뿐이에요. 이런 병의 유일한 치료법은 오염원을 멀리하고 장기간 약을 복용하는 거예요. 가능하다면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이곳을 떠나라고 말해주세요.”
“하지만 여긴 우리의 집입니다.” 남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 땅이 우리를 해친다고 이곳을 떠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의사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할 뿐이었다.
다음날 날이 갰고, 우리는 마침 떠나려는 의사와 마주쳤다. 그리고 문에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야생화가 한 다발이 꽂혀 있었다. 그 순간, 내 기억 속의 흐릿했던 모습과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겹치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 저 기억났어요. 전 당신을 본 적 있어요.”
“당시 저는 이동 도시 바깥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어요. 당신은 사람들의 병을 돌봐주었고, 언제나 조용히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야생화를 보내줬지요…… 당시 저는 창문 커튼 뒤에 숨어 지켜봤어요.”
“수십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어머니께서 광석병에 걸리는 바람에 우리는 쫓겨났어요…… 저도 그때의 소녀에서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니 절 당연히 못 알아보셨겠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때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요.”
나는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감격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녀는 당시 고열이 나던 나를 치료해줬고, 지금은 내 아이를 치료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막연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눈물이라도 쏟아질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제발…… 더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부디 제가 오지 않았던 걸로 해주세요.”
'강의 노래' (퓨어스트림)
호신부를 잃어버렸는데 한참을 찾아도 찾지 못했다. 염국에서 임무를 하던 중 산 거긴 하지만, 현지인 말로는 사찰에서 개안까지 받은 물건이라 했다. 누군가 내게 퓨어스트림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퓨어스트림이라……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다. 후방 지원부에서 분실물 쪽을 담당하는 새 오퍼레이터인가?
숙소에는 없고……
회의실에도 없다……
결국 목욕탕에서 그녀를 찾았다. 마침 그녀는 점검을 마치고 목욕하고 있던 참이었다. 문밖에서 그녀의 노랫소리도 들렸는데, 고음이 정말 완벽했다…… 그런데 저렇게 오래 몸을 담그고 있으면 힘들지 않나?
“미안, 미안. 오래 기다렸지?”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수처리 작업은 합격이야. 하지만 여과 시스템 자체의 청결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어. 대부분 구역에 오물이 많이 쌓여서 어쩔 수 없이 자주 들락날락해야 했어. 청소 작업을 끝내야 하니까…… 헤헷.”
“이게 네 호신부지?”
소녀는 주머니를 열면서 말했다. 주머니 안에는 내 호신부 말고도 구슬이나 머리핀, 튜브, 심지어 탄창까지 있었다……
“이거 전부 오수 여과 시스템에서 찾은 거야?”
“맞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오물투성이라 지저분했는데, 내가 깨끗이 씻었어.”
나는 “어떻게 거기까지 흘러갔지”라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참았다. 그건 내 자신에게 따져야 할 것 같다……
아무튼, 후에 엔지니어링부 친구와 얘기하다 이번 본함의 고장 문제가 나왔는데, 그 누구도 오수처리 시스템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입사한 지 하루밖에 안 된 퓨어스트림이 혼자 청소 임무를 맡고는, 그 더러운 내부 여과 시스템 안에서 장장 이틀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각 구역을 틀어막은 '원흉'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 '보물'들이었다. 예전에 감사를 표했을 때 수줍게 웃던 퓨어스트림의 미소가 생각난다. 그녀는 '나중에 주의해달라'고 거듭 부탁하고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물은 모든 것을 씻어낼 수 있기에, 우리는 수도꼭지를 트는 것에 습관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주 간단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지 못한다.
나중에 퓨어스트림이 로도스 아일랜드 함선의 오수처리 작업을 본격적으로 담당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녀가 대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생각하다 비누를 사서 보내줬는데, 알고 보니 이미 그녀가 선물로 받은 비누만 한가득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퓨어스트림의 입사 평가 당시 어느 오퍼레이터의 진술",
방패용 촬영 모듈 (오로라)
마젤, 사진 잘 받았어. 고마워. 오로라가 너무 예쁘더라, 정말…… 소름 끼칠 정도야. 아, 미안, 더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아. 네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보낸 다른 자료도 봤어. 그 작고 노란 꽃, 극북의 빙원에서도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정말 믿기지 않아.
“보조 탐사원 신분으로 과학 탐사에 참여하라”는 네 제안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봤어. 갈 수 '있다', '없다'를 떠나서…… 물론, 나는 본함에 남아 광석병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신세이긴 하지만, 솔직히 내가 간다고 해서 무얼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메이어 말을 들어보니 극도로 추운 환경에서 드래곤 플라이 드론마저 영향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사실 내가 아이언포지 시티 이공대학에서 과학 연구 촬영 제작을 복수 전공했거든. 그래서 실험 삼아 내 방패에 촬영 모듈을 장착하면, 촬영도 할 수 있고 영상자료 저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드론과 비교하면 나는 방패를 가지고 더 특수한 지형에 갈 수 있는 데다, 기초적인 방어 공사를 통해 안정성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
마젤, 나는 진심으로 너를 존경해. 다들 머나먼 땅에 대해 빈약한 상상만 하고 있을 때, 너는 이미 그곳의 중심부까지 직접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생명의 맥박을 직접 느꼈잖아. 내가 예전에 탐사팀을 따라 북방 툰드라에서 오로라를 본 적 있어. 그리고 바로 그때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었지. 모든 곳이 쉐라그처럼 설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쉐라간드의 비호를 받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곳에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거야. 블랙 플로우나 산을 둘러싼 평원 등…… 이렇게 극도로 아름다운 풍경은 사실 신과는 상관없어. 테라의 일부분인 거지. 이 땅에 대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얼마나 옅고 편협한가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빙원을, 오로라를 다시 보고 싶은 건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다시 가보고 싶기' 때문이야. 실버애쉬 님의 말이 맞아. 쉐라그를 지키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자신이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해.
용감히 나아가며 탐색해야 우리 뒤에 있는 고향을 더 잘 지킬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빙원과 극지 같은 비밀이 숨겨진 아득히 먼 곳은 이미 많은 눈들이 노리고 있을 거라는 예감도 들고……
그러니까 마젤, 내가 준비되면 꼭 박사에게 신청서를 제출할게.
……
내가, 먹는 양이…… 조금 많아. 내가 봐도 많다고 생각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일할 때는 열심히 할 테니까 반드시 널 도울 수 있을 거야.
——오퍼레이터 오로라가 마젤란에게 보낸 통신 기록에서 발췌
마마 부분을 마젤로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