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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의 티파티가 끝나고 그라니를 방으로 돌려보낸 후, 박사는 나머지 서류 처리를 시작했다. 기마경찰 소녀님이 혼자서 4할 정도를 끝내준 덕에, 나머지 분량인 단순 서류 승인 작업만 마치면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끝낼 양이었다.
마치 숙련된 마에스트로의 손짓과도 같이, 한 손에는 서류를, 다른 한 손에는 도장을 든 채, 빗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업무라는 이름의 연주가 방안을 상냥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그런 방의 정적을 부순 건 멀리 있는 문이 열리며 가까워지는 발소리였다.
고개를 든 박사의 눈에 보이는 건 한 ‘소녀’였다.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붉은 털 코트 너머로 여러 개의 단검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사신의 울음소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섬뜩했다. 코트의 후드를 뒤집어쓴 너머로 보이는, 쇠를 녹여내 만든 것 같은 짙은 회색의 거친 머리칼. 그리고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투명한 금색의 안광은, 보는 사람이 기절할 것만 같은 위압감을 뿜어냈다. 마치, ‘살기’라는 단어 자체가 소녀의 모습으로 현현한 듯이.
“레드? 무슨 일이야?”
프로젝트 레드. 로도스의 또 다른 지도자인 켈시의 직속 휘하 부대 S.W.E.E.P.의 스페셜리스트 오퍼레이터. ‘늑대 사냥꾼’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의 전문적인 킬러.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박사는 그저 옆집에 사는 평범한 여자아이를 만난 것처럼 맞이했다.
“레드, 임무, 수행하러 왔다.”
점점 선명해지는 발소리와 함께, 레드는 후드를 벗으며 다가왔다. 벗으면서 짓눌려 있던 뾰족한 늑대 귀가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즐기려는 듯 쫑긋 일어섰다.
손가락을 튕기는 레드의 모습 뒤로 보이는 건, 그녀와 항상 동행하는 늑대 한 마리였다. 정확히는, 쓰러진 은발의 여성을 등에 이고 있는 늑대 한 마리. 그 모습을 보고 박사는 놀란 나머지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튀어 오르듯이 일어났다.
“스카디...? 대체 무슨 일이야?”
“켈시, 편지 전해달라고 했다.”
“켈시가?”
허리춤에서 꺼낸 접혀 있는 종이를 받은 박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편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와파린이 스카디를 치료하겠다는 명목으로 수면제를 투여하고 해부하려 하는 걸 저지했지만 수면제 투여는 막지 못했다는 내용에 박사는 무심코 두통을 느꼈다.
‘와파린 녀석... 계속 해부, 해부 거리더니 일을 벌일 줄 알았다...’
미간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박사는 편지 내용을 읽어나갔다. 레드를 불러서 스카디를 이곳으로 보낼 테니, 깨면 와파린에 관한 건은 배제하고 상황 전달을 잘 해달라는 내용. 나쁘게 말하자면 박사에게 정보 조작 및 뒤처리를 해달라는 뜻이었다. 명령조인 편지의 내용을 보며 약간의 불쾌감을 느낀 박사였지만, 하단의 p.s.라 써져 있는 내용을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불안함을 느꼈다.
[불면증 증세. 신체 리듬 불균형 가능성 있음. 정신 상태 불안정함. 상담치료 필요.]
역시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며, 박사는 무심코 손톱을 잘근잘근 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성가신 상황이 오게 된 것에 대한 스트레스에 기인한 그의 습관 중 하나였다.
상담이라 해도 스카디 쪽에서 원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 되는데, 그걸 무작정하라고 하는 켈시의 말에 박사는 속으로 비속어를 내뱉었다.
“박사. 레드. 임무 끝났다.”
그런 그의 잡념을 비집고 들어오는 건 어느새 바로 옆까지 온 레드의 목소리였다. 설마 자신이 말한 게 무심코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한편, 박사는 미소를 지으며 레드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고생 많았어, 레드. 가서 쉬어도 돼.”
거칠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박사의 손을 간지럽혔다. 레드 역시 싫지 않은 듯 눈을 감은 채 잠시 그의 손길을 즐겼다가, 몇 초 지나고 나서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멀어져 가는 레드의 발소리와 함께 박사의 시야에 보이는 건, 그녀의 동료 늑대가 그냥 바닥에 패대기쳐놓고 가버린, 자고 있는 은발의 여성이었다.
“하다못해 소파 근처에라도 놔주지...”
졸지에 오늘자 업무에 오랜만에 박사가 힘을 쓰는 일이 추가됐다.
◎
서류 작업이 끝나고 박사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독서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모종의 사건을 겪고 나서 기억을 잃은 그에게 있어, 자신이 과거에 작성한 논문이나 기록들을 열람해서 기억의 실마리를 추적하는 것이 하나의 소소한 유흥거리였다.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아서 저녁을 거른 것도 있지만, 그의 앞에 잠들어 있는 대원을 혼자 두고 가면 마음이 편치가 않았던 탓에, 박사는 논문을 읽으면서 상시적으로 스카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얼마 안 가서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스카디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잘 잤어?”
“박사...? 여긴?”
“내 방이야.”
잠이 덜 깬 상태로 스카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남아있는 미약한 두통을 무시하며, 그녀는 자기 전에 있었던 일을 되짚었다.
“분명 나, 의료실에 있었을 텐데...”
“그, 뭐냐. 와파린이 수면제를 투여했는데 잠든 상태로 의료실을 나갔다가 복도에서 쓰러졌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급한 대로 내 방에 눕혔어.”
박사는 후드로 얼굴을 깊숙이 가린 채 논문으로 하관을 가렸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가려서 급조한 거짓말이 조금이라도 티가 나지 않으려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그렇구나. 신세를 졌어.”
그걸 믿는 거냐,라고 속으로 박사는 딴죽을 걸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황당한 이 거짓말을 믿다니. 믿어줘서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스카디의 상식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야 할지 곤란한 심정이 박사의 마음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럼 가볼게.”
깍지를 낀 채 약간의 스트레칭을 한 후, 스카디는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렸던 복도에서의 모습보단 비교적 나았지만, 박사는 켈시에게 받은 편지를 떠올리며, 그녀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잠깐 스카디. 할 말이 있으니 좀만 더 있다 가줄래?”
“뭔데?”
조급한 듯, 빨리 방을 나가고 싶은데 그걸 막아서 그런 것처럼, 스카디의 어조에서 불쾌감이 묻어 나왔다. 상관없다는 듯 박사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의 눈빛에 스카디는 잠시 눈을 감더니 다시 소파에 몸을 맡겼다.
“요즘 무리하고 있지?”
“뭐가?”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는 거잖아. 복도에서 네가 보인 반응으로 추정했을 때, 계속 같은 악몽을 꾸고 있는 거지? 그것도 상당히 심하게...”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카디는 평소의 검술과도 같이 박사가 하려던 말을 싹둑 끊어버렸다. 찡그릴 일이 거의 없는 미간이 구겨지면서, 붉은색 안광이 박사의 몸통을 화살과도 같이 관통했다. 더 이상 언급하지 말아달라는 그녀 나름대로의 경계 표시였다.
약한 정전기가 등골을 스쳐 지나가는 불편함을 견디면서, 박사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화나게 만들려는 게 아니야, 스카디. 난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날? 걱정한다고?”
“넌 어떤 일이든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잖아. 고된 일이어도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피해 입지 않도록. 홀로 싸우려고 하잖아.”
스카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이 방의 사물이 아닌, 좀 더 다른 차원의 ‘무언가’였다.
“이번에 네가 꾸고 있는 악몽도 그런 거지? 네가 자주 말하는 ‘재앙’이라는 것이랑 연관돼서, 내가 물어보지 않았으면 하는 거잖아?”
“좋을 대로 생각해.”
검지로 옆머리를 빙빙 돌리며,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듯, 스카디는 대답했다. 허나 박사 기준으로 그녀의 눈이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즉, 박사의 추론이 정답에 가까웠다는 뜻이었다.
“네가 예전에 말했지? 내가 고집이 세다고. 맞아. 난 한 번 꽂힌 건 반드시 풀어버려야 직성이 풀리거든.”
박사는 소파에서 일어나 스카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한쪽 다리를 꿇은 채, 아래를 보고 있는 스카디의 시선이랑 자신의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묻지는 않을게. 꼬치꼬치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다만.”
한가해 보이는 스카디의 오른손을 박사는 양손으로 상냥하게 감싸서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보다 체온이 낮은 스카디의 손끝으로, 박사의 온기가 스며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다면 부디 말해줘. 설령 해결하기 힘든 문제라도, 둘이서 하면 부담이 나눠질 거 아니야? 그러니까, 혼자서 모든 짐을 지려 하지 말아 줬으면 해.”
박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카디는 가슴팍에 이질감을 느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에, 그녀는 감전이라도 당한 것 같은 찌릿찌릿함을 느끼며 급히 박사의 손길을 떨쳐내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두근.두근. 가슴의 울음소리가 거세지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건 그녀에게 자주 있었던 일. 다수의 적을 혼자서 상대해야 할 때, 강대한 적이랑 마주칠 때, 그리고 ‘과거’를 바라보는 그 순간이 될 때.
허나 그녀가 지금 느낀 이 고동은, 평소에 느끼는 등골에 얼음이라도 집어넣은 것처럼 서늘해지면서 다리에 철사를 박은 것 같은 뻣뻣함이 섞이면서 발생하는 끔찍한 불쾌감이랑은 전혀 다른 무언가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스카디? 괜찮아?”
이 ‘이질감’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은, 의아한 듯이 일어나서 스카디에게 손을 뻗었다. 혹시 열병이라도 있는 건 싶은 걱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피곤하네. 먼저 일어날게.”
접근해오는 그로부터 달아나려는 듯, 스카디는 급히 일어서서 문으로 향했다. 박사가 뭐라 말하려고 했을 땐, 이미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었다.
“곧바로 마음을 열지 않을 거라 예측은 했다만... 아직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멀었나.”
갑자기 방으로 난입한 어색한 정적에, 박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앉으면서 문득, 며칠 후에 있을 용문 파견 작전을 떠올렸다. 부디 스카디가 컨디션을 그 때까지 회복하길 속으로 기원하며, 무사히 임무가 완수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은 채, 자신의 논문을 읽는 것을 재개했다.
빗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박사에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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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의 티파티가 끝나고 그라니를 방으로 돌려보낸 후, 박사는 나머지 서류 처리를 시작했다. 기마경찰 소녀님이 혼자서 4할 정도를 끝내준 덕에, 나머지 분량인 단순 서류 승인 작업만 마치면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끝낼 양이었다.
마치 숙련된 마에스트로의 손짓과도 같이, 한 손에는 서류를, 다른 한 손에는 도장을 든 채, 빗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업무라는 이름의 연주가 방안을 상냥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그런 방의 정적을 부순 건 멀리 있는 문이 열리며 가까워지는 발소리였다.
고개를 든 박사의 눈에 보이는 건 한 ‘소녀’였다.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붉은 털 코트 너머로 여러 개의 단검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사신의 울음소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섬뜩했다. 코트의 후드를 뒤집어쓴 너머로 보이는, 쇠를 녹여내 만든 것 같은 짙은 회색의 거친 머리칼. 그리고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투명한 금색의 안광은, 보는 사람이 기절할 것만 같은 위압감을 뿜어냈다. 마치, ‘살기’라는 단어 자체가 소녀의 모습으로 현현한 듯이.
“레드? 무슨 일이야?”
프로젝트 레드. 로도스의 또 다른 지도자인 켈시의 직속 휘하 부대 S.W.E.E.P.의 스페셜리스트 오퍼레이터. ‘늑대 사냥꾼’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의 전문적인 킬러.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박사는 그저 옆집에 사는 평범한 여자아이를 만난 것처럼 맞이했다.
“레드, 임무, 수행하러 왔다.”
점점 선명해지는 발소리와 함께, 레드는 후드를 벗으며 다가왔다. 벗으면서 짓눌려 있던 뾰족한 늑대 귀가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즐기려는 듯 쫑긋 일어섰다.
손가락을 튕기는 레드의 모습 뒤로 보이는 건, 그녀와 항상 동행하는 늑대 한 마리였다. 정확히는, 쓰러진 은발의 여성을 등에 이고 있는 늑대 한 마리. 그 모습을 보고 박사는 놀란 나머지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튀어 오르듯이 일어났다.
“스카디...? 대체 무슨 일이야?”
“켈시, 편지 전해달라고 했다.”
“켈시가?”
허리춤에서 꺼낸 접혀 있는 종이를 받은 박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편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와파린이 스카디를 치료하겠다는 명목으로 수면제를 투여하고 해부하려 하는 걸 저지했지만 수면제 투여는 막지 못했다는 내용에 박사는 무심코 두통을 느꼈다.
‘와파린 녀석... 계속 해부, 해부 거리더니 일을 벌일 줄 알았다...’
미간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박사는 편지 내용을 읽어나갔다. 레드를 불러서 스카디를 이곳으로 보낼 테니, 깨면 와파린에 관한 건은 배제하고 상황 전달을 잘 해달라는 내용. 나쁘게 말하자면 박사에게 정보 조작 및 뒤처리를 해달라는 뜻이었다. 명령조인 편지의 내용을 보며 약간의 불쾌감을 느낀 박사였지만, 하단의 p.s.라 써져 있는 내용을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불안함을 느꼈다.
[불면증 증세. 신체 리듬 불균형 가능성 있음. 정신 상태 불안정함. 상담치료 필요.]
역시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며, 박사는 무심코 손톱을 잘근잘근 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성가신 상황이 오게 된 것에 대한 스트레스에 기인한 그의 습관 중 하나였다.
상담이라 해도 스카디 쪽에서 원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 되는데, 그걸 무작정하라고 하는 켈시의 말에 박사는 속으로 비속어를 내뱉었다.
“박사. 레드. 임무 끝났다.”
그런 그의 잡념을 비집고 들어오는 건 어느새 바로 옆까지 온 레드의 목소리였다. 설마 자신이 말한 게 무심코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한편, 박사는 미소를 지으며 레드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고생 많았어, 레드. 가서 쉬어도 돼.”
거칠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박사의 손을 간지럽혔다. 레드 역시 싫지 않은 듯 눈을 감은 채 잠시 그의 손길을 즐겼다가, 몇 초 지나고 나서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멀어져 가는 레드의 발소리와 함께 박사의 시야에 보이는 건, 그녀의 동료 늑대가 그냥 바닥에 패대기쳐놓고 가버린, 자고 있는 은발의 여성이었다.
“하다못해 소파 근처에라도 놔주지...”
졸지에 오늘자 업무에 오랜만에 박사가 힘을 쓰는 일이 추가됐다.
◎
서류 작업이 끝나고 박사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독서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모종의 사건을 겪고 나서 기억을 잃은 그에게 있어, 자신이 과거에 작성한 논문이나 기록들을 열람해서 기억의 실마리를 추적하는 것이 하나의 소소한 유흥거리였다.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아서 저녁을 거른 것도 있지만, 그의 앞에 잠들어 있는 대원을 혼자 두고 가면 마음이 편치가 않았던 탓에, 박사는 논문을 읽으면서 상시적으로 스카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얼마 안 가서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스카디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잘 잤어?”
“박사...? 여긴?”
“내 방이야.”
잠이 덜 깬 상태로 스카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남아있는 미약한 두통을 무시하며, 그녀는 자기 전에 있었던 일을 되짚었다.
“분명 나, 의료실에 있었을 텐데...”
“그, 뭐냐. 와파린이 수면제를 투여했는데 잠든 상태로 의료실을 나갔다가 복도에서 쓰러졌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급한 대로 내 방에 눕혔어.”
박사는 후드로 얼굴을 깊숙이 가린 채 논문으로 하관을 가렸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가려서 급조한 거짓말이 조금이라도 티가 나지 않으려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그렇구나. 신세를 졌어.”
그걸 믿는 거냐,라고 속으로 박사는 딴죽을 걸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황당한 이 거짓말을 믿다니. 믿어줘서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스카디의 상식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야 할지 곤란한 심정이 박사의 마음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럼 가볼게.”
깍지를 낀 채 약간의 스트레칭을 한 후, 스카디는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렸던 복도에서의 모습보단 비교적 나았지만, 박사는 켈시에게 받은 편지를 떠올리며, 그녀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잠깐 스카디. 할 말이 있으니 좀만 더 있다 가줄래?”
“뭔데?”
조급한 듯, 빨리 방을 나가고 싶은데 그걸 막아서 그런 것처럼, 스카디의 어조에서 불쾌감이 묻어 나왔다. 상관없다는 듯 박사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의 눈빛에 스카디는 잠시 눈을 감더니 다시 소파에 몸을 맡겼다.
“요즘 무리하고 있지?”
“뭐가?”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는 거잖아. 복도에서 네가 보인 반응으로 추정했을 때, 계속 같은 악몽을 꾸고 있는 거지? 그것도 상당히 심하게...”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카디는 평소의 검술과도 같이 박사가 하려던 말을 싹둑 끊어버렸다. 찡그릴 일이 거의 없는 미간이 구겨지면서, 붉은색 안광이 박사의 몸통을 화살과도 같이 관통했다. 더 이상 언급하지 말아달라는 그녀 나름대로의 경계 표시였다.
약한 정전기가 등골을 스쳐 지나가는 불편함을 견디면서, 박사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화나게 만들려는 게 아니야, 스카디. 난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날? 걱정한다고?”
“넌 어떤 일이든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잖아. 고된 일이어도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피해 입지 않도록. 홀로 싸우려고 하잖아.”
스카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이 방의 사물이 아닌, 좀 더 다른 차원의 ‘무언가’였다.
“이번에 네가 꾸고 있는 악몽도 그런 거지? 네가 자주 말하는 ‘재앙’이라는 것이랑 연관돼서, 내가 물어보지 않았으면 하는 거잖아?”
“좋을 대로 생각해.”
검지로 옆머리를 빙빙 돌리며,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듯, 스카디는 대답했다. 허나 박사 기준으로 그녀의 눈이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즉, 박사의 추론이 정답에 가까웠다는 뜻이었다.
“네가 예전에 말했지? 내가 고집이 세다고. 맞아. 난 한 번 꽂힌 건 반드시 풀어버려야 직성이 풀리거든.”
박사는 소파에서 일어나 스카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한쪽 다리를 꿇은 채, 아래를 보고 있는 스카디의 시선이랑 자신의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묻지는 않을게. 꼬치꼬치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다만.”
한가해 보이는 스카디의 오른손을 박사는 양손으로 상냥하게 감싸서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보다 체온이 낮은 스카디의 손끝으로, 박사의 온기가 스며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다면 부디 말해줘. 설령 해결하기 힘든 문제라도, 둘이서 하면 부담이 나눠질 거 아니야? 그러니까, 혼자서 모든 짐을 지려 하지 말아 줬으면 해.”
박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카디는 가슴팍에 이질감을 느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에, 그녀는 감전이라도 당한 것 같은 찌릿찌릿함을 느끼며 급히 박사의 손길을 떨쳐내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두근.두근. 가슴의 울음소리가 거세지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건 그녀에게 자주 있었던 일. 다수의 적을 혼자서 상대해야 할 때, 강대한 적이랑 마주칠 때, 그리고 ‘과거’를 바라보는 그 순간이 될 때.
허나 그녀가 지금 느낀 이 고동은, 평소에 느끼는 등골에 얼음이라도 집어넣은 것처럼 서늘해지면서 다리에 철사를 박은 것 같은 뻣뻣함이 섞이면서 발생하는 끔찍한 불쾌감이랑은 전혀 다른 무언가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스카디? 괜찮아?”
이 ‘이질감’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은, 의아한 듯이 일어나서 스카디에게 손을 뻗었다. 혹시 열병이라도 있는 건 싶은 걱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피곤하네. 먼저 일어날게.”
접근해오는 그로부터 달아나려는 듯, 스카디는 급히 일어서서 문으로 향했다. 박사가 뭐라 말하려고 했을 땐, 이미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었다.
“곧바로 마음을 열지 않을 거라 예측은 했다만... 아직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멀었나.”
갑자기 방으로 난입한 어색한 정적에, 박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앉으면서 문득, 며칠 후에 있을 용문 파견 작전을 떠올렸다. 부디 스카디가 컨디션을 그 때까지 회복하길 속으로 기원하며, 무사히 임무가 완수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은 채, 자신의 논문을 읽는 것을 재개했다.
빗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박사에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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