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와 철이 부딪히는 소리. 작고 큰 폭발음. 적들의 고함과 비명. 잡음과 굉음의 불협화음이 공간을 옥죈다. 폭우와 돌풍이 용문을 지배하고 있었다.
로도스와 용문 사이의 계약 목록 중 하나인, ‘리유니온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주기적인 용문 정찰’. 이번에도 언제나와 같이 순찰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한 박사의 바람과는 다른, 꽤 상당한 수의 리유니온 군단과의 접전이 발생했다. 박사가 담당한 후문 쪽의 인원수가 심상치 않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슬럼가에 잔류한 병사들의 정보망을 활용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플래티넘은 앞쪽의 사냥견들을, 블루포이즌은 캐스터들을 부탁해! 일반 병사들은 프로스트리프가 저지! 가비알은 보조를!”
입구 근처의 용문 시민들은 박사를 제외하고 전원 대피한 상태. 그의 신경 연결 네트워크를 통한 지휘로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리유니온 병사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전장은 언제나 방심하면 안 된다는 옛 전략가들의 말이 박사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몇 달 전에 대거 소탕한 이후로 잠잠하다 보니 평소랑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해서 대원수를 최소화시킨 그의 선택이 큰 화가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 최소 인원이 대부분 여러 경험을 거친 베테랑들이어서 중상자가 발생하거나 전열(戰列)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지만, 장기전이 될수록 불리해지는 건 인원수가 훨씬 적은 로도스 쪽이었다.
◎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20분이 넘어갔다. 이미 전열에 있는 프로스트리프가 지쳐 보이는 낌새가 보였고, 플래티넘의 화살도 슬슬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리유니온 병사들의 수도 상당수 줄어들었지만, 남은 적들이 부랑자나 장갑병 같이 처치하기 힘든 적들이 대부분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병사들은 소모전을 위한 발판이었다는 걸, 박사는 곧바로 간파했다.
좀 더 버텨볼까 고민한 박사였으나, 신경 연결 네트워크에 연동된 드론으로 비치는 프로스트리프의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즉각 철회했다. 아츠를 과도하게 사용한 탓인지 눈썹을 찡그린 채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아 이 이상은 한계치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있는 대원중에 프로스트리프를 대체할 오퍼레이터는 현재 박사의 옆을 호위하고 있는 스카디뿐. 협소한 공간에선 그녀와 같은 넓은 범위를 파괴하는 전투 방식은 상성이 좋지 않다. 스카디 본인 역시 힘을 조절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녀를 투입하면 주변 구조물이 파괴되는 것을 각오해야 되는 사항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시비를 따질 여유는 없다는 걸 아는 박사였기에, 그는 결심을 굳혔다.
“스카디, 컨디션은 어때?”
“평소대로야.”
박사의 육안 너머로 스카디의 깔끔히 정돈된 복장이 비쳤다. 여전히 다크서클이 그녀의 루비색 눈 아래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지만, 그는 적어도 전투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만약 그녀가 전투에 나서면, 박사는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없어진다. 허나, 다가오고 있는 리유니온의 군세를 막아내기 위해선, 스카디만한 힘을 가진 전투원도 없다는 걸 안 그였다.
폐에 남은 일말의 근심을 심호흡과 함께 내뱉은 채, 체스에서 상대편 퀸의 이동 범위 안에 킹을 넣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인 위험한 수를, 박사는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프로스트리프는 스카디랑 교대해서 후방으로 와서 가비알에게 치료를. 플래티넘도 이제부터 화살을 최대한 아껴! 블루포이즌은 조금 뒤로 이동해서 스카디를 엄호해줘!”
박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날과도 같은 돌풍이 그의 옆에서 용솟음쳤다. 먼지가 눈과 코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리고 있는 박사의 팔 너머의 시야엔, 도약해 저 멀리에서 대검을 높이 치켜든 채로 떨어지고 있는 스카디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윽고 폭탄이 투하됐을 때의 소리, 혹은 천둥소리와 비슷한 굉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마치 암초에 부딪혀 잘게 흩어지는 파도와도 같이, 혹은 바람에 흩날리는 한가을의 단풍잎처럼. 다가오는 리유니온의 군세가 허공에 흩날렸다. 이윽고 폭죽처럼 터지는 선혈의 피안화가 땅과 스카디를 물들였지만, 폭우가 그 흔적을 깔끔하게 씻겨냈다.
잔잔한 물결 같은 횡베기는 장갑병의 갑옷을 가르고, 그 다음 내리친 해일과도 같은 참격은 방패를 두부 썰 듯 쪼갰다. 이윽고 사방팔방으로 몰려오는 적들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휘몰아치는 검은 섬광은 ‘천재’가 몰고 오는 폭풍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군세가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스카디의 루비색 안광이 빗속에서 섬뜩하게 반짝이고 있는 걸 본 박사는, 그녀와 임무를 나갔던 오퍼레이터들의 평가가 결코 시적인 비유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보고서에 올렸던 묘사랑 완전히 일치한 스카디의 전투하는 모습에, 박사는 깍지를 낀 채 손가락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저 루비색 눈의 여성이 펼치는 활극은 전율을 일으킬 만큼 경이로웠다. 허나, 비전문가인 박사가 보기에도 프란카나 아스테시아 같은 검사들과 달리, 스카디의 동작이 일반적인 검술이랑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투박하고 틈이 많은 움직임. 가끔 발을 헛디딜 뻔한 상황에서도 곡예하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신체. 그러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적을 베는 스카디의 모습은 박사가 보기엔 죽고 죽이는 살인 기술이 아닌, 오히려 이국의 전통안무와도 같이 아름답다고 느껴져서, 전투 중이라는 걸 망각하고 멍하니 보게 만들었다.
[여기는 정문 쪽의 첸. 박사. 무사한가?]
용문근위국 팀장, 첸으로부터의 통신이 박사의 잠들어가는 이성을 일깨웠다.
“첸 팀장님? 그쪽 상황은 괜찮은가요?”
[거의 다 끝나가. 간부로 보이는 살카즈 검사는 도망쳤고 체포한 녀석들을 심문 중이야. 그쪽은?]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에요. 후문쪽으로 기습을 할 생각이었는지 수가 상당한데요?”
[어째 정문으로 오는 인원수가 적다고 생각했더니... 호시구마? 무슨 일이지?]
통신 너머로 첸이랑 호시구마가 몇 마디를 주고받는 것이 박사의 귀로 들려왔다. 이윽고 첸은 혀를 차면서 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박사. 조심해라. 아무래도 이번 리유니온은 머리를 꽤나 쓴 거 같아.]
“네?”
[정문은 미끼 역할이다. 후문쪽을 물량 공세로 밀어붙여 신경을 외부로 쏠리게 한 다음에 내부의 소규모의 별동대가 기습해서 양쪽의 지휘체계를 무너뜨려서 방어선을 함락시킬 생각이었어.]
“잠깐만요, 그 뜻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심히 있도록. 지금 지원하러 가겠다.]
통신이 끊김과 동시에 박사는 허망한 한숨을 내뱉었다. 전방의 리유니온을 스카디가 막고 있는데 이번엔 용문 내부에서 공격이 들어온다니, 박사 입장에선 힘겹게 들고 있는 암석 위에 1톤짜리 추를 더 끼얹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답답해하는 가슴을 손으로 문지른 채, 박사는 주변에 있는 오퍼레이터의 모습을 보았다.
프로스트리프는 전투를 재개하기엔 아직 힘든 상황이고, 그렇다고 스카디를 엄호사격하고 있는 블루포이즌을 후퇴시키기도 곤란하다. 하물며 가비알은 프로스트리프를 치료 중이며 애초에 메딕 오퍼레이터에게 근접전을 명령할 수는 없다. 하관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더 곤란해진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되나 곤란해하고 있을 때, 박사의 뒤에서 남성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서있지 마, 박사!”
신경 연결 네트워크와 연동된 드론 너머로 비치는 활을 잡고 있는 플래티넘의 모습과 함께, 뒤를 돌아본 박사의 시야엔 정확하게 헤드샷을 당한 리유니온 병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미 리유니온의 별동대가 급습을 시작한 것이었다.
대충 보아하니 20명 안팎의 인원수. 스카디가 상대하고 있는 군세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의 적이지만, 근접전이 불가능한 현 상황에선 박사에게 외발자전거로 밧줄 위를 질주하는 것이랑 비슷할 정도의 위기감을 불어넣었다.
“플래티넘, 남은 화살의 개수는?”
“다는 못 막아. 일단 후문에서 떨어져 있어!”
후문에서 떨어지면 사방에서 공격을 허용해버리게 되니 혹여나 스카디가 놓친 적들에게 공격당할 여지가 있으며, 어차피 리유니온 별동대 쪽에 숙련된 석궁병들이 있는 것이 보이니 도망쳐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플래티넘의 사격에 신변을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 말 그대로 사면초가인 이 상황에 박사는 속으로 비속어를 내뱉었다.
“박사, 위!!”
고민하기를 10초. 오퍼레이터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평소 같지 않게 다급하게 외치며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달려오는 프로스트리프의 모습이 보였다.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올려지는 박사의 시야의 너머엔, 그를 향해 낙하하는 공수부대병의 모습이 보였다. 프로스트리프가 달려온다 해도 이미 늦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황급히 움직이려 한 박사였지만, 땅 아래로 뿌리를 내린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수부대병은 착지함과 동시에 박사에게 달려들었다. 거리는 길어봤자 5m. 80cm 길이의 칼날이라면 몇 보 안에 닿을 거리.
한 걸음 째. 공수부대병은 검을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칼날에 아츠를 부여했다.
그 다음 한 걸음 더. 팔이 커다란 보라색의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앞으로. 정확히 박사의 복부를 향해, 칼날이 맹렬히 돌진한다.
◎
무수히 많은 적이 달려오건. 멀리서 공격해 오건. 하늘에서 날아오건. 땅에서 솟아 나오건. 어떠한 게 오던 검으로 벨 것이다.
설령 검을 쓰지 못하더라도, 사지가 멀쩡하게 있는 한 몸을 방패로 삼아서 막아낼 것이다.
당신은, 내가 전력으로 지키겠다고 맹세했으니까.
◎
“박사. 다친 곳은 없나?”
“전 괜찮아요.”
용문 근위대의 차량에서 나오는 조명이 박사와 그 뒤에 있는 로도스의 대원들을 비췄다.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챈 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부상자는? 메딕 오퍼레이터가 있다고는 해도 그 많은 인수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텐데.”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채, 박사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가 급습당했을 때의 이미지가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시야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손을 꽉 쥔 채, 그는 목에 공이 걸린 것 같은, 감각을 간신히 다스리며, 박사의 시선은 자연스레 뒤에 있는 대원에게로 이동했다.
그를 지키려다 대신 베인 상태로 계속 검을 휘둘렀던 그녀는, 윤기나는 은색 머리칼이 피범벅인 상태로 쓰러진 채, 메딕 오퍼레이터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빗소리와 바람소리에 이어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온다. 세 가지의 소리가 만들어낸 불협화음이 현장에 있는 모두의 마음속에 크고 작은 파도가 일렁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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