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witter.com/askziye/status/1557750015325396992?s=20&t=i7IHHrAQB-XcSbconorvuA
“거봐 누가 데리러 올 거라고 했잖니.”
그렇게 말하는 루포 형사 뒤로 프레이가 보였다.
나는 프레이의 손에 이끌려 취조실을 나섰다. 프레이가 창구에 보석금을 내자 내 담당이었던 루포 형사가 우릴 경찰서 바깥까지 배웅해주었다.
“왜 데리러 왔어.”
나는 물었다.
“왜냐니?”
“돈까지 냈잖아. 나 같은 건 쓸모도 없는데. 분명히 보탄하고 도나가 화낼 거야.”
프레이는 그저 엉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어린애 투정을 흘려듣는 엄마처럼.
경찰에 붙잡힌 건 오롯이 내 실수였다. 딴생각을 하다가 인파에 휩쓸려 프레이 일행과 다른 길을 든 탓이었다. 우리는 밀수꾼이었고 당연히 버젓한 여권은커녕 신분증도 없었다. 미리 준비해둔 길로 가지 못했으니 붙잡히는 건 당연지사였다.
보통 어린애였다면 훈방이라도 됐겠지만, 그땐 또 종족이 문제였다. 나는 단지 살카즈라는 이유로 머리에 아츠 유닛이 겨눠진 채 온몸을 수색당한 뒤 세관 파출소에 구류되었다.
잡혀서 취조실에 갇혔을 때는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쓸모도 없고 멍청하니까. 그래서 프레이가 날 데리러 왔을 때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프레이의 친절을 의심했다는 게 부끄러워서.
“자.”
프레이는 가판대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내 손에 들려주었다. 차가운 기운이 붙잡은 콘 너머로 전해졌다.
“바보야. 어차피 보탄의 계획이 성공하면 경찰서에서 너 같은 어린애는 백만 명도 더 풀어줄 수 있을걸?”
나는 프레이가 말한 대로 백만 명의 어린이가 경찰서에서 풀려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그 허무맹랑한 몽상에서는 아이스크림 맛이 났다.
우리는 가울의 전쟁에서 노획된 ‘화물’을 운반하는 중이었다. 군부 브로커는 이 화물을 우리에게 위탁하여 빅토리아의 지정된 장소까지 가져다주길 의뢰했다. 이곳 레데체스터 카운티는 목표 지점의 경유지였다. 이곳에서 우린 국경을 넘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의 리더인 보탄은 이 화물을 빼돌릴 것을 제안했다. 레데체스터에 도착한 뒤 황야를 통해서 도망치자고. 화물칸 안의 내용물을 본 뒤에는 프레이와 도나도 거기 동의했다.
아마도 팔면 용병질 따위는 때려칠 만한 물건이겠지. 나는 내심 화물이 뭔지 궁금했다. 하지만 멍청하게 경찰에 붙잡혀서 시간도 돈도 낭비하게 만든 마당에 뭔가 물어볼 면목이 없었다.
냉철한 보탄은 나를 무섭게 몰아붙일 것이다. 프레이가 대신 혼이 날지도 모른다. 그건 더 싫은데…
그러고 십여 분 걸었을까. 골목에 들어서니 저편에 기대 서 있는 보탄이 보였다. 도나는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나는 보탄과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푹 숙였다.
“보탄.”
프레이는 나를 뒤에 두고 먼저 걸어가 보탄과 마주 섰다.
“음.”
“도나는? 얼마나 걸릴 거 같아?”
“곧 차를 끌고 올 거다. 미행은 있었나?”
“아니. 없었던 거 같아. 너흰?”
“국경 부근에서부터 따라오던 피디아가 여기도 있더군. 따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마 다시 돌아올 거다. 도나가 오면 바로 떠나야 해.”
보탄은 말을 마치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내 어깨도 움찔했다.
“꼬마 수르트는 어때.”
프레이에게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맞지는 않은 것 같아. 담당 경찰도 친절해 보였고.”
“그런가.”
그러고는 프레이와 함께 탈출 경로에 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혼내지 않았어.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털털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나가 나타났다. 문짝도 지붕도 없는 데다 군데군데 녹슬고 찌그러진 자동차가 서행하는 모습은 병든 노인이 비척비척 걷는 것만 같았다.
“이야! 꼬마 멍청이 수르트. 감옥에선 어떻게 탈출한 거야? 빅토리아 경찰들 엉덩이라도 걷어차 줬냐?”
도나는 껄껄 웃으며 다가와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버둥거리는 나를 조수석에 올려놓았다.
“뒷자리에 앉혀. 뒷자리에. 잘도 이런 고물을 끌고 왔네. 굴러가긴 하는 거야?”
프레이는 나를 뒷좌석에 옮겨 앉힌 후 도나를 툭 쳤다. 도나는 다 죽어가는 척을 하더니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보탄이 조수석에 타서 출발하자고 했다. 차가 털털거리며 가속하기 시작했다.
황무지에 들어선 뒤로는 별달리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다. 계속 황야, 황야, 섬처럼 고립된 바위산과 모래바람, 그리고 황야뿐이었다. 보탄만 그런 자연의 이정표 같은 것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앞으로 갈 길을 읽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시지 프레이?”
보탄이 물었다.
“세 시 삼십삼 분. 왜?”
“조금 더 가면 오리지늄 간헐천 지대다.”
“아. 그렇네. 방금 큰 바위산을 지나쳤으니까. 여섯 시 전후로 폭발한다고 했나?”
“이 속도로 계속 가면 문제 없을 거다. 간헐천을 지나면 카시미어 남쪽까진 멀지 않아.”
“그래… 근데 카시미어에 도착하면 그때부턴 어떻게 할 거야?”
프레이는 보탄의 등받이에 딱 붙어서 그렇게 물었다.
“음.”
보탄은 특유의 묘한 소리를 내더니 왼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쇄골 위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꼬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도나가 껄껄 웃었다.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도나가 말했다. 나와 프레이도 그 말을 듣고 피식거렸다. 보탄은 여전히 머리칼을 꼬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도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데?”
나는 물었다.
“어. 글쎄다. 나야 뭐 항상 보탄이 가자는 대로였으니까… 그래. 라테라노는 어때? 착한 산크타들이 사는 지상낙원이라던데?”
그러는 도나에게 딴죽을 건 것은 프레이였다.
“바보야. 라테라노는 여기서 정 반대잖아. 빅토리아로 돌아가려고?”
“그래도 지상낙원이라잖아. 그러니까 그냥 해본 소리지.”
“산크타들의 지상낙원이지. 우리 같이 수상한 용병들은 당장 추방일걸. 저항하면 총밖에 더 맞겠어?”
나는 프레이에게 호응하여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테라노는 이종족에 배타적이다. 그리고 살카즈에게는 적대적이다. 살카즈는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셀 수 없는 적들을 지상에 두고 있다. 프레이도 굳이 말로 하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는 너는? 뭐 어디 갈 데라도 있어? 다시 사미로 돌아가서 미친 괴물들이랑 싸울 수도 없잖아.”
도나는 입이 댓발 나와서 프레이를 추궁했다.
“그냥 카시미어 시골에 눌러앉아도 되고.”
“너무 평범해 그건. 그런 건 나도 생각해 봤어.”
“정말로?”
“당연하지.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는데.”
“흐헤헤. 아닌 거 같은데.”
프레이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황야의 거친 노면에 흔들리는 차체를 따라 그녀의 웃음도 진동을 일으켰다.
“그럼, 우리 컬럼비아로 가볼래?”
프레이의 말에 도나는 인상을 팍 썼다. 머리칼을 꼬던 보탄도 프레이를 돌아보았다.
“뭐? 거긴 빅토리아령이잖아. 미쳤어?”
도나가 말했다.
“근데 사실상 독립된 땅이래. 돈이면 뭐든 되는 땅이라고도 하고. 잡지에서 봤다구. 확실해.”
도나와 보탄은 프레이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프레이는 그들을 설득하는 대신 나를 새로운 표적으로 삼았다.
“너는 가고 싶지~ 컬럼비아!”
프레이는 내게 달라붙어 볼을 부비적대며 말했다.
“으응… 근데 난 거기 잘 모르는데. 가본 적도 없고.”
“바보야. 추억이란 건 언제나 지금부터인 거야. 콘 아일랜드라고 들어봤어? 유원지가 엄청 많대. 거기에 가면 가판대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전부 사줄게. 카즈델 딸기맛도 있을걸?”
‘카즈델 딸기란 건 뭐야…?’ 도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프레이는 무시했다.
“…그치만 우리가 가서 살 데가 있을까?”
내가 물었다.
“물론 있지. 화물을 팔아서 돈이 생기면 집을 사는 거야. 거기서 다 같이 살자.”
프레이가 그렇게 말하자 도나가 끼어들었다.
“그 많은 용병이 그냥 돈이 없어서 떠도는 건 아닐 텐데.”
도나 답지 않게 신랄한 말이었다. 프레이는 잠시 침묵했지만 곧이어 입을 뗐다.
“더 큰돈이 있으면 돼. 그리고 그 컬럼비아라는 곳은 넓다잖아. 어디 한 구석엔 우리가 살만한 곳도 있을 거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바퀴가 뭉친 모래를 부수는 소리만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그 카즈델 딸기 맛이라는 걸 떠올려보려 애썼다. 살카즈 꼬마에게 고향의 맛을 건네주며 미소짓는 아이스크림 아저씨도. 콘 아일랜드라는 곳도.
그러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기 프레이. 그 콘 아일랜드라는 데는 어디에 있어 ?”
그러나 내 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직후 차량이 방향을 잃었다.
“…도나!”
“…휠이 말을 안 들어!”
“수르트!”
사방이 회전하며 목소리들을 흔적도 없이 빨아들였다.
우리는 간헐천 지대를 빠져나가기 위해 빠르게 주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차량이 통제 불능이 되자 지대의 굴곡진 노면에 차체가 부딪쳐 넘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모두가 공중으로 튕겨 나갔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프레이의 품에 안겨서 하늘을 보았다.
어둠이 쫓아오는 하늘을 보았다.
***
꽝-꽝
한번, 두 번, 몇 번이고 벽력같은 소리가 지면을 때렸다. 기억이 날듯말듯했다. 요란스럽게 어둠이 쫓겨나는 이 소리. 나는 기억의 짧은 갈피를 집게손가락으로 간질이고 있었다.
그래. 도나다. 나는 도나가 싸우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찰나의 시간 하늘과 땅을 이어놓고 천지는 다시 둘로 찢어지며 비명을 지른다.
일행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일어서야 하는데, 일어서야 하는데. 나는 눈을 뜨는 데만 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말 안 듣는 몸을 내버려 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나는 내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내 이름은 뭐지? 저들은 누구지? 우리는 어디로 가는 중이었지?
그때 코앞에 모래바람이 불어 닥쳤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고 가까스로 눈을 뜨니 뭔가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꼬마 수르트.”
“…보탄.”
보탄은 눈앞에 놓인 희생자의 등을 밟고 자신의 창을 뽑았다. 말라붙은 땅에 한 줌 피가 뿌려졌다.
“움직일 수 있겠나.”
“으응. 슬슬.”
“그래. 그러면 숨어라. 옆에 화물 상자가 있다. 거기 뒤에 엎드려 있어. 죽은 척해라.”
그리고 보탄은 또 다른 적을 응시하더니 그리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고 후로 얼마가 지난 건지 벌써 이 일대가 아수라장이었다. 추적자로 보이는 피디아들의 시체가 몇 구나 널브러져 있었고 멀리서는 여전히 십 수명이 뒤엉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보탄이 말한 대로 주변에 뒹굴고 있던 화물 상자를 찾아 그 뒤에 숨었다. 거기서 피가 묻은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이 모든 게 지나가길 기다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시간은 좀처럼 빠르게 가지 않았다. 소란이 잦아든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만이 들렸다. 아마 일행일 터였다. 나는 쓰고 있던 거적때기를 치우고 상자 바깥으로 나섰다.
“…….”
“끝났다 꼬마 수르트.”
“프레이랑 도나는…?”
보탄은 말없이 팔을 들어 저쪽을 가리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내가 걷기 힘들어하자 보탄은 나를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프레이와 도나에게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형체가 똑똑히 보였다.
도나가 프레이의 품에 안긴 채로 쓰러져 있었다. 도나의 아름다운 금발이 피와 흙먼지에 엉켜서 더러워 보였다. 프레이는 도나의 뺨에 드리운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프레이는 나와 보탄을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도나…….”
“걱정 마. 내 아츠는 시간만 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려내. 도나는 잠깐 쉬기만 하면 돼.”
내 자신 없는 목소리에 비해 프레이의 음성에는 아직 힘이 서려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많이 지쳐 보였다. 이마가 찢어지고 왼손 손톱은 약지만 남기고 전부 부러져서 없었다.
보탄도 후드로 감추고 있을 뿐 많이 다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린 시간이 별로 없다. 언제 간헐천이 터질지 몰라. 바로 이탈해야 해.”
보탄이 프레이에게 말했다.
“그렇네. 주변에 멀쩡한 차를 찾아야겠어. 수르트… 너도 도와줄래?”
“응. 해볼게.”
하지만 보탄이 나를 불러세웠다.
“아니야. 내가 까마귀를 보내 찾아보겠다. 꼬마 수르트는 조금 쉬어라.”
보탄이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고, 나는 프레이와 도나 옆에 쪼그려 앉았다. 프레이가 도나의 가슴에 얹은 손에서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아츠의 광채였다. 그 빛은 도나를 치료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것이 사그라드는 생명의 불꽃처럼 보였다.
오래전. 그들이 나를 줍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도나는 내게 부탁했다. 그녀가 죽을 때, 자신의 망치를 손에 쥐어 달라고.
지금, 그럴 때가 온 걸까? 나는 멋대로 생각했다.
얼마 뒤 보탄이 돌아왔다. 보탄은 끌고 온 화물을 우리 옆에 던져놓았다.
“프레이.”
“차는 찾았어?”
“아니, 누군가 오고 있다. 늑대 셋. 아무래도 친구는 아니겠지.”
“…뭐?”
“내가 가보겠다.”
“나도 돕겠어.”
보탄은 프레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프레이는 그러는 보탄과 도나를 번갈아 보았다. 도나는 프레이의 무릎 위에서 미약한 숨을 토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보탄은 늘 그렇듯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홀로 걸어갔다.
“보탄!”
나는 보탄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내가, 내가 도와줄게! 싸우는 건, 으응… 싸우는 것도 할 수 있어. 숨어있다가 단검으로 적의 등을 찌를게!”
그러자 보탄은 다시 내 쪽으로 왔다.
“……!”
“꼬마 수르트.”
보탄은 후드를 벗고 나를 마주 보았다. 그늘 속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눈은 이제 한쪽뿐이었다. 피디아 용병의 송곳니에 파먹힌 듯 눈꺼풀부터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황혼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압도되어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내가 실패하면,”
그녀는 우리 옆의 상자로 시선을 가져갔다.
“선택해야 해.”
그리고 그녀는 엔진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맹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햇살을 받아 그녀가 꼬나 든 창날이 붉은빛을 발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 중 하나에서 단검 한 자루를 훔쳤다. ‘너에겐 두 자루가 있으니 하나쯤 없어도 괜찮을 거야.’ 나는 칼을 빼앗긴 주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프레이는 여전히 도나를 소생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 옆의 화물 상자에 눈길을 주었다. 보탄은 내게 선택을 해야 할 거라고 말했다. 그건 어떤 선택을 말하는 거지? 도대체 저 안에 뭐가 있길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꼬마야.”
나를 부른 건 보탄도 프레이도, 도나도 아니었다. 나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널 풀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낯익은 얼굴이 그렇게 말했다. 그곳에 홀로 서 있는 루포 남자를 나는 알고 있었다. 세관에서 나를 붙잡은 형사였다.
“당신도 브로커와 한패였구나.”
프레이가 루포 형사를 보며 말했다. 루포 형사도 프레이를 마주보았다.
“사미 출신이라면 적어도 그 물건만은 빼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군.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나?”
“잘 알지. 그래서 왜 그 물건이 가치가 높은 건지도 알고.”
“날 막으러 왔던 너희 친구는 죽었다. 탁월한 전사더군. 너희도 마찬가지겠지.”
루포 형사는 사방에 널린 피디아 용병들의 시체를 훑어보았다.
“그런 너희 모두의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나?”
“몰랐어? 원래 용병질이란 건 목숨 걸고 하는 거야. 이번에도 괜찮겠지란 마음으로 시작한 적은 없었어.”
“저 살카즈 꼬마도 그렇다던가?”
프레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프레이 대신 그 말에 반박해주고 싶었지만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이런 최후를 맞이할 각오가 없었다. 허세를 부리고 싶어도 그게 사실이었다. 어리니까. 멍청하니까. 쓸모가 없으니까. 나는 살아야 할 목적도, 죽음을 용인해야 할 이유도 알지 못했다.
프레이는 도나를 땅에 눕혀두고 일어섰다. 프레이의 칼이 주인의 손에 이끌려 칼집을 빠져나왔다. 허리를 낮추고 싸울 준비를 하는 주인의 호흡에 맞추어 칼날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루포 형사의 손에 들린 아츠 유닛이 프레이를 겨누었다. 프레이는 선전했지만 싸움 전부터 이미 탈진 상태였다. 루포 형사는 노련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공격했고 프레이는 남은 체력이 다할 때까지 루포 형사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마침내 루포 형사가 프레이의 오른팔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승부가 결정됐다.
재기 불능의 상처를 입은 프레이가 쓰러졌다.
“꼬마.”
잡은 단검의 손잡이 너머로 맥동하는 피륙의 감각이 전해져 왔다. 해냈어. 프레이! 보탄, 도나… 나는 내 삶을 지배하고 있던 무력감이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프레이가 목숨 걸고 만든 빈틈을 파고들어 루포 형사를 찔렀다. 피가 울컥거리며 터져 나와 내 얼굴을 적셨다. 칼날이 비장을 꿰뚫은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루포 형사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힘으로 나를 떨쳐냈다.
“죽어…! 죽으란 말이야!”
나는 넘어진 채로 루포 형사를 향해 악을 썼다.
“지금이 몇 시지?”
루포 형사는 엉뚱한 질문을 허공에 던졌다. 그는 조금 비틀거리며 자신의 품 안으로 손을 가져갔다.
“여섯 시 십오 분. 이라는군.”
그는 손에 쥔 회중시계를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츠 유닛을 내게 겨누었다.
“미안하구나.”
“…그럴 거 없어.”
그때 루포 형사에게 누군가 달려들었다. 그건 도나였다. 온몸에 번개를 두른 도나가 망치로 형사를 짓눌렀다. 도나의 망치는 비정상적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나!”
“꼬마 멍청이…! 숨어!”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섬광과 열기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나는 잠시 모든 감각을 상실했지만 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보다 빠르게 그것을 되찾았다. 팔다리가 저릿거렸다. 코앞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싫어…….”
눈을 떴을 때 이미 도나는 루포 형사와 한 데 뒤엉켜 검게 탄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도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 망치를 쥐여주려고 했지만 망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도나는 망치 안의 아츠 유닛을 과부하 시켜 마지막 폭발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은 심하게 탄화되어 모래바람에 바스러졌다.
도나도 보탄도 사미의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죽음을 지키지 못했다.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력감이 다시 내게로 돌아와 똬리를 텄다.
“도나, 보탄…….”
“이럴 시간이 없어.”
두 주검의 건너편에서 프레이가 걸어왔다. 나는 팔을 잃은 프레이를 부축해 주려고 했지만 프레이는 나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그리고 화물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화물 상자의 클립을 하나 남은 손으로 하나씩 풀었다.
“수르트. 준비해.”
“…프레이? 무슨 소리야….”
“조금 있으면 간헐천이 터져. 그러면 우린 액화 오리지늄으로 샤워를 하게 될 거야. 우리는 단숨에 감염되고… 공기 중에 뿌려진 오리지늄 입자들은 엉키면서 폭풍을 일으키겠지. 우린 산 채로 응결돼서 호박 안에 갇힌 벌레처럼 될 거야.”
프레이는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닐 거 같은데… 그렇지?”
“그러니까 도망가야지. 늑대가 차를 타고 왔잖아. 그걸 타고 피하자.”
“늦었어. 지열이 느껴져. 발밑에서 끓고 있어.”
마침내 상자의 봉인을 모두 풀어낸 프레이가 그곳에서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사람 키만 한 대검의 형상을 한 아츠 유닛이었다. 프레이는 용을 쓴 끝에 겨우 그것을 끌어내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수르트.”
프레이는 그 대검 앞에 나를 무릎 꿇리고 자신도 마주 앉았다.
“으응.”
“아까 말한 카즈델 딸기맛. 궁금하지 않아?”
“모르겠어…….”
프레이는 내 머리를 붙잡고 있었지만 나는 자꾸만 도나가 있는 쪽을 돌아보게 됐다. 바로 몇 분 전만 해도 보탄과 도나가 내던 소리가 내 안에 메아리쳤다.
“보탄, 도나아…….”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걸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보탄과 도나의 죽음이 시차를 두고 엄습해왔다. 그들의 목소리를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섭게 나를 몰아쳤다.
“수르트. 정신 차려.”
“으으.”
“정신 차려!”
프레이가 나를 다그쳤다.
“나도 곧 죽어. 보탄과 도나처럼.”
“싫어. 죽는 건 싫어…….”
“수르트.”
프레이는 한쪽뿐인 팔로 계속 울기만 하는 내 머리를 껴안았다.
“사미에는 사미 사람들만을 위한 천국이 있어. 나도 그리로 가고 싶어. 보탄과 도나가 있는 곳으로.”
“보탄도, 도나도 못 갔을 거야… 내가 무기를 못 줘서. 내가…….”
“괜찮아. 전부 거기에 있을 거야. 싸우다 죽은 사미인은 모두 거기로 갈 수 있어.”
프레이는 내 머리에 얼굴을 파묻고 속삭였다.
“너는 그 칼로 나를 찌르면 살 수 있어. 나는 그곳에서 기다릴게. 다시 먼 시간이 흘러서, 네가 올 때까지. 보탄이랑 도나도 함께.”
“…프레이가 살면 되잖아. 나 같은 건,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야. 난 추억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난 아무 쓸모도 없어.”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지면이 뜨거워져 있었다. 지반에서는 희미하게 진동이 느껴졌다.
“바보야. 쓸모 있는 사람만 살아야 하는 게 아니야.”
프레이는 내 손에 대검의 자루를 쥐여주었다. 그러자 대검이 무섭게 발열하기 시작했다.
“살 자격이 있는 사람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뜨거워…! 프레이, 이거 이상해!”
대검은 순식간에 달아올라 내 손에 녹아 엉겨 붙을 것만 같았다. 손이 불타는 고통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소릴 질러도 프레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지.”
“프레이!”
“추억이라는 건 항상 지금부터인 거야.”
프레이는 대검의 가드를 붙잡고 붉은 칼날을 자신의 몸에 찔러넣었다.
폭풍이 몰아쳤다.
***
“꺄아아아악!”
“…….”
멀리 사람들의 청량한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분수에 걸터앉아서 수첩을 꺼냈다. 시원한 물보라가 드문드문 등을 때렸다. 알맞은 페이지를 펼치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옆에서 박사가 나를 툭 쳤다. 박사는 내게 팬을 건네주었다. 그는 아이스크림과 풍선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고마워.”
풍선, 유원지, 분수, 롤러코스터.
풍선, 유원지, 분수, 롤러코스터.
“자.”
박사는 풍선을 내게 주고 펜을 돌려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이스크림도 내게 주었다. 하얀 크림 위에 붉은 열매 같은 게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나는 과감하게 둥근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혀뿌리가 찡해지는 신맛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맛이야?”
“딸기 맛이겠지.”
“뭐? 이렇게 신 딸기 아이스크림이 어딨어?”
나는 멀리 가판대의 아이스크림 아저씨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거기서 날 주목할 리는 없었다.
“롤러코스터는 어땠어.”
박사가 물었다.
“나쁘진 않아. 구경하는 게 더 재밌지만.”
“그게 아니라. 뭔가 기억이 났냐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롤러코스터가 주는 스릴이 내 안의 심층 기억을 깨웠다는 식의 전개는 재밌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응. 전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아예 여기에 온 적도 없었던 것 같아.”
“네가 기억하는 것들을 적어놓은 거 아니었어?”
박사는 수첩을 넣는 내 주머니를 가리켰다.
“아니. 내가 떠올린 것들이지. 반드시 그 모든 게 내가 경험한 거라곤 할 수 없어. 잡지나 방송에서 봤을 수도 있고, 누구에게서 전해 들은 것일 수도 있지.”
“어쩌면 그냥 네가 와보고 싶은 곳이었을 수도 있고.”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간 아무런 소득도 없었네. 미안하게 됐어.”
그러면서 나는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핥았다. 치명적인 신맛에 혀가 움찔거렸다. 그래도 핥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맛이었다.
“소득이 없었나?”
박사는 혼잣말처럼 물었다.
“아무 기억도 안 난다니까.”
“그건 과거의 너잖아.”
“뭐?”
“지금의 너는 어떤데.”
박사는 나를 마주 보았다.
하늘과 바다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환희에 찬 비명을 지른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이 선선하다. 분수가 내 등을 적신다. 풍선은 박사의 손에서 푸른 우주의 꿈을 꾼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에선 허무맹랑한 몽상의 맛이 난다. 어린이 백만 명이 경찰서에서 풀려나는 듯한.
‘카즈델 딸기맛.’
“즐거워.”
“그렇구나.”
이날은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면 된 거야.”
-단편 : 수르트와 기억의 미래
카즈델의 후회는 딸기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